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욱 목사의 인문학 산책 (8)

이상욱 목사│목민교회(인천) 담임, 호서대학교( Ph.D),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과유불급(過猶不及)’과 ‘道(올바름)’는 모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상태 즉, ‘중용(中庸)’을 뜻한다. 중용은 군자의 도리로서 극한으로 치닫지 않는 삶의 태도를 가리킨다. 공자는 때와 처지를 가려 가장 적절한 행위를 선택하는 것을 중용의 구체적 실천으로 예시한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사는 것은 정성을 요(要) 하는 일이고, 삶에 대한 진지하고 적극적인 성찰에 기반을 둔다. 이는 감각의 과부하와 과도한 경쟁에 던져진 현대인이 실천하기 매우 어려운 삶의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삶이 극단으로 치우칠 때 우리에게 닥칠 많은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중용’의 미덕은 과거의 화석으로 묻혀서는 안 될 중요한 가치임을 상기하게 된다.

 

성욕. 식욕, 그리고 지식욕의 선용(善用)과 오용(誤用)
사람이 타고난 욕구를 적절히 통제하고 다스리지 못하게 되면 그 욕구가 욕망이 되어 오히려 사람을 망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식욕도 마찬가지다. 건강을 위해 식욕도 적절히 통제하지 않고 관리하지 않으면 오히려 건강을 해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여기에는 배움의 욕구인 지성의 욕구도 마찬가지다. 잘 수양하지 않으면, 이 지적 욕구는 교만함으로 우리를 사망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나 그리고 파우스트처럼 그 매력적인 유혹에 자신의 영혼을 마귀에게 팔아 버릴 수 있다. 성욕이나 식욕, 지식 욕구는 조물주가 인간에 허락한 생존의 욕구요 축복이다. 조물주께 받은 이러한 욕구와 능력을 오용할 때에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있다.

 십자가의 길(道)도 그 길 끝에 부활의 영광이 있듯이, 배움에도 길이 있고 그 끝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목표를 잃어버리고, 그 길을 따라가지 않는 사람은 성급함으로 인해서 길에서 이탈하기 쉽다. 이런 사람은 마침내 길(道)을 잃게 되어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위험에 처할 때가 많다. 배움도 길이 있고 지혜가 있다. 길에서 이탈하는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노여워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범부(凡夫)는 배우는 시간을 조급함으로 메우고 남을 탓하기 좋아한다. 배우기보다는 남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배우는 기쁨을 모두 깨닫기도 전에 가르치는 기쁨에 이르고자 한다. 깨달은 것도 별로 없이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린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깨달은 바를 남들이 알아주지 못한다고 여길 때, 분개하고 화를 잘 내는 특성이 있다.

학문은 길을 닦는 것
대부분 남이 알아주지 않는 진짜 이유는 자신에게 깨달음이 진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때가 많다. 보통 그 깨달음이 보편성이라는 진리의 속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깨달음은 나에게만 적용되는 방법이거나 다른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마치 자신만이 깨달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나간 흔적과 경험에 불과한 것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내가 찾았거나 내가 만든 길이 누구나 가야 할 길이라면 그 길을 가는 많은 사람이 오가는 흔적으로 저절로 길이 된다. 그것으로 길(道)이 된다. 진정 내가 깨달은 바가 지혜이고 진리를 담고 있다면 말이다. 그 깨달음은 분명히 나와 같은 생각과 고민과 문제를 가진 사람에게는 정말 유익함이 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저절로 퍼져 나가게 된다. 그래서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화를 낼 필요가 없다. 나의 길을 모르는 이들은 그저 나와 다른 길을 가는 것뿐이다. 이미 백범 김구 선생은 서산대사(西山大師,1520-1604)의 서시(序詩)에서 먼저 길을 가는 사람들의 책임에 대해서 말했다. 이 서시는 학문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지혜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란행(不須湖亂行)
금일아행적(今日俄行跡)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발걸음을 흩뜨리지 말아라.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이 뒷사람의 길잡이가 되리니

학문도 길을 닦는 것과 같다. 닦는 행위는 반복적인 행위이다. 한 번으로 깨끗하게 닦이는 것은 드물다. 여러 번 닦는 행위를 반복해야만 제대로 닦을 수 있다. 깨끗하게 하거나 빛나게 하려면 결국 반복이 필요하다. 이것은 동양에서는 "연습"이라고 했다. 어린 새가 날갯짓을 반복하면 곧 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일단 날게 되더라도 날갯짓을 계속하지 않으면 결국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학문은 길은 험하다. 계속 닦아야하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기뻐하고 만족함이 끝이 아니다. 닦은 그 길을 통해 많은 사람을 인도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학문의 한계도 인식해야 한다. 신앙은 학문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과 관계가 없다. 믿음은 오히려 학문적 인식을 설명하고 이것을 더 큰 틀 안으로 안내한다. 창조를 설명하는 일과 삶을 개선하는 연구는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학문적 인식은 우리의 삶을 설명하지 못한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끊임없이 던진 마지막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학문은 이런 질문에 절대로 대답할 수 없다. 학문은 인간의 뇌, 인간의 정신이 작동하는 방식을 조금 밝힐 뿐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지혜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다. '주머니 속에 송곳'이라는 뜻으로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인재, 혹은 진실은 어디에 있든지 사람들에게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말이다. 송곳은 주머니 속에 감추어 있을지라도 그것을 뚫고 나오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이 그랬다. 그가 깨달은 진리를 외치자 그곳이 비록 광야였음에도 많은 이들이 그의 가르침을 듣고자 광야로 몰려왔다. 세례 요한의 소리는 길 없는 광야에서 방황하는 무리에게 예수께 나가는 길이 되었다. 낭중지추의 지혜는 잠언 기자도 말했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明哲)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잠 8:1). 지혜는 사람을 불러 모은다. 지혜는 곧 길이기 때문이다. 그 길을 통해 사람들이 저절로 오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논어 학이편(學而篇)에서 말하는 군자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다. 진정한 기독교의 길(道)을 가는 성도는 자신이 지닌 믿음과 선행을 남들이 몰라줘도 노여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믿음의 길에 정진하는 자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지혜의 길에 대해서 이미 언급하셨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의 선을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는 이라"(마태복음 6:1).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영적인 원리가 담겨 있다. 영적인 것은 자신이 그것을 드러내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것이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드러내는 순간 사라진다. 선행을 스스로 자랑하면 하나님의 상(償)이 사라지고, 죄는 고백함으로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파워가 상실한다. 이 논리는 역으로도 똑같이 성립한다. 선행도 악행도 감추고 숨기면 그 뿌리가 깊어져서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도는 이 영적인 원리를 삶에 지혜롭게 적용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배움에도 이 진리가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것은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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