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섞여서는 안 될 순전한 영역, 교회

교회공동체에 쓴 뿌리가 섞이면 단물을 내던 성도들의 삶이 쓴 물을 낸다. 선과 악이 섞이면 선악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에덴의 타락은 그 시초가 하나님의 엄정하신 말씀에 사탄의 말을 섞음에서 발단되었다. 롯이 아브라함을 제치고 선취권으로 차지한 소돔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다.” 떠나지 않고 머물러야 할 여호와의 동산과 하나님의 백성이면 출애굽해서라도 기필코 떠나야 할 애굽 땅은 섞여서는 안 된다. 섞인 땅 소돔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귀신 들림은 인간의 영혼이 악령과 섞였음을 뜻한다. 군대 귀신 들린 자에게는 군단 급의 귀신들이 인간영혼에 뒤섞여 공존함으로 자기분열을 일으켰다. 다수가 하나, 파괴의 집단과 연약한 한 영혼이 뒤섞여 괴이한 존재가 출현했다. 종(種)은 종(種)대로 류(類)는 류(類)대로 궤를 같이 해야 옳다. 그것이 창조의 질서다. 천사는 천사끼리 어울려야 하고 인간은 인간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천사들에게 천사 이상의 무엇이 섞이자 마귀가 되었고, 인간에게 인간 이상의 무엇이 섞이자 타락했다. 사탄의 그림자인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섞인 결과물이었다. 반신반인(半神半人)이나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신화는 그런 변종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교회 안에 뿌려진 이질적(異質的) 쓴 뿌리

초대교회처럼 한국교회의 출발은 순수와 열정과 헌신으로 표방되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를 놀랍도록 축복하셨다. 지금도 세계교회에 경이적인 부흥의 역사적 사례로 언급됨은 초창기 한국교회를 이루고 지켰던 선배들의 후광임을 부인할 수 없다. 어느 때부터인지 한국교회는 이질적인 요소들에 뒤섞이기 시작했다. 변질된 신학이 신앙의 변절을 가져왔으며 권력을 탐하는 무리들로 인해 거룩한 공동체는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쓴 뿌리가 교회의 저변으로까지 확산되었다.

교회가 원형을 잃어버리면 이상한 몰골로 변형됨은 시간문제다. 교회의 타락이라, 부패라 칭해지는 지난 역사는 변형된 교회가 얼마나 천상 교회의 이미지를 왜곡시키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더럽혔는지를 보여준다. 가톨릭 공동체는 교회의 원 뿌리를 형성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타락의 길잡이 역할을 자처했다. 이스라엘의 타락 때문에 이방인 구원의 길이 트이듯 가톨릭의 변질은 신교의 태동에 모판 노릇을 했으니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실로 오묘하다.

기독교의 현대적 괴물, 교회교(敎會敎-Churchianity)

변형된 기독교의 현대적 괴물 중의 하나가 바로 교회교(Churchianity)다.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훈에 초점을 맞춘 기독교(Christianity)와 달리 교회 출석, 설교 경청처럼 교회 생활의 습관에 강조점을 둔 교회교는 구속사에서도 추종자들의 기호에 맞게 각색함으로 구원의 의미에서 알맹이를 제거하여 인간 중심의 복음에 치중한다. 한 마디로 성경에 근거한 신앙과 실천의 원리인 교리를 거부하며 성경을 전체적인 맥락이 아닌 단편적으로 해석하기를 즐긴다. 입술로만 주님을 존경하여 주님에게서 비판받았던 바리새파 유형으로서 기성 신자들을 몰아붙이며 스스로 만족하는 ‘이름뿐인 신자’(nominal Christian)를 만들어낸다.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라 교회 왕국을 세우려는 이런 운동은 기독교의 원형질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세상의 주-받음과 은혜공동체의 주(主) 받음

장 바니에 신부의 라르슈(L'Arche) 공동체는 정신장애 지체자들을 위한 공동체다, 인간 개체를 서로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하면서 신뢰와 애정으로 연결될 때 그 순간을 은혜의 순간으로 정의했음은 백 번 옳다. 섬김이란 자기희생이 바탕이다. 자기희생은 자신의 존재를 깡그리 뭉개면서까지 상대를 위해 내어주는 행위다. 세상의 주 받음과는 달리 은혜공동체의 주 받음은 서로 내어줌을 받고 다시 내어줌이다. 일방적이지 않고 모두가 그러하다.

헨리 나우웬이 예일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 생활을 버리고 만년을 라르슈 공동체에서 그들을 “위해” 살지 않고 그들과 “함께” 살 수 있었음도 자신에게 영성의 뿌리가 된 존재의 건넴을 통한 섬김이 실행되었기 때문이다. 이 살벌한 세상의 길목에서 한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살아감은 사막을 적시는 빗줄기처럼 신선한 생명이다. 허지만 “위함”의 고귀한 삶도 “함께”의 더불어 삶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어쩌면 “위함”이야말로 인간을 “함께” 살아감을 위한 공동체적 이상에 최대의 걸림돌일 수 있다. “위함”마저 버려야 “함께”의 서로 녹아드는 삶에 진입할 수 있다.

로제 수사에 의해 창시된 떼제(Taizé) 공동체는 그리스도인들 간의 분열을 치유하고 성경적 회해를 도모할 목적으로 세워져 박해받는 유대인들, 패자가 된 독일군 포로들 할 것 없이 가난하고 소외당한 계층의 보호자가 되었다. 일체의 기부를 거부하고 노동으로 생활하며 기도와 묵상에 매진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접촉되지 않으면 일상화할 수 없는 삶이다. 이런 공동체는 소망이다.

한 지붕 네 가족의 은혜공동체의 아름다운 연합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 삼는 사역”을 위해 미국 동부의 네 교회가 연합한 은혜공동체가 2012년 11월 18일 창립했다. 은혜공동체의 네 목사는 모두 신학교 동문으로서 새창조교회, 새언약교회, 새빛교회, 버지니아베델교회가 개교회의 조직과 행정을 유지하며 함께 연합사역을 추구한다. 연합예배는 역동적일 수밖에 없고 상부상조를 통해 재정을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고 교역자들의 사역을 전문화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윈윈이다. 전도서의 “삼겹줄”에서 영감을 얻어 시작되었으니 이 은혜공동체는 사겹줄인 셈이다.

그들이 내건 은혜공동체의 4대 비전은 건강한 개인과 건강한 가정을 꿈꾸는 예배공동체, 가르침으로 온전케 하는 훈련공동체, 흩어져 섬기며 전도하는 선교공동체,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비전공동체로서 여느 교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동안 이민교회에서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성공한 사례는 없다. 그러기에 새로운 시도를 한 이 공동체가 건강한 교회로 서 가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한 지붕 네 가족 같은 분위기이기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장단점이 드러날 것이다. 이를 잘 극복하며 공동의 노력을 성실하게 기울이면 유쾌한 소식을 들을 날도 멀지 않았다.

전투공동체 교회의 국지전(局地戰)과 최후 승리

교회는 전투공동체다. 영적 실존으로서 교회는 영적 전투의 현장에 있다. 창세 이후부터 시작된 영적 전쟁은 하나님의 백성과 사탄의 졸개들 간에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지속되어왔다. 엄밀한 의미에서 전쟁은 끝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사탄과의 전면전에서 완승을 거둔 획기적 사건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국지적인 도발은 계속된다. 사탄은 패배를 인정했지만 속성상 분쟁을 끊임없이 야기 시킨다. 항복 문서에 서명했지만 정전 협정을 위반하며 교회를 수시로 괴롭힌다.

승리하신 주님은 자신이 통치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르기 전까지 옛 전쟁터에서 패잔병들을 축출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백성을 다시 한 번 메시아왕국의 주민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추려내신다. 사탄은 이 목적을 위해 저주의 도구로 사용된다. 쭉정이에 해당하는 신자들은 사탄의 획책에 휘말려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 그와 함께 불못에 던져진다. 알곡만이 시련의 불구덩이를 지나 불못의 재앙을 벗어난다. 마지막 영적 추수기에 주님은 자신의 종들을 보내어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모두 이끌어내신다. 영적 전쟁의 종결을 짓기 위한 주님의 재림은 교회의 오래된 숙원이다. 우리의 끝나지 않은 싸움은 곧 끝난다.

복음 자체가 능력이 되는 강소(强小)교회

마이클 프로스트는 <새로운 교회가 온다>에서 ”기독교왕국(christendom)으로서의 교회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권력의 중추로서 교회시대가 종언을 고했다면 영적으로 교회는 이미 사멸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교회가 나타나야 한다. 그것은 다가오는 새 교회이면서 교회가 출발했던 원래의 교회다. 가정교회, 작지만 강한 교회가 그 실상이다. 대형교회가 대세인 현장에서 작은 교회를 추구하고 부르짖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도 옳은 방식이라면 시도해야 한다.

다양한 모임에서 설교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된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내용적으로 얼마나 차지하고 있을까? 자신의 논리나 주장이나 변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분문 정도로 채택하거나 단지 인용하고 언급함에 그치지 않는가? 말씀이신 하나님이 그렇게 오용되고 남용되고 악용되는 강단 현실에 수치감과 모멸감을 느낀다면 어찌할 것인가? 말씀의 대언자들을 향해 불방망이를 들고 막 내리칠 자세를 취하신 그분의 엄장한 모습을 한 번이라도 상상한 적이 있는가? 한편 죄송하면서 두렵기 짝이 없다. “그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 되게 하지 않으면 모든 그럴싸하게 포장된 그 화려한 말씀들은 단지 허섭스레기에 다름 아니다.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아무 일도 이룰 수 없다. 작은 교회가 실패를 방지하려면 복음 자체가 능력이 되도록 철저한 기본기부터 다져야 한다. 교회가 적대적인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은 다른 요소가 아니라 복음을 삶으로 구현한 사실에 있었다. 안디옥교회의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칭함 받은 것은 조소나 멸시의 뜻이 아니라 칭송과 호감의 의미가 더 강했다. 그들은 기도와 말씀에 철저했으며 자신들이 믿고 전하는 바를 삶으로 실천했다. 작고 강한 교회는 인간적 측면에서는 작아도 영적 측면에서는 강한 교회다. 자신을 버리고 크신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으면 작아도 이긴다.

순수기독교-원시기독교는 신화로만 남는가?

순전한 기독교가 사라졌다. 예전에는 십자가와 부활이면 족했다. 사랑과 용서면 해결 못할 문제가 없었다. 주님의 이름 하나면 부러울 것이 없었다. 이제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교리란 이름으로 많은 것들을 덧붙인다. 사랑과 용서도 문제해결에 거침돌이 되었다. 사랑도 사랑 나름이고 용서도 용서 나름이다. 기준이 복잡해지고 적용이 까다롭게 되었다. 사랑을 하지만 사랑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용서를 하지만 용서가 실제로 느껴지지 않는다. 순수기독교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도행전에 묘사된 원시공동체의 삶은 신화의 한 토막으로 전해질뿐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교회는 변화무쌍한 세상에 자신을 맞추려다 적절한 변화를 지나쳐 변질의 수렁에 빠져버렸다. 변질은 맛사탕처럼 영적 미각을 바꿔버린다. 인간의 본성은 볼썽사납게 되고 영혼을 마비시키는 것들이 구미를 당긴다. 변질에 익숙한 사람들은 원색적인 복음을 새로운 율법주의라 정죄한다. 거룩한 원칙을 근본주의라 매도하며 복음에 뭔가를 적당히 뒤섞는다. 섞이지 않은 복음은 구태의연하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겨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아, 복음이 활기찼던 그 옛날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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