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희망의 분천이던 초창기 한국교회

희망의 분천이었던 교회가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면 도대체 상상이 가는가? 초창기 한국교회는 작고 허름했으나 복음의 당당함과 순수함에 열정까지 있었다. 새벽의 부르짖음은 한밤까지 이어졌고 심방 길에는 대원들이 그림자처럼 수행했다. 이웃 교회의 부흥사경회에 사면팔방으로부터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모여들었다. 강원도 산골에서의 집회에 경상도와 전라도에 사는 성도들이 그 먼 거리를 마다않고 모여들었다. 시골 교회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침식거리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진 채 몇 날을 걸어 찾아들곤 했다. 강사는 칠판에 분필가루를 날리며 진리를 가르치려 애썼다. 거룩한 집회는 모든 교회의 잔치였다.

인위적 연출로 한방을 노리는 예배 연출

오늘의 교회는 웅장하고 화려하고 아름답다. 최신 기기를 장치한 설비는 대극장이나 국제 회의장을 방불케 한다. 마이크 시스템이나 조명은 최상품이다. 회중석도 편안하기 그지없다. 각종 프로그램이 쉴 틈 없이 돌아가고 발만 교회 안으로 들여놓으면 모든 것이 풀 서비스 수준이다. 세련된 성가대의 찬양은 웬만한 음악회 수준이고 설교자의 메시지는 꽤 들을 것이 있어 싫지 않다. 청중들의 귀를 의식한 설교술의 발달로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서로 부담이 없다. 여기에 깊은 함정이 있다.

성경적 축복은 오만 가지 기복으로 변형되어 판매되고 간증은 갈수록 은혜의 범주를 넘어 기이함을 이루고 저질 만담은 방송의 코미디 프로를 무색케 한다. 하도 고강도의 설교와 간증에 익숙해서 웬만큼 충격적 내용이 아니면 눈도 꿈쩍 않는다. 그래서 모두 그 “한방”을 노린다. “한방”을 먹이기 위해 단색의 메시지에 도금이 칠해지고 사실은 이야기처럼 각색된다. 한 시간의 연출을 위해 모든 에너지와 기술과 기교가 총동원된다.

금권선거-세습-교회분쟁-재정비리로 얼룩진 교회

교회 부임과 총회장 선거에 돈이 오가고 이임·퇴임 때면 비정상적인 액수의 전별금이나 퇴직금이 지급된다. 북에서 시작된 정치적 세습이 남한에 와서는 교회의 세습으로 굳었고 대형교회마다 제 자식 심기가 유행이다. 비판의 강도가 거세지자 당구의 쓰리 쿠션처럼 교차 세습까지 발상해냈다. 국내만이 아니라 국제적 규모로 확대되어 역량 있는 목회자의 자녀들끼리 절묘한 자리 바꾸기를 시도한다. 주님이 심으려던 자신의 종들 거취는 주님도 모르는 사이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성령의 주도적 역사가 있기 전에 인간의 야욕과 정치술이 야합되어 단박에 끝내버린다. 대다수의 신자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알아도 모른 체한다. 본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만 없다면 별 상관이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회의 분쟁은 쉬쉬 하며 교단 내에서 마무리했다. 이제는 법정 시비를 가리는 것이 당당하고 흠이 되지 않는다. 목사가 경찰력을 동원해 반대파들의 교회 진입을 가로막고 과격한 신자는 설교 중의 목사 멱살을 잡아 흔든다. 한쪽에서 찬송하면 다른 쪽에서는 통성기도를 한다. 집회 때마다 성도들이 모여들며 서로 사랑의 안부를 전하던 교회 안마당은 현수막을 걸고 피켓을 든 시위대들로 인해 노사 분규의 현장에 들어선 느낌이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그 곁에 자리를 마련한 사탄은 악령들의 인사를 받으며 기분 좋게 노닥거린다.

직분 수여의 방만함은 금전 거래와 함께 교회의 타락상을 더욱 추하게 만들고 목회자와 당회원의 재정 스캔들은 끊이지 않는다. 모든 비리를 안고 투신자살을 하는가 하면 양심선언을 빌미로 추악한 행적을 게워낸다. 각종 추문과 루머가 교회의 여린 영성을 갉아 먹는다. 교회에 분쟁이 생기면 상회가 개입하여 더러운 정치놀음으로 성도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침소봉대와 악성 루머로 눈 밖에 난 지도자를 생매장시킨다. 젊은 교역자들은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손을 부비고 강자의 편에 붙어 기생한다. 힘을 가진 뒤에 개혁 하겠다며 다짐하지만 그 자신도 믿지 않고 그 누구도 그 말을 기대하지 않는다.

목회자 후보생들의 사명 의식은 이전에 비해 빈약하다. 사례 조건을 내거는 것이 흉이 되지 않는 이 시대의 목회 현실을 어찌 해석해야 하나? 그래도 신학생들이 넘쳐나니 무허가 신학교들은 성업 번창중이다. 신학교나 교단의 숫자는 기독교 역사상 세계 제일이다. 이를 단순히 부패와 타락이라 일침만 가하면 그만인가? 아론의 금송아지보다 더 부패하고 타락한 한국교회가 걸어갈 길은 뻔하다. 쇠락과 파멸이다. 교회 스스로 자신을 벗기지 않으면 하나님이 강제로 발가벗기신다.

주님이 쓰실 그릇은 추종자들 중에서?

추종자를 거느리기 좋아하는 것은 비뚤어진 지도자의 오만함에서 비롯된다. 주위에 사람이 모이면 왜 그런지를 살펴야 하는데 추종의 동기를 따질 겨를도 없이 날개를 펴서 그들을 거느린다. 그들의 따름이 주님인가? 아니면 자신인가? 를 고민하면서도 그리 죄의식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릇 대로 사용하신다는 ‘용기론’(容器論)이 께름칙한 마음을 털어버리게 만든다. 과연 그런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큰 그릇도 있고 작은 그릇도 있다. 금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다. 온전한 그릇도 있고 깨진 그릇도 있다. 그릇이 어떠하든 깨끗하기만 하면 주님의 쓰심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이 쓰시는 데 누가 감히 딴죽을 걸 것인가? 그런데 그릇이어야 할 주님의 종들이 제멋대로 쓰고 안 쓰고를 결정한다. 나누고 안 나누고를 결정한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마치 제가 인심 베풀 듯, 옆 집 떡 돌리듯 그렇게 방만히 남용한다.

큰 자, 가진 자의 뿌리 깊은 오만함은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 까닭이다. 누구라도 그 위치에서는 백이면 백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든다. 인심은 공작새의 꼬리처럼 변덕이 심하고 세상 풍조는 크고 강한 삶에 가치의 무게를 둔다. 가난한 시절에 맺은 우정을 부요함 때문에 잃음은 서글픈 일이다. 주님만이 한결같으시다.

부단히 자기를 갱신해야 할 교회

한결같지 않은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주님의 생명을 바탕으로 존재한다. 교회는 이미 형성된 존재(being)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형성되어가는 존재(becoming)로서 늘 새롭게 하는 능력인 성령의 기운에 휩싸여있다. 살아있음은 개혁된 상태(reformata)를 넘어 항상 개혁되는(reformanda)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 명제는 어거스틴을 지나 루터와 칼뱅을 거쳐 많은 개혁자들이 외쳐온 한결같은 다짐이었다. 이는 단지 교회 제도의 혁신을 말함이 아니다. 그것은 표피일 뿐 개혁되어야 할 대상은 교회를 구성하는 지체로서의 그리스도인 각자다.

성령의 밝은 빛 앞에 드러난 빛의 아들들은 계속 새로워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을 거니는 종교 산책의 저지대를 지나 교회 밖의 거친 세상을 믿음으로 활보하는 신행(信行)의 고지대를 닦아야 한다. 주님이 그토록 불붙기 원하셨던 바를 위해 하나의 작은 불씨가 되어 세상에 던져져야 한다. 불쏘시개가 있는 곳에 불씨가 머물면 반드시 불꽃을 일으키고 일렁거리는 불꽃은 이내 거센 불길로 화하여 주변의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부단히 자기를 개혁시키는 갱신의 영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교회 갱신의 가능성은 주님께로 부터

교회는 새로워져야 한다. 교회가 새로워질 수 있음은 새롭게 하는 능력이 주님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새로워지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된다. 시간은 늘 새로운 모습을 띠고 우리를 찾아오지만 항상 옛 본질의 뿌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의 죄가 퍼뜨린 파괴적 능력은 인간 자신만이 아니라 우주 전체에 미쳤다. 하늘과 땅, 바다와 공기에 이르기까지 죄의 인자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만물을 죄에서 자유케 하고 시간을 죄의 속박으로 풀어주는 것은 인간만이 첫 삽을 뜰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을 새롭게 하면 만물의 새로움이 뒤따른다.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은 만물을 대표한다. 인간의 죄가 만물을 죄에 오염시켰다면 인간의 새로움 또한 만물을 새롭게 하기에 넉넉하다. 인간의 삶이 새로워지려면 인간의 마음과 생각이 새로워져야 한다. 이것은 인간 영혼의 쇄신 또는 갱신을 요한다. 회개가 그 유일한 길이다. 인간은 죄를 통해 타락의 극치를 맛보았고 회개를 통해 하나님 사랑의 절정을 맛본다. 회개의 영은 하나님께서 부어주신다. 교회는 신선한 영으로 충만해야 한다. 회개와 사죄는 내면의 탁한 공기를 내뿜고 교회 안에 충만한 새로운 공기를 영혼 안으로 빨아들임이다.

개혁 없는 교회는 심판의 대상

개혁이란 뜯어 고침이다. 무엇이 잘못되어 개혁해야 하는가? 원인은 단 하나, 죄 때문이다. 죄에서 벗어난 교회가 다시 죄의 굴레에 휩싸일 때 교회는 그 존재 의의를 상실하고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공의를 외칠 자격을 박탈당한다. 주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가 삶에서 고백이 부인될 때 교회의 정체성은 희미해진다. 말씀의 권위는 사라지고 말씀을 말씀 되게 하는 성령의 역사 또한 침묵한다. 이런 상태를 탈피하지 않는 한 교회는 세상보다 더 지독한 심판의 대상이 된다.

개혁의 원점은 어디인가? 오늘의 교회가 돌아갈 원형은 무엇인가?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개혁의 원동력이다. 성경에서 묘사하는 첫 교회의 모습은 우리가 돌아갈 교회가 어떠해야 함을 잘 시사한다. 자발적 헌신과 기쁜 섬김이 있고 두려운 복종과 활력 넘치는 예배가 있으며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부력처럼 교회를 떠받쳐 염분 가득한 세상의 물결에 빠져들지 않도록 했다. 교회에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함께 두렵고 떨리는 경외심으로 충만해야 한다.

개혁의 예외 없고 갱신의 끝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가 이루어야 할 것은 구원이다. 구원은 주님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것을 실제적으로 나의 것 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완전한 변화 곧 개혁된 영혼에 있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가 갱신과 개혁의 중심인데 지체인 그리스도인들이 변화를 거부하고 개혁을 외면한다면 그 몸을 어찌 온전한 몸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개혁하지 않는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정절을 더럽힌 신부와 다르지 않다. 사탄의 노리갯감으로 전락해버리기 십상이다. 교회의 개혁은 한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지속적으로 거듭되어야 한다. 개혁되는 만큼 교회는 순수하다.

주님은 공생애에 나서기 전까지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업인 목수 일에 전념하셨다. 홀어머니와 형제들을 돌보기 위함이었다. 주님의 기술은 천막 제조술에 일가견이 있었던 바울처럼 목재를 다룸에 있어서는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분이 자신의 교회가 기둥이 썩고 지붕이 새고 벽에 금이 가고 기초가 흔들거린다면 어떡하실까? 단번에 부숴버리고 새로 짓지 않으시겠는가? 재림하실 주님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세상의 거의 모든 교회를 부수기 위해 필요한 장비들을 천사들에게 운반케 하지 않으실까? 이런 상상을 하는 것은 지금의 교회들이 주님이 설계하시고 시작하셨던 교회의 모습에서 너무 멀어졌기 때문이다. 개혁과 무관한 교회나 갱신이 불필요한 교회는 하나도 없다. 개혁의 종소리는 계속 울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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