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창조적인 발상으로 환경을 개척하는 것이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 대표, 변화산기도원협력원장, 서울신대신학박사, 등..저서" 주기도문연구 등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마8:5-8)

 

백부장은 누구인가?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간청한다.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몹시 괴로워합니다. 백부장은 로마장교이다. 이방인 장교가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고 간구한 것이다. 당시 로마와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지배자와 피지배 관계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를 점령하고 있던 로마 사람들을 멸시하고 미워했다. 로마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아주 더러운 이방 사람들이라고 단정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부장이 예수님께 와서 간청했다. 내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예수는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했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에 이어서 나오는 말은 아주 간단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백부장의 대답은 아주 달랐다. 백부장의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충격을 준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믿음의 세계: 부분이냐 전부냐

나는 백부장의 믿음의 고백을 묵상하면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검검해보면서 나의 믿음을 되새겨보았다.

1)믿음이란 주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것이다. 백부장의 고백을 보면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가 묻어있다. 말씀만하시면 됩니다. 우리 집까지 오지 않아도 됩니다.

(1)우리는 누구를 믿고 신뢰하는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 적당하게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란 전부를 거는 위대한 행위이다. 전부냐? 일부분이냐? 늘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적당하게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세계에서는 불신앙과 같다.

(2)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할 때.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는 관계이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나는 그분의 백성이란 사실을 100%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 관계가 지속될 때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는 샬롬의 역사유지되는 것이다.

(3)주님이 제자들에게 종합구술 시험을 보았다. 시험의 주제는 2 가지 였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고백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내가 믿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분명하게 명확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믿는 것이다. 이 관계가 분명할 때 샬롬의 은혜가 유지되는 것이다.

 

2)믿음이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말씀에 복을 주시겠다고 하면 믿는 것이다. 순종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쓰여져 있으면 믿는 것이다. 복과 저주를 나누는 기준이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나에게 달달한 말씀은 받아들이고 나에게 쓴 말씀은 거부하는 것은 말씀앞에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받아들일때 부분만 받아들일것인가? 전부를 다 받아들일것인가?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말씀이기에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신명기28장에 보면, 순종과 저주가 기록되어 있다. 그 차이점이 무엇인가? 말씀이 기준이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실것이라” 여호와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복을 주시는 주체가 누구인가? 여호와 하나님이다. 살아계신 분이다. 죽은 우상덩어리라 아니다. 창조주이며, 전능자이며, 우리의 영원한 목자이다. 단서가 있다. 복은 누구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늘의 만나이다.

말라기서를 보면서 우리는 의문을 갖는다. 왜,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주가 찾아왔는가? 왜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지 않았는가? 왜 거룩한 땅이 더럽혀졌는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전해주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버렸기 때문에 예배가 무너져 버렸다. 둘째는 물질에 대한 구별을 버렸다.

교회가 무너지고 황폐하게 되는 것은 구약시대나 지금이나 두 가지 때문이다. 신앙생활하면서 두 가지가 희미하다면 절대적인 믿음의 가치가 붕괴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러면 그 인생에 더 이상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떠난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사울의 집을 보라.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다윗의 가문을 보라. 한 집안은 세월의 흐름속에서 점점 쇠락해져가고, 한 집안은 점점 왕성해져갔다.

말라기서에 보면 그 시대 영적으로 얼마나 교회가 타락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물질을 주님전에 드릴때에 가장 가치없고 병든것만 드렸다.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는 여호와의 식탁을 경멸히 여긴것이니라”(1:7).

 

  • “너희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 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말씀하시면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시되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3)믿음이란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창조적인 능력을 선포하는 것이다. 백부장이 하인의 중풍병을 고치고자 하는 마음으로 직접 예수님을 찾아와서 간구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해도 내 하인이 낫겠사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입니다. 오라하면 가고 가라하면 갑니다.

백부장의 대답은 아주 창조적인 발상이다. 누구도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발상이다. 당시 하인은 노예이다. 노예는 동물처럼 팔고 사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로마 백부장은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하인에 대해서 긍휼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백부장의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자세와 긍휼한 마음이 예수님을 감동시켰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8:10

백부장은 생각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었다. 고정관념을 뛰어넘을 때 우리의 믿음이 성장할 수 있다.  백부장은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과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성공은 새롭게 도전하는 자에게만 기회를 준다는 사실이다.

 

믿음이란 무조건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끊임없이 창조적인 도전을 하는 것이다. 나는 열정이 없는 사람들과 지속적인 만남을 이거가는 것을 힘들어하고, 의식적으로 피하는 경향이 있다. 열정이 없이 사는 분들이나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을 피한다. 믿음에 대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아무런 도전도 열정도 없는 분들은 하나님도 방법이 싫어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열정없이 비전없이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하다.

스스로 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하늘과 땅과 사람만 쳐다보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믿음에 대한 도전도 열정도 비전도 다 식어버린 모습은 기독교가 아니다. 열정이 없는 삶은 영혼을 주름지게 하며, 공동체를 힘빠지게 한다.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께 다 맡기고 자신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요행만 복권만 바라보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백부장처럼 창조적인 도전을 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끊임없는 믿음의 상상력을 키워가며, 믿음의 근력을 키워하며, 창조적인 발상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은 항상 방법을 찾는다. ‘하고 싶은 일에는 항상 방법이 보이고, 하기 싫은 일에는 변명만 보인다’다는 사실이다. 믿음이란 항상 하나님의 방법을 성경에서 찾아 만들어가는 세계이다.

기독교는 믿음으로 출발하고, 믿음으로 환경을 창조적으로 개척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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