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욱 목사의 인문학 산책 (7)

 

이상욱 목사│목민교회(인천) 담임, 호서대학교( Ph.D),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최고의 선은 행복이다
우리 주변에는 행복에 대한 논의가 넘쳐 난다. ‘행복 지수’, ‘행복의 심리학’, ‘행복한 마음’, ‘인공 행복’까지 ‘행복’에 대한 이야기는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 행복론의 이런 과잉 현상은 우리 사회가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다. 참혹한 전쟁이 평화에 대한 갈망을 낳듯, 불행한 일상이 행복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 아닐까? 분명히 우리는 욕망의 주체이고, 우리의 욕망은 모두 좋은 것을 지향한다. 물론 행복도 욕망이 지향하는 좋은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행복이 이런 뜻에서 좋은 것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 목적 가운데 최고의 목적이라는 데 대해서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느 누가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을까? 그렇지만 ‘행복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이르면 사람들의 의견이 갈라진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들은 건강한 것이 행복이라고 말할 것이고, 주식 시장 사람들은 돈이 많은 것이, 그리고 대다수 사람은 즐거운 것이 행복이라고 말할 것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사정에 따라 행복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말하던 사람도 병에 걸리면 건강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무수히 많은 행복론이 우리 주변에 넘쳐 나는 것은 행복을 놓고 사람들의 마음이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행복론이 왜 중요한가? 행복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좋음에 속하기 인간은 끊임없이 이를 추구하며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행복론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나라를 세우기도 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도 하고, 타인의 행복을 탈취하기 위해 전쟁을 불사하기도 하고, 인간을 국가에 종속시키기도 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 옮김│ 출판사 길

좋음으로 나가는 인간
아리스토텔레스(B.C. 384~B.C. 348)는 17세에 스승 플라톤의 문하에 들어 ‘아카데미아’에서 20년 동안 수학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욕망’, ‘좋은 것’, ‘행복’ 사이의 관계에서 시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방금 확인한 사실, 즉 ‘우리는 모두 좋은 것들을 욕망하는데, 좋은 것들 사이에는 수단과 목적의 관계가 있고 그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행복이다.’라는 것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전제이자 논의의 출발점을 이룬다.
제1권(총 10권)의 첫 문장을 보자. 우리가 선택한 책에서는 “모든 기예(技藝, techne)와 탐구(探究, methodos), 또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도서출판 길, 강상진ㆍ김재홍)로 번역했다. 기존의 번역서나 국정 교과서들까지 일제히 원어 ‘좋음, 탁월함’을 뜻하는 ‘아가톤(agathon)’을 ‘선(善)’으로 번역했다. ‘선=착함’으로 협소하게 번역하면 책상을 잘 만든 목수가 ‘탁월한 목수’가 아니라 ‘선한 목수’로 오해될 수 있다.

 

<아테네 학당>을 설명하는 <바티칸 박물관>의 프레스코화 이미지 설명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란 아테네 학당 벽화 속에서 중앙의 두 인물 중 오른쪽 파란 망토를 두른 아리스토텔레스가 들고 있는 책(화살표 -3번)을 말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교육기관인 리케이온(Lykeion)에서 강의 할 때 사용했던 초고(草稿 Draft)를 아들인 니코마코스(Nichomachos)가 편집하여 엮은 책이라고 해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중앙의 두 인물 중 왼쪽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플라톤이다. 손이 하늘은 향했던(화살표-1번) 플라톤은 자신의 우주관을 담은 티마이오스를 들고 있었던 것이고, 손이 땅을 가르쳤던 아리스토텔레스(화살표- 2번)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강의서를 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초고

 

이성: ‘왜’를 묻고 대답을 찾는 기능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누구나 ‘좋은 것’을 욕망하며 그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존재로 보았다. 하지만 그는 좋음, 즉 목적에도 종류가 있고, 위계(位階)가 있음을 말한다. 가령 좋은 직장을 얻고 돈을 벌어 행복을 누린다고 하자. 좋은 직장, 돈, 행복은 모두 좋은 것이다. 하지만 좋은 직장은 돈의 수단이고, 돈은 행복의 수단이다. 반면 행복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행복은 좋은 것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목적에는 다른 목적을 위해 필요한 ‘도구적 목적’이 있고, 도구적 목적들의 종착점이 되는 궁극적 목적, 즉 ‘본래적 목적’이 있을 것이다.
완전하고 자족적인 목적, 인간이 지향하는 그 ‘궁극적인 좋음’(절대선)을 당대인들은 ‘행복(Eudaimonia)’이라고 여겼다. 이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는 이러한 행복을 ‘기능’과 관계 지어 생각했다. 가령 좋은 연필은 쥐기 편하고 잘 써지고 심이 잘 부러지지 않는 연필이 있다고 하자. 그것이 연필의 좋음(선), 즉 좋은 연필이 된다.
이처럼 모든 사물에는 본래적인 기능이 있고 그 기능에 충실한 것이 ‘좋음’이듯 인간에게도 본질적이고 고유한 기능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성(理性)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왜’를 묻고 그에 대해 ‘이유’ 혹은 ‘원인’을 대답으로 제시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이성 능력 덕분이고 이것 때문에 우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성의 능력을 ‘좋게’ 개발하고 ‘탁월하게’ 발휘하는 삶이 행복한 삶이다.
윤리학에서 추구하는 것이 ‘생명체로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잘 사는 것이라면, 이때 중요한 것은 모든 생명체에게 공통적인 기능의 실현보다는 인간에게 고유한 기능의 실현이다. 그런 뜻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복을 일컬어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 실현해야 할 본성으로서의 ‘탁월함(agathon)’과 별개로 ‘탁월성(arete)’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끌어들인다.
인간의 탁월함에는 이성 뿐 아니라 비이성적인 부분도 있다. 감정이나 욕망이 대표적인 예다. 따라서 이성은 비이성적 부분, 즉 감정이나 욕망을 적절히 통제해야 한다. 욕망을 잘 실현시키는 탁월성은 어떤 것일까? 가령 갈증을 풀기 위해 서둘러 강가로 달려가 강물에 목을 담그는 얼룩말의 행동은 욕망을 잘 실현시키는 것일까? 아무 분별 없이 무작정 강물에 달려드는 얼룩말이 충족시키는 것은 얼룩말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강에 사는 악어의 욕망일 뿐이다. 자신에게 즐거운 것을 얻기 위해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드는 사람, 그렇게 무절제하고 무모한 사람은 악어에게 잡아먹히는 얼룩말처럼 자기 파괴적인 결과를 자초한다. 그런 뜻에서 욕망을 잘 실현하는 데는 절제나 용기 등이 필요하다. 바로 이런 탁월성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유의 탁월성’과 구별해서 ‘습성의 탁월성(aretē ēthikē)’이라고 부른다.

Arete-성품과 지성의 탁월성
품성이란, 타고난 성격을 습관을 통해 일정한 습성으로 갈고닦은 결과이다. 이러한 품성은 평소 그 사람의 행동방식을 결정하고, 행동방식은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는지 결정하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고유한 기능, 즉 인간으로서 탁월성 또는 덕은 무엇일까. 이것들은 ‘품성적’ 탁월성과 ‘사유적’ 탁월성으로 크게 나뉜다. ‘품성적’ 탁월성은 말 그대로 품성에 관련한 것으로 11가지가 소개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2~6권은 탁월성(arete)의 유형과 본성들, 즉 용기, 자유, 정의, 친애 등 탁월성의 유형 전반에 대한 안내들이다. 그러면 실천적인 덕목, 성품적인 탁월성이란 무엇인가. 이와 관련,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를 가장 먼저 논한다. 여기서 말하는 ‘용기’란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관련된 것이다. 두려움이 지나치면 비겁함이 되고, 너무 없으면 만용이 된다. 둘 다 악덕이고, 두려움이 그 중간에 위치하도록 조절해야 ‘용기’가 성립된다.
7권에서는 회피해야 할 성품으로 ‘자제력 없음(akrasia)’을 거론한다. 8, 9권에서는 친애(philia)를 다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즐거움’을 완성을 향해 가는 ‘운동’, 즉 완성되기 전까지는 불완전하다가 완성이 완료되고 나면 더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 지어진 집을 바라봄으로써 즐거움을 획득하듯, 처음부터 “하나를 전체로써 온전히 발휘되는 활동”이라고 설명한다. 아울러 행복 역시 탁월함의 품성 상태가 아니라 활동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요지다. 그리고 최고·최선의 활동으로 꼽는 것이 ‘관조’다. 그에게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철학(philosophia)이, 완전한 행복의 길이라는 것이다.

중용-적절한 최선
중용이란 ‘마땅히 그러해야 할 때, 또한 마땅히 그러해야 할 일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들에 대해, 마땅히 그러해야 할 목적을 위해, 마땅히 그러해야 할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처럼 중용은 결코 평균적 절충이 아니라 오히려 적절한 ‘최선’을 의미한다. 이른바 ‘합리적 선택’이다. 결국, 인간이 품성을 탁월하게 연마하고 발휘하는 것이 곧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습관화의 결과로 얻어지는 위와 같은 ‘성품적 탁월성’과, 가르침을 통해서 획득해야 하는 ‘사유의 탁월성’을 구분한다. 즉, 학문적 인식(episteme) 기예(techne) 실천적 지혜(phronesis) 직관적 지성(nous)인 철학적 지혜(Sophia)가 그것들이다. 즉, 하나는 객관적 진리를 인식하는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좋고 나쁨을 인식하는 ‘지혜’이다. 지식은 맞고 틀림을 가려내는 법칙적·필연적 영역을 다룬다. 반면 지혜는 좋고 나쁨을 선택해 삶을 가꾸어 나가는 실천적 영역을 관장한다. ‘지혜’란 좋음 또는 탁월함을 분별하는 능력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적절한 방법을 숙고하는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둘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결코 지혜로운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영리한 사기꾼은 있어도 지혜로운 사기꾼은 있을 수 없다. 만약 지혜가 없다면 중용을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부터 불가능한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혜는 어떤 불변의 법칙을 찾는 지식과는 다르다. 오히려 법칙을 벗어나는 가변적인 틈새를 섬세하게 포착·판단·대응하는 기능이다. 지혜 역시 품성과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 실천적으로 갈고닦아 함양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품성적’ 탁월함과 ‘지성적’ 탁월함(특히 지혜)이 한데 어우러져야 비로소 인간은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지식’에 대해 논한다. 지식은 법칙적 영역을 다루는 이론적 지성이다. 그는 지혜보다 지식이 행복을 위한 최고의 탁월함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며 그의 강의를 서둘러 끝낸다.

행복-관조적 활동
완전한 행복의 길이란 대철학자인 그는 과연 행복했을까. 트라키아 북동 해변의 작은 마을에서 마케도니아 왕의 주치의의 아들로 태어난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의 본토였던 아테네에서는, 플라톤의 수제자였음에도, 엄밀히 말하면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스승의 가르침과 긴장 관계를 유지했고, 마침내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했다. 아카데미아를 떠난 뒤 마케도니아에서 장래 통치자가 될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치는 이력을 쌓기도 했던 그는 ‘리케이온 학원’ 시절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마케도니아와 긴장 관계였던 조국으로부터 ‘불경죄(즉 알렉산드로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혐의)’로 기소당한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그렇게 죽였듯이 “아테네인들이 철학에 두 번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아테네를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세상을 떠났다.
‘관조적 활동으로서의 행복’을 논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삶은 인간적 차원보다 높은 것일 것”이라며 신적인 가치에 기대는 인상을 남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가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도록, 또 우리 안에 있는 것 중 최고의 것에 따라 살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완전한 행복이란 신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가능하다는 말, 그래서 인간의 완전한 행복이란 신화 속의 꿈이나 환상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행복의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는 서양 윤리학을 대표하는 다른 두 가지 입장, 즉 선의지에서 유래하는 윤리적 의무를 강조하면서 그런 의무의 이행을 선이라고 보는 ‘의무의 윤리’나 행복을 즐거움과 동일시하면서 이를 극대화하는 것을 선한 행동이라고 보는 ‘공리주의 윤리’와 다르다. 그는 먼저 그들이 교육을 통해 좋은 습관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런 뜻에서 좋은 습관을 낳는 교육은 법적 강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따라서 그런 교육을 위해서는 탁월한 행동으로 사람으로 이끄는 법률 체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탁월한 행동의 가능성 혹은 그것의 실현 조건에 대한 논의는 윤리학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기서 ‘행복의 윤리학’은 ‘행복의 정치학’으로 이어진다.

『행복의 역습』 로널드 W. 드워킨 지음 | 박한선, 이수인 옮김 | 아로파

행복의 역습』
미국 의사가 쓴 이 시대를 경고하는 책이다. 원제는 『인공 행복(Artificial Happiness)』이다. 지은이는 정신작용 약물, 대체의학, 운동요법 등으로 주어지는 인공 행복에 대한 맹목적 추구를 비판한다. 그러한 행복 찾기는 인간을 현실에서 유리시키고 진실을 무시하거나 회피하게 만든다.
인공 행복은 삶은 비참한데 약물 등의 도움을 받아 마음만은 행복을 느끼는 상태다. 불행은 사라졌지만, 불행의 원인은 여전히 존재한다. 인공 행복의 특징은 삶을 부정하는 힘이다. 인공 행복을 경험하는 사람은 비참한 삶도 비참하게 여기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만 그다지 고통스러워하지도 않는다. 아무리 나쁜 일이 있어도 기분은 여전히 유쾌하다. 이들은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지만, 그러한 삶의 경험이 깊은 내면을 관통하지는 않는다. 미국에서는 하나의 계층을 형성할 만큼 '인공 행복 미국인' 수가 엄청나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불행이 질병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불행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되었고 과학자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신경전달물질을 찾아냈다. 의사는 프로작 같은 항우울제를 처방만 하면 된다. 대체의학이나 운동요법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강박적 운동에 의한 행복감도 인공 행복의 일종이다.
이러한 경향은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래의 이들은 아동기부터 슬픈 감정을 없애도록 인공 행복을 주입받는다. 슬픔을 회피하는 것이 이들의 일상이 되고, 삶에 어려움이 닥치면 다시 인공 행복을 찾는다. 실제적인 해결책을 향해 한 걸음도 내디디지 못한 채 주기적인 마비를 통해 의식의 성장이 억제된다. 그들은 행복한 성인이 되고 행복한 노인이 되며 일생 불행을 다루기 위해 같은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나오는 미래 사회와 비슷하다. 거기서 사람들은 소마(soma)라는 약을 먹고 행복감을 느끼는데, 정부는 국민을 훨씬 쉽게 다룰 수 있다. 소마가 사람들을 통제해주기 때문에 경찰은 강압적인 수단을 쓸 필요가 없다.

『아우구스티누스 행복론』 │아우스티누스 저│박주형 역│누멘

‘실패한 행복 찾기’
아우구스티누스는 서양의 두 주류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통합한 기독교 최고의 학자이다. 하버드대 철학 교수인 화이트헤드(Whitedhead)는 “현대의 모든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고, 현대의 모든 신학은 어거스틴의 주석”이라고 할 정도로 그는 탁월한 신학자이다. 그는 33년간의 방황을 마치고 행복학을 정립한 행복학자이다. 그때 쓴 책이 『행복학(De Beata Vita)』이다. 그는 행복을 찾기 위해서 17세에 가출을 하고 이름도 모르는 한 젊은 여성과 동거하여 육체적 쾌락에 탐닉한다. 그는 육체적 탐닉을 통한 ‘행복 찾기’는 처절하게 실패한다.
그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는다. 내용은 철학을 권장하는 책이었는데 그는 이 책을 읽고 철학을 통한 행복에 몰입한다. 그러나 철학지식은 행복의 그림자를 보여주며 행복을 더 갈망하게 하지만 결국 행복으로 안내하지 못했다. 그다음 여정은 신앙적 방황이다. 그는 마니교의 이신론에 빠진다. 그런데 자신이 씨름했던 악과 고통, 과학과 합리성에 관한 정답을 줄줄 믿고 전심으로 추종했던 마니교를 떠난다. 그의 젊은 날 ‘행복 찾기’ 실패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었다. 하나님 밖에서의 행복 찾기는 그를 방황과 좌절로 이끌고 인생을 탕진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실패가 그를 절박하게 했고 하나님 안에서의 참 행복을 찾게 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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