리뉴얼, ‘한국교회 희망이야기’ (19)

 [윤홍식 기자가 묻고 이대희 목사가 답하다]

편집자 주 : [윤홍식 기자가 묻고 이대희 목사 답하다] 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살리는 실제적인 대안을 찾고 실천방안을 제시하는 시간입니다. 효과적인 전달과 독자와 소통을 위해 기자와 좌담 형식으로 글의 연재를 생생하게 구성하고자 합니다. 일방적인 전달 방식을 벗어나 기자가 묻는 소통방식인 대담하는 형태로 전개됩니다. 이런 방식은 글을 읽을 때 친근하게 독자와 소통을 이루는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치 내 곁에서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전개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지금 삶의 자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아주 급속도로 달라지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그 속도를 다른 나라 보다 더 빠릅니다. 그러나 그것에 따른 국민적 수준은 아직 못미칩니다. 자살율, 이혼율. 사교육비. 음주율. 저출산 등은 세계에서 최고입니다. 하지만 행복지수는 거의 꼴지 수준입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지만 만만치 않습니다. 이것을 위해 어떤 해결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예수 안에 모든 답이 들어있어"

그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안에 모든 답이 들어 있습니다. 얼마나 예수를 알고 믿고 그분의 삶을 실천하느냐가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입니다. 예수의 생각과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평생갈수 있는 장기적인 모델을 세우는 일입니다. 모든 문제는 정도의 기준점에서 어긋나서 생기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3가지 핵심을 알아야 하고 그 출발선에서 모든 것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세상과 교회의 모든 문제는 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이 준 비전을 향해 달라가야 합니다. 죄의 문제에서 출발해야 문제가 풀립니다.

그 첫 번째로 생각할 것은 무엇인가요?

 

 

 

첫째, 죄는 자기기준으로 사는 것임을 이해해야 해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죄는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기준으로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기준으로 사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모두 기준에서 다르다 보니 문제가 발생합니다. 다양하지만 기준은 원리와 같은 것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먼저 찾아서 적용하는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예수가 오신 이유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절대진리가 되야할 성경이 상대적으로 전락하는 시대"

오늘날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위기는 모두가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절대적 진리가 없고 모두 상대주의로 가는 혼란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기준이 되는 순간 소견대로 행하게 되고 나중에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상황에서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것 같은 상황이 닥치게 될 것입니다. 누구도 침해를 받지 않고 가장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 같지만 결국은 더 소외되고 고독해지면서 우울증이 심해지고, 절대적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될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이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알게 되면서 불행이 시작된 것처럼 지금 이 시대는 선악과의 위기가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적 영향에 따라 교회와 신앙도 위기가 이미 닥쳐왔습니다. 점점 인간의 기준이 강해지면서 신앙의 절대성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 성경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고 인간의 선택사항으로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이런 위기 속에서 접어들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세상이라는 뜻인 것 같군요. 그렇다면 둘째는 무엇인가요?

 

 

둘째, 그렇다면 절대기준으로 ‘오직 성경’을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말씀만이 유일한 삶의 기준임을 몸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기준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 기준은 예수기준입니다. 예수 기준이란 성경의 기준을 말합니다.

중세 로마 가톨릭이 부패한 것은 성경과 교회 전통이 첨가되고 교황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것을 개혁한 것이 오직 성경의 개혁가들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는 성경 이외의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 실종의 자리에 다른 과목만 가득"

신학교 안에서 조차 성경을 찾아보기 어렵고 다른 과목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성경 66권 자체를 배우는 시간 보다 성경을 설명하는 학문과 기타 다른 과목을 배우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느 신학교는 선택 과목으로 100개 이상이 됩니다. 이제는 오직 말씀으로는 안 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다른 것이 포함되어야 그것이 복음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 한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다른 것이 첨가하고 싶은 유혹에 이끌립니다. 다른 프로그램이나 학문으로 부족한 부분을 대체 하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도 심리학. 영성학, 복지학, 실용학, 자기계발, 경영학, 성공학, 과학과 기술, 신비주의 등이 성경을 몰아내고 중심을 차지하려는 움직임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곳에 이끌립니다. 인간의 부족함을 이런 것으로 대체 하려고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심해지고 있을까요? 그것은 성경의 절대성인 “오직 성경 (sola scriptura)”의 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의 정신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오직 성경의 정신은 지금도 여전히 필요하고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에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합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마지막 세 번째는 어떤 것이 있나요?

 

 

 

셋째, 변화 ‘오직 성경’을 넘어 ‘모든 성경’으로 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오신 것은 66권의 모든 말씀이 곧 자신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확신합니다. 즉 성경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동안 한국교회는 ‘오직 성경’을 믿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이것은 상대주의 세계 속에서 절대적인 기준인 성경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으로 지금까지 한국교회를 지켜온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으로만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경을 말하면서 결국은 내가 좋아하는 성경을 골라서 그것을 절대화 하고 그 나머지는 자기 기준으로 살아가는 경향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은 성경의 정신을 잘 표현해주지 못합니다. 오직 성경을 강조하다 보니 자기가 선호하는 성경구절만 강조하고 절대화하면서 그것이 교리주의로 나갔고 결국 성경과 배치되는 삶의 양태까지 발전했습니다. 자기가 보는 성경 기준에 맞지 않으면 정죄하고 배척하면서 분열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오직 성경'을 넘어 '모든 성경'으로"

지금 한국교회에 분열이 많고 교파가 만하고 갈등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가 한 몫 합니다. 요즈음 따라 한국교회에 갈들이 많고 서로 하나 되지 못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왜 그런 일이 많아졌나요? 그것은 그동안 “오직 성경”이 만들어 낸 잘못된 성경 이해의 결과입니다. 성경을 자기 기준으로 삼으면서 한 가지 놓치고 있는 부분은 내가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취사선택한 다는 점입니다.

자금 한국교회의 신앙양태는 성경을 골라보는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심으로 신앙생활 방식에서 탈피 해야 합니다. 이제는 경계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필요한 부분이지만 그것이 중심이 되면 성경을 가지고 자기가 주인이 되는 또 다른 문제를 낳게 됩니다. 마치 바리새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을 모르면서도 성경을 아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습니다. 자칫 성경 몇 구절을 가지고 평생 신앙 생활하는 모습이 될수 있습니다. 성경을 편식하면 영적 암(癌)이 걸리게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이런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보고 싶은 설교. 듣고 싶은 설교. 읽고 싶은 성경만 보고 자기 기준으로 성경을 보면 삶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영적 교만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성경의 편식은 영적인 암에 걸리게 한다는 말씀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정신이 필요한가요? 교회에 적용할수 있는 점을 말씀해주세요. 종교개혁자들에게 부터 있었던 것인데 혹시 우리가 소홀히 한점은 아닌지요?

 

맞아요.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이미 갖고 있었던 것인데 이것을 제대로 이어 오지 못한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다양한 성경의 모습을 하나로 통일해야 하는데 그것은 “tota scriptura (전체로서 성경)”입니다. 성경을 말할 때 어느 한권을 강조하는 것은 조심해야 하고 위험합니다. 성경은 “모든 말씀”을 의미합니다. 딤후 3:16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니라“ (마 4:4) 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전체로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선택하여 보는 순간 그것은 성경이 아닐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을 다 읽고 공부하고 믿어야 합니다. 신약만 보고 구약은 무시하면 그것은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로서 성경을 믿고 공부할 때 우리는 안다고 말할 수 없고 평생공부 해야 합니다. 전체로서 성경을 보지 못하면 말씀 앞에서 겸손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성경이 아닌 어느 성경 내용 하나를 가지고 평생 산다면 그것은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자기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전체로서의 성경을 바라봐야"

지금 한국교회가 성경을 공부하지 않는 이유는 골라 읽는 성경으로 만족해서입니다. 모든 성경을 몰라도 몇 구절만 믿어도 천국을 간다고 착각하게 만든 잘못이 큽니다. 모든 성경을 배우려는 마음과 전체 성경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면 어쩌면 지금 진정으로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또 다른 자기 기준으로 신앙 생활하는 숨겨진 죄악일 수 있습니다. 전체로서 성경을 대할 때 우리는 겸손하고 모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날마다 자기를 죽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어느 하나를 빼거나 더하면 안됩니다. 전체로서 성경 그것은 곧 인격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단순히 인간을 넘어 그가 곧 태초 전에 계신 그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 것처럼...

성경을 전체로 보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마지막으로 마무리 말씀을 해 주신다면요?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은 성도들에게 성경의 베일을 쳤다면, 오늘날 현대교회는 성도들에게 편집된 성경만을 보여줬어요. 아시는 것처럼 전체가 아닌 일부의 편집은 항상 본질을 왜곡할 수 있어요. 설교자는 말하고 싶은 것만 설교하고 성도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요. 그것은 교회를 쇠약하게 만드는 악순환과 같아요. 한국교회는 어서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 그래서 성경을 전체로 받아들이는 일이 시급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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