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 §.9는 “삼중일신”(Gottes Dreieinigkeit)이다. 바르트는 기존에 믿음의 대상성에서 하나님의 주권개념(Herrschaft)으로, 인격 개념에서 존재양식(Seinsweise)로 전환했다. 그리고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다메섹의 요한(Perichoresis), 루터 등을 제시하면서 삼중일신(Gottes Dreieinigkeit) 개념을 확립했다. 그리고 § 9.4에서 삼위일체론의 의미(Der Sinn der Trinitätslehre)를 제시한다(KD I/1., 395, GG 485, CD, 375). 삼위일체론의 의미는 “우리는 삼위일체론 아래서 아버지, 아들, 성령의 세 존재양식들 안에서의 하나님의 유일성에 관한 혹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존재양식들 안에서의 한 분 하나님의 세 번 다르게 있음에 관한 교회 교의를 이해한다”(박순경 역)고 제시했다. “세 번 다름(dreimaligen Anderssein)”의 표현은 양태론(樣態論, modalism)으로 이해하기 쉬운 제시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르트의 신관을 양태론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모양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역(英譯)에서 존재양식(Seinsweise)을 modes of being으로 번역하여, modalism과 mode가 유사해서 더욱 오해할 수 있다. 우리는 modalism을 양태론으로 많이 사용하지만 양식론(樣式論)로 번역하기도 한다. 바르트에게 존재양식은 영원 반복 개념(repetitio aeternitatis in aeternitatie, KD I/1., 386, GG 474, CD, 366)으로 시간에서 변화하는 양태가 아니다. 양태론은 시간에서 변화되는 경세론적 개념이다. 바르트에게 성금요일, 부활절, 오순절 등은 시간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영원의 반복이다. 영원이 시간에 침투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참고 바르트는 Dogma와 Doctrine를 구분한다. Lehre를 영역에서 Doctrine으로 번역했다. Dogma는 Dogma로 번역했다. 박순경은 두 어휘를 구분하지 않고 번역했다고 제시했다(GG, 485). 그러나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Dogma는 불변적 진리 체계이고, Doctrine은 탐구와 토론이 가능한 진리이다. 장로교는 이중예정교리를 진리체계로 받지만, 모든 개신교가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바르트는 자기 세계인 Theologumenon을 선언하며 Dogma를 확정했다(KD I/1., 396). 바르트의 Theologumenon(신학선언)는 삼중일신Gottes Dreieinigkeit) 개념이다. 그것을 Dogma라고 선언한 것이다.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I/1, §.8에서 삼위일체론의 뿌리, 흔적 등에서 제시한 것이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을 성경적인 뿌리로 규정하지만, 이전 시기의 신학선언으로 규정했다(KD I/1., 396, GG 496). 그리고 옛 교회가 규정했던 “이단 혹은 생소한 종교(fremde Religion)”에 대한 평가를 다시 질문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바르트는 정통 신학과 개혁신학을 부정하고 자기 계보를 확립했다. “이 계보의 선상에서 4세기의 커다란 결정투쟁들 이래 모든 중요하게 된 교회신학자들이, 종교개혁자들과 17세기의 그 후계자들을 포함해서 확고하게 진행해온 그러한 교리사적인 계보가 문제될 때에 최고로 책임질 일이다”(KD I/1., 397, GG 497, CD 377) 바르트는 자기 신학 계보에 이단과 생소한 종교도 포용하기 위해서, 4세기 정통신학과 16-17세기 종교개혁신학을 제거시켰다. 칼 바르트가 주장하는 예수는 1-30년까지의 예수이고, 4세기의 아리우스를 재평가하며, 16-17세기 종교개혁 신학을 재평가하는 신학 구도이다. 그러나 우리의 예수는 1-33년까지 예수이고, 4세기 아리우스는 이단이며, 16-17세기 칼빈과 루터의 신학은 바른 신학을 회복한 개혁신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바르트는 4세기에 교회가 규정한 이단으로 규정한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제시했다(scheinen uns nicht zwingend, KD I/1., 398, GG 489, CD 378). 바르트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그 교회가 타락한 교회였다고 주장했다. 타락한 교회의 결정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믿음의 결단으로 신적 진리를 세울 것인지를 질문했다.

바르트는 계시에 대해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이다”(Gott der ist, der sich offenbart/ God is the One who reveals Himself, KD I/1., 400, GG 490, CD 380)이라고 규정했다. 바르트가 하는 삼위일체의 질문(Frage)에 대한 정확한 답(Folgerichtigkeit)이다. 즉 바르트가 삼위일체를 검토한 결과이다. 삼위일체론은 질문한 적이 없고 교회가 고백하도록 한 믿음 문장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삼위일체를 비판적으로 성찰(Dogmatik als kritishce Besinnung)했다(KD I/1., 404, GG 494, CD 383). 다만 바르트는 자기 결정을 Theologumenon(신학선언)라고 하여, 결코 수정될 수 없는 명제로 확언하고 있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바르트의 의견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바르트를 인정하고 바르트의 그늘에 있던지, 거부하고 정통신앙을 믿고 계승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을 계시자라고(Gott der Offenbarer ist) 규정했다(KD I/1., 400, GG 491, CD 380). 바르트의 문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계시자 하나님”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계시 주체라고 규정하고, 계시의 삼중성으로 연결시켰다. 한 계시의 삼중성은 자연스럽게 동일한 본질을 갖게 될 것이다. 종속론이나 양태론의 폐단에 빠지지도 않는다. 바르트는 아리우스가 종속론을 거부하려는 시도였다고 긍적적으로 평가했다. 교회가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 것과 병치(倂置)시켰다. 바르트가 아리우스를 이단 족쇄에서 명시적으로 풀지 않았지만, 이단에 대해 재검토를 완료했다. 아리우스는 이단이 아닌 종속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 위인이다. 그리고 정통신학의 내용을 수정했다. 그렇다면 아리우스에 대한 판단은 어떠하겠는가? 현재 그리스도인은 바르트가 정통신학을 재검토하여 해체한 신정통주의를 따를 것인가? 정통신학을 유지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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