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칼 공회의, 세계 공의회(世界公議會, ecumenical councils)는 “전체 교회의 회의”이다. 기독교는 한 교회를 원칙으로 하는데, 1054년에 서방과 동방으로 분열(分裂, division)했다. 원칙적으로 에큐메니칼 공회의는 1054년 이전까지만 형성될 수 있다. 1054년 이전에는 7번의 공회의를 개최했다. 그런데 서방교회(로마 카톨릭주의)는 에큐메니칼 공회의를 1962년까지 21회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WCC라는 단체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벌이고도 있다. 에큐메니칼(ecumenical)은 예루살렘 교회를 어머니 교회로 한 교회를 이루는 집단이다.

한 교회는 한 교리에 의해서 형성된다. 325년에 첫 에큐메니칼 공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그 이유는 한 교리로 한 교회를 만들기 위한 모의였다.

최초의 공의회인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도 각 지역 감독들의 모임들은 자주 있었다. 4세기 로마 제국은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폴리스, 로마, 5대 총대교구로 나뉘어서 활동하고 있었다. 325년 니케야 회의의 발단은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논쟁이 전체 교회 회의로 확장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인 아리우스를 대감독인 알렉산더가 정죄하면서 논쟁이 제국 전체로 확장되었고, 결국 황제가 제국교회 회의를 개최를 선언하게 되었다. 니케야 공회의가 첫 공회의, 에큐메니칼 회의이다.

당사 에큐메니칼 공회의는 황제가 소집하여 전체 교회가 모인 회의이다. 7개 공회의는 모두 황제가 소집하여 개최되었다. 회의 소집은 그 당시나 지금도 쉽지 않은 일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은 3년을 소요했는데, 그 경비를 모두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국 회의의 경비는 모두 황제가 지불했고, 지금도 회의 주최가 경비를 지불해야 한다. 공회의는 단순한 정치적인 회의가 아니라 엄청난 재원이 소요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왜 황제가 그러한 일을 진행했을까? 제국 운영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치적인 이유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공의회는 황제가 소집했지만, 한 교회를 이루는 믿음 문장을 확립한 회의였다. 그래서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이라는 문장을 확증했다. 정통 신조에 있으면 교회이고, 정통 신조를 부인하면 교회가 아니다.

21세기 교회의 한 풍토는 정통 신조를 의심하고 부인하는 것이 미덕인 수준에 이르렀다. 16세기 칼빈은 정통 신조를 명료하게 성경 해석을 근거로 확립했다. 참고로 325년 니케야 공의회를 소집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상태에 의해서 공의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 당시의 상황이 아닌 현재의 시각에서 판단한 오류라고 제시한다. 그 소집에 응해서 참석한 교부들의 수준을 자기보다 못한 것으로 간주한 교회 교사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교부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확립한 교회의 큰 교사들이다. 교부들은 바른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노력한 것은 아니다. 거짓 복음을 변호하면서 명시적인 교리 문장이 발생했다. 거짓 복음이 복음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결코 공회의는 개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형태는 지금까지 유효하다. 21세기 교회는 공격에 내성이 생겨 두들겨 맞아도 통증을 모르는 무통병의 상태로 전락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 400년 동안 로마 제국에는 6회 공회의가 더 개최되었다.

1회.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 

2회.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 

3회. 에페소 공의회(431년), 

4회. 칼케돈 공의회(451년), 

5회.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553년), 

6회.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680-681년), 

7회. 제2차 니케아 공의회 (787년)이다. 

칼빈의 후예들은 니케아 공의회(325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 에베소 공의회(431년), 마지막으로 칼케돈 공의회(451년), 4개 공의회 문서를 정통 신앙으로 확립한다. 4 차례 공의회에서 두 교리를 확정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실체(homoosuion),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 Dei genetrix)이다. 유사실체(homoioison)과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tokos)는 이단으로 정죄했다. 한 논제를 두 번에 걸쳐 반복하여 결정한 비합리적인 사안이다.

개혁교회가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근거를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혁교회의 핵심 문장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인데, 교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된 교리를 세우려는 것이다. 교리는 철저하게 성경과 일치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유익을 준다.

세계 역사는 17-18세기에 정신세계에 대격변을 발생했는데, 왕이 없는 시대, 왕권이 절대적이지 않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절대왕권이 있는 사회를 잘 고려해야 역사나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왕은 신적 권위에 근거한 권좌였고, 지금 국가 수권자는 국민의 권위에 근거한 권자이다. 16세기 재세례파는 왕권을 거부한 최초의 집단으로 보아야 한다. 칼빈은 교황주의자들이 왕권 위에 자기들을 놓는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호랑이 없는 숲에서 왕은 여우이다.

우리시대에 에큐메니칼을 회복하려면 한 어머니 교회,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가 자기 목표를 위해서 분열했고 분리했다. 칼빈파는 로마 카톨릭주의에 의해서 정죄되어 개혁교회를 이루었다(19회.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 그들의 주장은 신성로마제국에서 30년 전쟁, 프랑스에서 30년 위그노 전쟁을 거쳐야 했다. 유럽은 이슬람 세력과 전투에 집중하면서 신,구교의 갈등은 잠재되었다. 1571년 교황 비오 5세의 주도로 신성동맹(Holy Leagues)을 맺어 저항했고, 레판토 해전(Battle of Lepanto)에서 오스만 제국을 궤멸시키며 1573년에 해산했다. 1684년 교황 이노센트 11세의 주도로 러시아까지 참여한 신성 동맹(Lega Santa)을 맺었고, 1699년에 해산되었다. 1815년에 러시아 황제, 프랑스, 프로이센이 신성동맹(Heilige Allianz)을 체결하여 기독교 국가를 구축하려고 했는데, 영국과 교황이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이 동맹은 1914년 1차 대전 발발로 파기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es)가 창설되어 근대적 에큐메니칼 운동이 형성되었다. WCC에는 단성론자로 정죄된 오리엔트 정교회가 포함되어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회원자격은 없지만 1970년대부터 참관자격을 받았고, 신앙과직제협의회에는 정식회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14년에 설립된 한국그리스도교신앙과직제협의회에서 천주교도 함께 활동하고 있다. 근대적 에큐메니칼 운동은 어머니 교회로 일치, 한 믿음 세움이 아니라, 여러 믿음 체계를 인정하는 다양성 확대를 격려하고 증진하는 운동으로 볼 수 있다.

고대 교회는 한 종교 대상을 한 믿음을 전제했다. 현대 교회는 다양한 종교 대상에 다양한 믿음을 격려하고, 한 믿음을 정죄한다. 고대 교회 에큐메니칼은 명료하고 거룩했지만, 현대 교회 에큐메니칼은 융합이고 축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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