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성령이 충만하셨다(눅 4:1). 성령에 이끌리어 시험을 받기 위해서 광야로 나가셨다(1절).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심은 자기 선택에 의한 것이다. 이것도 엄밀하게는 수동적 순종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그런데 예수를 모범을 삼는다면 제자들은 시험을 받기 위한 매뉴얼을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는 신자의 행동 기준이 아니라, 생명의 주로 믿음의 대상이시다. 예수의 행동은 삶의 지표가 아니라, 믿음의 내용이고 대상이다. 성령 충만하면 시험이 사라질 것처럼 생각하는데, 오히려 더 강력한 시험이 임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이기셨기 때문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음을 고백하는 훈련이다. 참고로 예수께서 성령을 받으신 목적은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주시기 위함이다.

2.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은 시험은 출애굽한 백성들이 받음 시험 시험과 아담이 받은 시험을 연상하게 한다(막 1:13). 이스라엘은 자기 불순종으로 인해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만나를 먹으면서 시험을 받았고, 예수는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스스로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며 시험을 받았다. 이스라엘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지만 요단강을 건넜고, 예수는 시험을 통과했지만 마귀들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이스라엘은 자기 구원을 이룸이지만, 예수는 우리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사역이다. 아담은 가장 아름다운 에덴에서 시험을 받았고, 예수는 가장 척박한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다. 아담은 그곳에서 반역했고, 예수는 광야에서 승리했다. 아담은 죽음의 원인이고 예수는 생명의 원인이다. 예수는 아담의 죄와 이스라엘의 죄를 회복하고 구속할 구주가 됨을 시험을 통해서 증명하셨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3. 예수의 시험은 3 단계로 진행되었다(비교. 눅 4장). 떡(신 8:3), 성전탑(시 91:11-12 -> 신 6:16), 절함(6:10)으로 진행되었다. 애더스하임은 누가복음이 마태와 마가를 보충하는 기능이 있다고 제시했다. 누가복음이 시험 순서가 좀 더 정확할 것으로 추측한 것이다. 누가는 가장 어려운 시험을 성경 구절을 제시하면서 공격하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떡’은 밥(풍성한 양식)인데, 주기도문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돈의 문제이다. 전혀 다른 양상인데, 일용할 양식(만나)에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예수께서 “돈과 신”을 대조시킨 것도 매우 독특하다. 그리고 성전탑과 절함을 필자는 명예와 권세로 제시하고, 둘은 한 짝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시험은 두 가지, 돈과 명예(권세)이다. 잠언은 돈이 아닌 (권세없는) 명예를 선택하도록 가르친다(잠 22:1). 돈, 생존 때문에 인생은 망가지는데, 결국에 명예를 잃은 것을 전체를 잃은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생명의 주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돈이 없어도, 명예가 없어도, 권세가 없어도, 오직 여호와로 만족할 수 있다(합 2장).

4.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12절). 예수께서 행하신 갈릴리 사역은 구약 예언의 성취이다(마 4:14-16, 사 9:1). 예수께서 전파한 내용은 세례 요한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17절).” 예비하는 자와 오신 자의 외침이 같은 것은 구약을 회복하고 완성하기 때문이고, 다름은 천국을 실현한 구주의 선포라는 것이다. 어렴풋이 알고 의지해서 선포하는 것과 “에고 에이미(εγω ειμι)”께서 외치는 차이이다. 그래서 예수는 선지자이고 선지자들이 외친 원형(revelatio archetypa)이다. 세례 요한이나 우리는 모형(revelatio ectypa)에 의해서 사역을 한다. 세례 요한이 먼저 사역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세례 요한 이후에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마 11:12). 천국을 가져오신 예수의 구속 사역으로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 “요한이 선포한 천국”은 “그 천국을 가지고 오실 분을 바라보라”고 촉구한 것이다. 요한의 촉구에 의해서 회개하면 오실 예수를 영접하게 될 것이고, 복음으로 회개하면 오신 예수를 영접한다.

5.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은 하나님의 나라(神國, the kingdom of God)과 비교해 보아야 한다. 마태는 천국(天國)을 말했고, 마가는 신국(神國)을 말했다(하나님 나라, 막 1:15). 누가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했다고 제시했다(눅 4:43). 누가복음 4:43절, Geneva, KJV, NASB는 the kingdom of God로 번역했지만, NIV 등 현대어 번역에서는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마태와 누가는 preach라는(전파하다) 단어를 마가는 saying(하시더라)으로 기술했다.

예수의 사역은 나사렛에서 스블론, 납달리 지경,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진행했다. 사 9:1을 성취하신 것이다. 흑암에 빛을 주시는 것은 창 1:2과 같다. 주께서 흑암에 빛을 비추시기 때문에, 어둠은 사라지고 빛이 세워 진다. 빛과 어둠은 절대로 합(合)을 이룰 수 없다. 헤겔의 논증 방식은 전혀 맞지 않는데, 우리 시대는 헤겔 사고에 있다. 프란시스 쉐퍼는 헤겔을 절망선(The line of despair)으로 제시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방식은 어둠에 빛을 비추어 어둠에서 빛을 세우는 방식이다. 블랙홀(black hole)은 빛을 삼킨다고 한다. 빛을 흡수하는 어둠이 있다는 발상은 물리적으로 맞지 않을 것인데, 우리 시대 과학에서는 정설로 놓았다. 빛을 흡수하는 힘의 근원(초거대질량)을 밝히지 못한 상태이고,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있다는 착각으로 인도한다.

6.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셨다. 그물을 던지는 두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말씀하셨다(λέγει). 이는 제자들의 사역의 성격을 부르심에서 밝히신 것이다.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셨다(ἐκάλεσεν). 두 형제가 예수의 부르심에 곧(즉각적, prompte) 순종했다(20-22절). 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 (Calvin)

7. 예수는 갈릴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서 병, 약함을 고치셨다. 가르침(teaching), 천국 복음 전파(preaching) 고침(healing)이 예수의 사역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전도하기 위해서 오셨다(막 1:38). 예수님의 사역은 순전하심과 유대인들에게 주신 기회인데, 결국 유대인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셔 구원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하신 사역을 자기 패턴(모범)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

8. 그러한 사역의 결과 많은 사람이 예수께 나왔다(마 4:25). 마태는 그들에게 산상수훈을 가르치는 구도로 제시했다(마 5-7장). 그런데 요한복음 6장에서는 많은 사람을 피해서 산으로 올라가셨다.

9. 전능하신 하나님,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pro nobis) 시험을 받으신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 양식인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 복음이 예수의 이름이고, 예수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안에 천국 복음이 충만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천하만민 앞에서 예수께서 나의 주님이시고 구주이심을 증언하게 하옵소서. 주의 백성을 구원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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