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왕족은 무식했다, (2)안마 한 번 잘못해 죽은 궁녀

【엽기왕조실록】(3) 왕들의 성교육


조선시대 청소년들의 성교육은 어떠했을까? 결혼전에 당숙뻘되는 어른들이 하는 ‘사랑방 교육’도 있을 것이고, 서당에서 ‘정규과목’으로 실시하는 ‘보정’이라는 것도 있을터인데, 조선시대 절대권력자인 왕들도 이런 교육을 받았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받았다. 그것도 맨투맨으로 철저히 말이다.

“그래, 세자! 나이 이제 10살이 되었으니 참한 규수를 찾아 가례를 올려야 되지 않겠소?”

“예, 전하 국본(國本: 나라의 근본, 세자를 지칭한다)을 바로 세우려면 일가를 이루어야 겠지요.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처녀단자(처녀를 둔 사대부가에서 조정에 보고하는 보고서. 이 안에는 처녀의 거주지와 사주, 부, 조, 증조부, 외조의 기록이 들어있다.)를 올리라 명하라.”

이렇게 해서 세자빈이 간택되면 가례를 올리게 된다. 자, 문제는 이제부터이다. 

10살 내외의 세자와 세자빈이 뭘 알겠는가? 그저 시키면 시키는대로 절하고 합환주 마시고, 맹숭맹숭 쳐다볼 뿐. 해서 이때는 합방을 하지 않는다. 10살짜리 꼬마들한테 너무 많은걸 바라지 말자.  그럼 이들은 언제 ‘첫경험’을 하게 될까? 

보통 15세 되는 해 길일을 택해 합방을 하게 되는데, 이는 경국대전에 남자의 혼인 연령이 15세로 규정된 것에 착안한 것이다. 문제는 이때부터다.

“지금부터 세자저하 내외분의 합방을 위한 대책회의에 들어가겠습니다. 합방날짜는 돌아오는 3월 초 아흐레로 하며, 거사장소는 동궁전으로 하겠습니다. 동궁 상궁 앞으로!”

“상궁 앞으로!”

“세자 저하의 섹스에 대한 개념은 어느정도인가?”

“네! 아침마다 불끈불끈 솟아오르심이 가히 15세 장부다우나 아직 용두질(자위)에 대한 개념은 없으신 듯 합니다.

세자저하의 서가에 신윤복의 춘화첩(春畵帖: 빨간책)이 몇권 발견 된 것으로 보아 섹스가 뭐고, 어디에 넣어야 할지 대충 짐작은 하신듯 합니다!”

“좋다. 자네가 책임지고 합방전까지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 물건이며, 사용방법과 순서를 정확히 숙지시켜드리도록!”

“네 알겠습니다!”

“빈궁전 상궁 앞으로!”

“빈궁전 상궁 앞으로!”

“빈궁마마는 섹스에 대한 이해도가 어느정도인가?”

“전무하십니다! 합방 때 정신적 충격을 받을 것이 염려될 정도입니다!”

“뒤로 호박씨 까는 건 아닌가?”

“아직도 남녀가 같은 방에서 자기만 하면 애가 들어서는지 아십니다!”

“음… 힘들겠군. 일단 조교는 빈궁마마 사가에서 따라온 유모를 메인으로 하고, 보조로 같이 따라온 몸종을 교보재로 사용한다. 합방 때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는 몰지각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기초부터 차근차근 교육시키도록!

지금 우리의 노력여하에 조선의 미래가 걸려있다! 제군들 최선을 다하도록!”

“충성!”

세자와 세자빈의 합방 전에 궁궐은 비상체제(?)로 돌입하게 된다. 당장 첫날밤을 치루긴 치러야 하는데, 두 젊은 부부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 상황이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해서 세자한테는 궁녀가, 세자빈한테는 정신적 충격(?)을 감안해 사가에서 데려온 유모나 몸종에게 성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빈궁마마! 이 그림이 요즘 신윤복이란 환쟁이가 그린 춘화첩인데….”

“에그머니 망측하여라! 이리 망측한 물건을 어찌 내앞에 내미는 것이냐!”

“마마! 이 망측한 짓을 하여야만 세손을 낳으시고, 나라의 안정을 도모할수 있습니다.”

“세손을 낳는다고? 손만 잡고 자면 낳는게 아니더냐?”

“…마마, 지금 주변엔 아무도 없사옵니다.”

“…치워라! 신윤복건 영 성에 차지 않아서. 단원 김홍도의 사계춘화첩 정도는 되야 어디가서 빨간책 좀 봤다고 말하지. 묘사를 하려면 좀 제대로 할 것이지, 쯧쯧. 그리고 거시기를 그려도 꼭 조막만하게 이게 뭐니?”

“다…단원걸 보셨습니까?”

“요즘은 정제 최우석의 작품을 보고 있느니라.”

“그럼 제가 교육을 안해도 될런지요?”

“중궁전 상궁이 묻거든 망측하고 민망하여 어쩔줄 몰라한다 전해라. 내말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

합방 전 세자궁의 궁녀와 세자빈 몸종의 교육덕에 어린세자 부부는 무사히 부부의 행위에 대해 깨우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궁녀와 몸종의 성교육은 조선왕조 개국이례로 왕실의 전통으로 면면히 흘러내려 왔다고 전해졌던 것이다.

왕도 성교육을 받고 섹스를 했는데, 하물며 일개 민초에 지나지 않은 지금의 우리도 성교육 정도는 받고 섹스를 해야 하지 않을까?

 

【엽기왕조실록】(2) 안마 한 번 잘못해 죽은 궁녀

세종때의 일인데, 태종이 일찌감치 세종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앉았을 때의 일이다. 태종이 데리고 있는 나인들 중에 ‘장미’라는 나인이 한 명 있었는데, 이 아가씨가 이번에 왕 구타 사건의 주범이었던 것이다. 

때는 세종 2년의 어느날 삼경(밤 11시~1시)이 될 때까지 잠을 못이루는 태종이 조용히 장미를 부른다.

“어이구 삭신이야…. 젊었을 때 사람을 좀 많이 때려잡았더니 늙어 고생이네. 장미야! 와서 내 무릎좀 주물러라. 꾹꾹 잘 주물러라!”

장미가 열심히 태종의 무릎을 주무르는데, 태종 마음엔 안들었나 보다.

“야 이 자식아! 지금 무릎을 주무르라고 했지, 간질이라고 했냐? 그리고 너 이름이 그게 뭐냐? 장미? 요즘 장미는 품종개량해서 호박이랑  교배했냐? 아니면 나 모르는 사이에 사전이 바뀌어서 앞으로 호박꽃을 장미꽃이라 부르기로 했냐? 야! 너 장미꽃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태종이 장미를 한 바탕 닦아세우게 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태종에게 한 소리 들은 장미는 복수를 다짐하게 된다. 태종이 다시 잠이 들자 장미는 그대로 태종을 두들겨 패기 시작한다. 안마를 빙자한 폭행에 태종이 놀라 잠이 깬다.

“이게 생기다 만 계집이… 이걸 아유… 확 그냥!!”

태종도 황당했을 것이다. 감히 왕의 아버지를, 지금도 왕보다 더한 실권을 지닌 자기를 두들겨 패다니... 그러나 궁궐법도가 아녀자에 관한 일은 아녀자들끼리 처리해야 하는 법. 결국 자기 와이프인 대비에게 장미의 신병을 이관하게 되는데,

“그래그래, 네 심정 다 안다. 태종 그게 어디 사람이더냐? 우리 친정을 봐라. 죽을둥 살둥 목숨걸고 왕 만들어 줬더니만 우리집안을 아예 절딴을 내버렸잖아.

에휴, 무질아, 무구야. 네 심정 내가 다 안다. 그래 패는 김에 좀 더 세게 패지 그랬냐? 다음 번엔… 알지?”

원경왕후가 누구던가? 태종이 사가에 있을 때 친정의 힘을 끌어와 태종이 왕이 되는 데 전심전력을 다했던 여장부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되자마자 외척을 척결해야 한다고 자기 친정을 도륙냈으니…. 그 한이 얼마나 깊었겠는가? 장미는 훈방조치를 받게되는데,

“이런 개나리 같은…. 어이 장미 너 무슨 생각으로 날 팼어? 이게 어디서 감히….”

“절 꾸짖는게 너무 과하다 생각해서요. 제가 잘못해서 혼나는건 이해하겠는데, 생긴거 가지고 이러시면 안되죠. 누군 뭐 이렇게 생기고 싶어 생긴지 아세요? 이건 명백한 성희롱입니다, 상왕 전하!!”

장미는 죽을 결심을 하였나 보다. 장미의 말을 듣고 태종은 분을 참지 못하고 곧바로 세종을 호출한다.

“주상! 내가 쪽팔려서 이런 말까진 안하려 했는데…. 장미 저것이 날 폭행하였다오. 이게 말이 되오? 아니 생기다 만 계집보고 생기다 말았다고 한게 왜 죄가 되냔 말이지.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요앞에 내 앞에 저 낯짝을 보면서 내가 뭐라고 말을 해야겠오? 

이 녀석을 내명부에 조치해 해결하라 하였건만, 그 마누라가 나한테 억한 심정이 있는 건지 장미 저 계집을 훈방조치 해버린 것이오. 이게 말이나 될법하오? 감히 상황인 날 패다니! 그것도 밤에 말이오. 이건 분명히 말하지만 역모이고 반역이오!! 당장 물에 쳐넣어 죽이던가 해야 할 일이오!”

태종은 적당히 내명부에서 장미를 처벌하는 것으로 끝을 내려 했으나 이게 안되자 결국 칼을 빼든 것이다. 그렇다고 자기가 때려서 죽이라고 하긴 뭣하기에  반역죄로 몰아가 죽이는 걸로 낙찰을 본 것이다. 태종의 말을 듣고 세종은 곧바로 사태를 정리한다.

“에또… 장미가 저지른 일은 반역죄로 다스릴 죄이오니 마땅히 삼정승을 불러 국문을 해야 하나 이런 일로 원로대신들을 오라가라 할 수 없는 법이니 대충 이정도 선에서 장미를 죽이고 끝을 내겠습니다.”

결국 장미는 여기까지 역사의 기록을 남기고 실록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세종 2년 10월 11일의 일이었다. 안마 한 번 잘못했다가 반역죄로 몰려 그 생을 접어야 했던 장미. 조선조 역사상 최고로 간 큰 궁녀가 아니었을까?

【엽기왕조실록】 왕족은 무식했다(1)

조선시대 왕족들의 교양은 어느 정도 였을까? 그래도 나라를 이끄는 왕의 친척들이니 나름대로 교양이 풍부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을 해보게 되는데, 실상은 어떠했을까? 

조선시대 왕족들. 그들은 한 마디로 개망나니 였으니….

“아싸!! 2차는 압구정 기방으로 뜨자고~. 이번에 한성 제일루가 확 물갈이 됐다니까!”

“아이, 형님 한성 제일루 그쪽 애들 보도방 애들 데려다 쓴다던데요?”

“어허, 이 형님을 믿으라니까. 이번에 평양에서 데려온 따끈따끈한 영계들로 쏵 물갈이 해왔다니까.”

종친들은 눈만 뜨면 계집질에 술판이니 왕족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그렇게만 놀았으면 상관없지만 종친들끼리 기생 한 명을 놓고 서로 치고받고 싸우며 말들이 아니었다. 이 꼴을 보다 못한 세종대왕은 고심끝에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이거 참… 쪽팔리게. 그래도 왕족 체면이 있지 왜들 그러는지….”

“전하, 종친들이 이런 비행을 저지르는 것은 다 연유가 있어서….”

“이유있는 반항이라고?”

“예, 솔직히 말해서 왕족이란게, 그게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라서… 그게 애매하잖습니까? 법으로 왕족이 공무원이 되는 걸 막아 놓은데다가, 죽을 때까지 정치엔 등돌리고 지내야 하는데…. 시간은 많지, 돈도 많지, 정치는 하지 말라지, 그러니 술마시고 사고치는 일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럼 어쩌란 말이오?”

“전하! 혹시 녹화사업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녹화사업? 어디 조경공사 나가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데모나 하는 것들을 모아 군대를 보내 사람만들자는 사업이었지요.”

“허면 종친들을 군대로?”

“아니지요. 어차피 사고칠 종친들이라면, 한꺼번에 모아 학교로 보내버리자는 것이지요.”

“배워도 쓸모가 없다며 공부를 내팽개친 종친들인데, 어디 배우려 하겠소?”

“전하, 녹화사업은 어디 나라 지키라고 보낸 사업이었겠습니까?”

그랬다. 세종대왕은 술퍼마시고 사고만 치는 종친들을 학교에 집어넣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종학(宗學)’이었던 것이다.

“배워서 뭐하냐? 남들은 과거도 보고 출세도 하지만 우린 배워서 어따 써먹으란 거냐!!”

“우리 그냥 술마시게 해주세요, 네!!”

“세종 형~, 그러시면 안되죠. 형이 공부 좋아한다고 남들도 다 공부 좋아하는 줄 알면 곤란하지. 형도 우리입장 돼봐요, 공부하고 싶겠나...”

종친들의 반발은 장난이 아니었으나 어쩌겠는가? 절대권력자인 ‘왕’이 내린 명령인 것을, 문제는 세종대왕이 진짜 독한 마음을 먹고 종친들에게 ‘공부’를 시키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이름 석자도 쓰지 못하는 종친들이 나올 정도였으니 현학군주 세종의 입장으로선 신하들 보기에 체면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해서 종학에 투입된 교수진들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을 내려보내게 된 것이다. 바로 성균관의 실력자들이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오르면
못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자~ 종친여러분! 여러분도 열심히 공부하시면 언젠가 저처럼 똑똑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아셨죠?”

“우~우~ 물러거라!!”

“재섭써!!”

공부가 될 턱이 없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려면 확실한 동기부여가 있어야 하는데, 종친들에게는 공부를 해봤자 자신들에게 현실적 이익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남들처럼 과거를 볼수 있는 것도 아니고, 출세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더 큰 문제는 이 종학에는 젊은 종친들만 오는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왕족이 어디 어린 사람들만 있었겠는가? 조카가 있다면 당숙도 있고, 삼촌도 있고, 큰할아버지도 있지 않겠는가? 젊은 왕족들이야 머리가 굳기 전이니 공부를 하다보면 눈이라도 트이겠지만, 나이든 왕족들은 어찌하란 말인가? 

이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정종의 둘째 아들인 순평군이었다. 당시 마흔을 넘긴 나이로 종학에 끌려온 순평군은 문맹(文盲)이었던 것이다.

“자 오늘부터 순평군께서 들어갈 진도는 효경(孝經)입니다. 13경에 들어가는 경전으로 유교의 입문서로 보셔도 좋겠습니다. 책을 보시면 알겠지만 별로 두껍지 않습니다. 자, 책 펴시고 진도 들어가겠습니다. 

첫장의 제목은 개종명의장(開宗名義章), 열 개자에 마루 종자….”

“저기, 선생… 교수, 아니 티쳐….”

“예, 순평군 나리.”

“저기…이런 말 하긴 좀 뭐한데 내가 좀 까막눈이라서…지금 그 첫장을 다 외우라는건….”

“하하, 첫장을 다 외우시라는게 아닙니다. 지금 효경의 첫장 제목 들어갔는데요. 걱정마시고 강의를 계속 들으시면….”

“아니 첫장 제목부터가 헷갈려서….”

“……”

“첫장 제목 다섯 글자를 다 기억하는건 내 기억용량을 초과하는 거거든? 그러니까 뒤에 3글자 빼고, 앞에 두글자 개종… 개종자 같은 놈이랑 비슷해서 외우기 쉬운데, 일단 저기 개종자… 아니 개종 두 글자만 외우면 안될까?”

“그… 그러시지요.”

결국 순평군은 이 개종(開宗) 두 글자만 죽어라 외우고, 이도 모잘라 자기 몸종에게까지 이걸 외우고 있게 했다. 만약 자기가 까먹으면 얼른 ‘개종’이라고 말해달라고 말이다. 

순평군의 예에서 보듯이 종학이란 게 학문을 닦는 것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오죽하면 순평군이 임종직전에 

“이제 그 지긋지긋한 종학을 안다녀도 되니 속이 다 시원하다.”

이랬을까? 예나 지금이나 하기 싫은 공부를 하는건 고역이었던가?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