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교회는 은혜공동체

교회는 뭐니 뭐니 해도 은혜공동체다. 은혜의 시원(始原)은 하나님이시다. 사람들도 은혜를 말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은혜의 뿌리는 온전히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시혜(施惠), 그럴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쏟아 부어주시는 천래적인 총애는 그리스도인만이 누릴 수 있는 일종의 영적 특혜다. 사람들은 대가를 바라고 특혜를 베풀지만 하나님은 아무 보상 없이 그저 베푸신다. 인간에게 은혜가 필요한 것은 은혜 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도 받을 수 없고 은혜 없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도 없다.

인간의 단절과 하나님의 복원작업

인간의 탐욕과 불순종이 가져온 죄는 영원히 누리도록 예비 되었던 온갖 좋은 것들로부터 차단시켰다. 하나의 죄로 출발한 죄의 씨앗은 무서운 속도로 세를 불려갔고 하나님의 우주 경영에 딴지를 걸었다. 모든 죄는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파괴시켰다. 영적 소통과 사랑 가운데 누리던 생명의 풍성함이 사라졌다. 존재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고 은총의 햇살에서 영원히 멀어졌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숨(루아흐)으로 존재한 사람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

하나님께로 향한 모든 통로가 차단되자 인간 편에서 시도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배제되었고 모든 인간은 철저한 단절과 고립 속에 자신이 뿌린 죄의 대가를 고스란히 안고 살았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이 먼저 손을 내미셨다. 사랑의 복원 작업을 시작하셨다. 구약의 각종 제사 제도와 율법의 말씀을 통해 소통의 길을 개통하셨다. 모델로 선정된 이스라엘은 이 소통과 관계의 복원에 적절히 대응치 못했다. 주님께서 친히 인간 세상을 찾으셨으나 누구 하나 눈길을 두는 자가 없었다. 메시아를 바라고 연구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일반 민중들까지 그를 외면했다.

교회의 역사는 은혜의 역사

하나님이 선한 의도를 갖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 은혜다. 주님께서 지상 생활을 통해 보이셨던 삶과 사역이 은혜다.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은혜다. 그분의 승천과 성령의 파송이 은혜다. 성령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문을 활짝 여시고 한 민족에 국한되었던 구원의 대로를 넓히셨음이 은혜다. 이스라엘의 반역을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주춧돌로 삼으셨음도 은혜다. 새 언약의 백성들을 교회 안으로 한데 모아주심도 은혜다. 그렇게 세운 교회를 자신의 몸으로 삼으시고 그들을 생명공동체로 건재할 수 있도록 스스로 머리가 되어주심도 은혜다.

성령을 통한 주님의 임재도 은혜요 말씀과 기도의 사역을 위탁하시고 세상 만민을 구원할 사명을 위임하심도 은혜다. 인류 역사를 통하여 전 시대를 아우르며 자신의 뜻을 천천히 이루어 오심도 은혜다. 박해의 시대에 자신의 교회를 눈동자같이 보호하시며 배역의 시대에도 딴전을 피우던 교회를 적자처럼 아끼셨음도 은혜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의 물결이 세속화의 비바람을 맞으며 휘청거리고 비틀거리면서도 세계복음화의 한 방향과 목표로 진군했음도 은혜다.

출발은 거룩해도 교회의 진행 과정에서 보인 갖가지 수치와 실패를 질책치 않으시고 갱신의 기회를 허락하심도 은혜다. 사람들이 모인 조직체로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유기체를 형성하도록 동기 부여를 하심도 은혜다. 어떤 지역에서는 문 닫는 교회가 속출하지만 지구의 반대편에서 새롭게 문을 여는 교회를 증가시키심도 은혜다. 오염과 변질의 위험에 처한 교회를 소수의 남은 자를 통해 지키시는 성령의 의지가 은혜다. 배역과 혼돈의 위기 속에서 교회의 본질을 수호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신실한 성도들의 존재가 은혜다.

다양함을 일치의 적이라, 단일함을 공동의 걸림돌이라 거부하지 않고 서로를 지탱해온 교회의 지혜가 은혜다. 자기중심의 신앙을 시시때때로 십자가에 못 박으며 타인지향의 섬김을 실천한 교회 역사가 은혜다. 영적 변방에서 늘 중앙으로 몸을 돌이켜 세우며 벼랑에 매달려서도 마지막 생존의 끈을 놓지 않는 교회 애호자들의 중보기도가 은혜다. 세상을 사랑하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 군중을 가까이 하면서도 군중에 영합하지 않는 교회의 분별력과 절제가 은혜다. 은혜 아니면 교회의 설 자리는 없다.

일상의 공동체에서 구별된 공동체로의 교회

기독교 공동체의 발현은 교회의 초창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직 세상에 교회의 정체성이 알려지기 전에 박해를 피해 모인 신자들이 초기의 공동생활을 영위하며 믿음을 지켰던 다메섹, 안디옥, 로마의 가정 교회들이 원시 공동체에 속했다. 물론 첫 출발은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시작되었다. 주님의 사도들이 여전히 활동하던 시기였기에 주님의 가르침을 가장 생생하게 구현할 수 있었다. 그들은 거의 매일 모였다.

공동체에서 모임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모임에서 그들은 결집된 힘의 현장을 확인하고 꺼져가던 불씨를 되살리곤 했다. 아직 건물로서의 교회가 나타나기 전의 가정 교회는 이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모여서 그들이 한 것은 아주 소박한 영적 일상이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나누었다. 떡을 떼며 친밀함을 키웠고 서로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고 공동체의 존립을 위해 희사했다. 그들의 일상생활은 여전히 세상에 있었으나 구별된 날에 모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체화시켰다. 안디옥 공동체는 구별된 삶의 도덕적 감화로 인해 불신 그룹들로부터 호의적인 “그리스도인”이란 별칭까지 얻었다.

세속적 권력과 기독교 황금기

박해의 시기를 잘 견디고 살아남은 소수의 기독교 공동체는 로마 황제의 기독교 공인에 따라 지하의 토굴과 밀실에서 나왔다. 사악한 이교 집단에서 제국의 종교로 탈바꿈한 교회의 위상은 하루아침에 급부상을 했다. 제도권에서 힘을 갖게 된 교회에는 순 기능보다 역 기능이 재빠른 속도로 작용했다. 기독교의 황금 시기라 일컬어지는 중세는 영적으로는 암흑과 혼돈의 세기였다. 사람들은 단순히 기도하는 자(oratores)와 싸우는 자(bellatores)와 일하는 자(laboratores)로 나뉘어 자신들의 기능에 충실하고자 했다.

성직자와 기사단, 그리고 대다수 농민을 비롯한 일반 대중은 단지 사회적 기능만이 아니라 일종의 계급 체계가 되어 서로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교회는 이들에게 일치와 화합의 장이 되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교회는 권력의 중심축을 맴돌며 자신들의 사역과 영적 위치를 특화시켰다. 실망한 민중은 항거했다. 세속적 권력에 유착된 기독교 세력에 저항해서 교회의 원 모습을 찾고자 시도한 것이 수도원 운동의 시발이었다. 그렇게 해서 역사상 많은 기독교 공동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중세의 수도원 운동은 훨씬 이전인 교부 시대 직후부터 시도되었다.

바벨탑을 지향하는 교회 권력

일반 신자들의 실망이 분노로 바뀌자 일단의 성직자 계층에서 바벨탑을 지향하는 교회의 시도에 철퇴를 가하는 시도가 행해졌다. 그 선봉에 마틴 루터가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영적 기사 그룹이 되어 한편으로 불신의 이교 세력과 다른 한편으로 가톨릭의 철옹성 같은 권력 집단에 대항하여 싸웠다. 무모하고 불가능한 싸움이었지만 그들은 순교자의 열정으로 임했다. 루터는 수도원 생활 중이었는데 일단의 수도원들마저 이미 가톨릭의 전위 부대가 되어 교회의 세속화에 주구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락한 수도원장들은 제후와 왕들, 그리고 가톨릭교회로부터 막대한 재정 지원을 받으며 자신들의 세력을 키웠다. 성지 탈환을 내세워 힘없는 민중에게 폭력을 일삼는 기사들의 행위를 속죄하고 찬양하며 십자군운동을 거룩한 싸움박질(聖戰)로 승화시켰다. 명예와 부, 거룩한 열정과 신심으로 짬뽕되어 급조된 십자군은 작은 승리(한 차례)와 많은 패배(여덟 차례)를 거쳐 실패했고 몰락한 기사 계급은 명분을 잃자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해 급기야 민중의 원성을 사는 도둑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톨릭은 건재했으나 교황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확산일로에 있던 기독교 공동체 역시 움츠려들었다.

변질된 것은 깨뜨리고 처음을 회복하는 교회

종교개혁은 변질된 교회에 철퇴를 가하고 교회가 탄생했던 원래의 순수 상태를 지향하려던 복귀 운동이다. 세례요한이 광야에 외치는 자로 주님 오실 길을 예비했듯 위클리프와 후스와 사보나롤라와 같은 선각자들이 루터의 출현을 위해 길을 닦았다. 그들은 전통에 눌려 기진맥진하던 말씀을 곧추 세웠다. 진리의 보검에서 녹이 제거되자 본래의 두드려 깨우치는 검광이 빛을 발했고 칼집에서 꺼내진 진리의 검은 거짓 신상을 여지없이 깨뜨렸다.

교황권이 무너지던 날 사탄은 지옥의 왕궁 침실에서 오수를 즐기다 루터의 일격으로 무너진 천년 아성의 처참함에 혼절하여 한참을 그리 지냈다 한다. 변질의 길을 버리고 변화를 통해 옛 모습을 회복한 교회는 마지막 시대의 부흥을 위한 장도에 오르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변화의 가능성을 근거로 교회는 부단히 갱신과 개혁을 부르짖고 아무리 칠흑 같은 한밤중이라 해도 부흥의 여명과 함께 도래할 새 시대의 열림을 뜨거운 심장으로 고대하는 것이다.

변혁의 생명력으로 봉홧불을 밝히는 교회

변형된 교회는 원형으로 돌아가야 한다. 욕심도, 권력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피가 굳어 주형 된 교회다움의 틀에 들어가 자신을 녹이고 해체시켜 원시교회의 원판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교회에 내재된 절대 비교 불가의 가치를 인정한다면 교회를 교회답게 보전하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마땅한 도리다. 몸이 회복되어 지체가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체가 회복되어야 몸이 건강해진다. 이 경우에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원리는 매우 적합하고 이롭다. 교단 정화 이전에 교회 정화, 교회의 변화 이전에 각자 그리스도인이 바뀌는 것이 급선무다. 바뀌어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가 아니라 주님이 뜻하시는 바대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상한 변화에 머물고 만다.

교회가 많이 변질되었음에도 이 시대에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견지한 교회가 곳곳에 포진해있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요처에 남겨두신 천국의 초소 같은 곳이다. 교회가 아무리 변질되어도 원형으로 회복할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교회가 지닌 본래적인 변화의 능력이다. 교회의 자정 능력이 사라졌다 비판을 하긴 해도 교회의 핵심에는 주님이 심어두신 생명의 불씨가 있다. 이 불씨를 살려 불꽃을 일으키고 불길을 거세게 퍼뜨려간다면 다시 한 번 개혁의 봉홧불이 어둔 세상을 밝히는 모습을 우리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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