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타락-추락-퇴락한 교회의 현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대형교회의 목회자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듯이 보인다. 그들은 신의 옷을 걸친 묘한 존재다. 목소리를 깔고 아합처럼 겸손한 행보를 보여도 마음이 이미 높은 곳을 거닐고 있으니 겸손할 수가 없다. 그들 곁에서 군침을 삼키며 아첨의 말을 쏟아내는 무리들을 보노라면 역겹다. 진실한 대형교회 목회자들도 물론 있다. 그러나 역시 대세는 나쁜 쪽이다. 교회와 목사들이 포장마차 안에서 안주거리로 씹히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곪을 대로 곪아서 결국 터져버렸다. 이제 목사 알기를 우습게 알뿐더러 교회 이야기만 나오면 사방으로 악취가 풍긴다.

도시나 농어촌 할 것 없이 교회가 들어서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교회가 민족의 가슴에 자리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교회가 스스로 자신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교회는 이제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며 비타협적인 집단으로 매도되어버렸다. 아무리 갱신을 부르짖고 개혁을 외치지만 진정성이 결여된 구호에 세상은 이미 지쳐버렸다. 사람들은 이제 교회의 약속을 믿지 않는다. 교회 없는 세상 낙원을 꿈꾸는 그들을 우리는 감히 나무랄 수 없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이다. 우리의 어긋난 언행들이다.

사울의 추격을 피해 도주하던 다윗이 아둘람 굴로 피신했을 때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다윗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삼상 22:1-2). 당연히 군림하는 우두머리가 아니라 섬기는 우두머리였음을 우리는 그의 행적을 보아 잘 안다. 한때 교회는 이 민족의 피난처 역할을 잘 감당했다. 방향 잃은 대중의 나침판이 되어주고 날강도 일제의 만행으로 떨며 신음하고 있을 때 교회의 품은 따스하고 안온했다. 지금보다 약하고 미세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도망자 신세의 다윗이 그를 찾는 이들의 우산이 되어 폭우를 피하게 했던 것처럼 민족의 도피성이었다.

개혁하지 않으면 공멸의 현실만 있어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갈아엎고 싶다. 할 수 없어도 주님께서 한 마디 언질만 주신다면 천지를 개벽시키고 싶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로 뒤집힌 세상을 살아가려면 물구나무를 서든지, 아니면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야 한다. 총칼의 혁명이 아니다. 말씀과 기도의 개혁이다. 말씀이 진정 성령의 검이라면, 기도가 정녕 성령의 불화살이라면 이만한 무기도 없다.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찌르고 그들을 상해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라 칭함 받는 우리, 주님의 종이라 일컬음 받는 우리 자신을 철저히 해부하고 갱신키 위함이다. 자멸의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공멸의 현실이 있을 뿐이다.

한 알의 밀을 찬양하면서 한 알의 밀 되기를 거절하고 풍성한 결실의 주인공이 되려는 이기심을 꺾어야 한다. 순교자의 노래를 힘차게 부르면서 순교의 피 한 방울 흘리기를 거절하는 모순의 껍질을 벗겨야 한다. 누가 누구를 나무랄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는 오십 보 백보다. 모두가 똑같다. 은혜에도 동등하듯 허물에도 동등하다. 율법을 완벽히 지키다가 하나만 범해도 하나만 지키고 모두를 범한 자와 같다. 범법의 정도는 달라도 그 질은 같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혼잡-혼돈-혼란-혼곤에 취한 시대

병균도 변종에 변종을 거듭한다. 변종 바이러스의 출현은 늘 의학계를 긴장시킨다. 이미 지구적 현안이 되어버린 환경오염은 변종의 온상이며, 유전공학은 인위적 변종을 통해 이상한 세계의 탄생을 가져올 수 있게끔 되었다. 광속을 넘나드는 기술혁신은 인간에게서 감성의 약화와 함께 화해의 공동체(코스모스)를 갈등의 혼돈체(카오스)로 변질시켰다. 사실보다 느낌, 의지보다 감각이 숭상되는 이 시대는 제도가 가치를 짓누르며 주인 행세를 한다. 계급 사회의 철폐는 위계질서의 붕괴라는 부작용을 낳았고 성장 제일주의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기괴함을 더했다.

지금은 환경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혼돈의 시대다. 혼잡한 영들이 온 세상을 유린하고 혼란한 주변 상황에 휘둘리면서 사람들은 혼곤한 잠에서 깨어나지를 못한다. 테러리즘은 단순한 과격운동이 아니라 반서구에 광신주의까지 곁들여 이 시대의 괴물로 등장했다. 냉전시대의 와해는 지구적 온난화와 맞물려 사람들의 의식까지 물러지게 만들었다. 사상은 있어도 로망은 사라졌고 불특정 다수를 향한 현대적 테러의 폭거에는 과거와 같은 인간주의와 차디찬 지성은 소멸되었다. 인간이 돌아갈 자연의 원점은 어디인가?

명품인생보다 진품인생으로 살아야

인간의 삶이 아름다운 건 획일적이지 않아서다. 75억 인구의 삶이 하나같이 다르다. 천변만화(千變萬化)에 이르는 다채로운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저마다의 삶이 비슷해도 다르다. 한 사람의 인생이 만인에게 감동을 일으키면 그 삶은 마치 걸작과 같다. 삶은 스케치가 아니다. 진지하든 그렇지 않든 살아가는 모습이 그대로 그려진다. 삶을 습작처럼 살 수 있다면 실제의 인생은 보다 나을 것인가? 자신의 삶에 만족치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인생을 졸작이라 평한다.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졸작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걸작이라 추켜세울 수도 없겠지만 졸작으로 폄하할 이유도 없다.

모든 삶의 그림에는 숱한 사연이 응축되어 있기에 가치가 있다. 삶은 걸작, 졸작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의 문제다. 명품인생이란 말을 들어보았는가? 잘못된 표현이다.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았다면 그 사람의 삶은 진품이다. 명품인생을 살려고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위작에 불과하다. 굳이 표현해야 한다면 명품인생보다 값진 것은 진품인생이다. 누구나 자신만이 이룰 고유한 삶의 가치를 안고 태어났다. 인생은 너무나 고귀해서 남을 모방해서 살 여유가 없다. 각자가 자신답게 살아가는 것이 창작의 삶이요 창조자의 뜻을 받듦이다.

지도자는 많지만 혼란한 역사와 교회의 아이러니

성경은 극도의 혼란기를 보여준다. 사사시대다. 그때는 지도자가 없어 사람마다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 지금은 지도자가 너무 많아서 혼란의 극을 달린다. 혼란기의 특징은 지도력의 부재에 있다. 지도자의 숫자에 반비례하여 지도력의 부재를 절감하니 이 어찌된 영문일까? 자칭 지도자는 많은데 대중이 따를 지도자가 없다. 도처에 깃대는 많이 꽂혀있는데 펄럭이는 깃발이 없다. 세찬 바람이 불면 꺾어지는 깃대들은 즐비한데 그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을 찾아보기 힘듦은 이 시대의 대중이 겪어야 하는 속앓이다. 건국 이후 몇 개의 공화국을 거치면서 탁월한 지도자들이 있긴 했어도 민족사를 아우를 그런 지도자가 없었다.

건국 이전에는 깜박거리며 민족의 등불 노릇을 했던 지도자가 보였는데 건국 이후에 하나같이 사라졌음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 민족의 박복함인가?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러하다. 위대한 민족 지도자의 출현을 우리는 희망 속에 기다린다. 삼국시대나 조선 500년을 통틀어 민족의 지도자로 내세울 이가 누구인가? 위대한 정치가와 용력 있는 장수는 많았지만 유독 통치자의 복은 적었다. 명군의 다스림을 오랜 동안 받아보지 못한 이 민족의 현실이 통탄스러울 뿐이다.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한 지도자가 나타날 때마다 은근히 달라질 것을 기대했던 마음들은 이제 기막힌 배신감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이라면 칠천오백만 겨레와 근현대의 역사 앞에 공범이 된 듯 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국교회에도 지도자 부재 현상은 마찬가지다. 자칭, 타칭 지도자는 흔해빠졌는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지도자감은 눈을 씻고 살펴보아도 없다. 아예 씨가 말랐다. 복음이 전수되던 초창기에는 지도자들이 보였다. 지금은 외적으로 가장 부흥한 시대에 속하지만 영적으로는 사사 시대를 방불케 한다. 혼란의 극치다. 선생은 오직 한 분뿐인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데 주님의 지도를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이들이 주님의 양들을 위한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역사의 어둔 밤에 별빛처럼 빛나는 느헤미야와 에스라 같은 지도자가 우리 시대에 나타나기만을 진심으로 학수고대한다.

불변의 말씀을 실행하고 증명하라

지금은 가치 판단의 기준이 분명하지 않은 시대다. 옳고 그름의 경계도 뚜렷하지 않다. 절대를 부정하고 상대를 떠받드는 세태 앞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이나 구원의 외길은 이설로 취급당한다. 이 무신(無信)의 시대에 교회가 설 자리는 어디인가? 절대(絶對)의 보검을 움켜쥐고 칼춤을 춰야 하나? 아니면 상대(相對)의 목검으로 가벼운 대련에 임해야 하나? 진리가 불변이라면 세태의 흐름과 상관없이 교회가 설 자리는 이미 정해졌다. 십자가가 정점을 이룬 말씀의 자리다. 영원히 변치 않는 말씀을 붙들고 교회는 영생의 도를 전해야 한다.

무디 목사의 성경에는 T-P 글자가 유난히 많았다. 그것은 “시행했다(Tried)-증명되었다(Proved)”는 표시였다. 우리의 성경에는 무슨 표시가 있나? 우리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조차 않는다. 지식적으로 인정하고 신학적으로 납득해도 신앙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고 부인치 말라! 우리의 무력한 삶이 그 증거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 몇 마디라도 실행하고 증명했다면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는 훨씬 달라졌으리라. 신념을 따라 사는 사람은 자기 의를 이루어도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신앙만이 신념을 넘어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 말씀을 삶으로 실행하면 하나님의 의가 우리 가운데 드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개인의 갱신 없는 교회 개혁은 없어

아무리 절망이 몇 만 겹의 두께로 세상을 뒤덮었을 때에도 기도와 말씀은 교회가 새로워지는 외길이었다. 불과 방망이처럼 태우고 부수면서 한 개인의 영혼을 갱신시키고 변화를 일으켰다. 그런 개인이 하나 둘 모이고 그들의 외침과 삶에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임했을 때 교회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이제도 마찬가지다. 사방이 막히면 눈을 위로 향해야 한다. 전후좌우가 봉쇄당하면 자신 속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자기를 해부하고 자기를 십자가의 죽음에 철저히 내몰아 새로운 부활 생명으로 환골탈태해야 한다. 개인의 갱신 없이 교회 개혁의 길은 요원하다.

교회의 갱신과 개혁은 오래 전부터 주창되어왔다. 방안이 검토되고 과제가 운위되며 실천 방향까지 제시되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묻고 싶다. 개혁을 외치는 목소리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개혁의 대상은 누가 정하며 개혁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누구에 의한 무엇을 위한 개혁이란 말인가? 자칫 공허한 울림으로 그칠까 저어된다. 항상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 교회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그것은 극복되어야 할 운명이 아니라 수용되어야 할 운명이다. 왜냐하면 개혁을 통해 교회는 늘 새로워지고 그 새로움을 바탕으로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선도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의 변(辯)은 수정처럼 맑고 투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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