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욱 목사의 인문학 산책 (9)

 

이상욱 목사│목민교회(인천) 담임, 호서대학교( Ph.D),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불멸의 재산(krema eis aiei)

투키디데스(Thucydides, B.C. 460-400)는 자신의 저작 『펠로폰네소스 전쟁사(The History of Peloponnesian War)』는 인류에게 “불멸의 재산(krema eis aiei)”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가 자신 있게 이러한 예언을 하는 이유는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에는 쉽게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이 투영되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저작이 인류에게 불멸의 재산이 될 거라는 투키디데스의 예견은 적중했다. 폴리비오스(Polybios, B.C. 203-120), 키케로(Cicero, B.C. 106-43), 마키아벨리(Machiavelli, 1469-1527)는 투키디데스가 적용했던 사실적 역사서술방식과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 순환적 역사관을 이어받았고, 마키아벨리, 홉스(Hobbes, 1588-1679), 헤겔(Hegel, 1770-1831), 니체(Nietzsche, 1844-1900)는 투키디데스가 통찰했던 인간의 본성을 그들의 정치철학에 투영시켰다.

그의 예언대로 27년간 지루하게 계속된 이 전쟁은 배 13척을 울돌목에 띄워놓고 수백 척 적군(敵軍)을 기다리는 이순신이나, 코끼리 부대를 끌고 눈 덮인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의 극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지만 전 세계의 대학 초년생은 『펠로폰네소스전쟁사』를 읽느라 밤을 밝힌다. 2500년 전 기록된 역사책이 현재에 던지는 의미심장함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책은 2003년 3월 19일 죠지 부시 행정부에서 이라크 전쟁을 침공할 때 그 이론적 기초가 된 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오늘날 국제정치에서 전쟁의 당위성(當爲性)과 필요성을 역설할 때 교과서로 인용된다.

 

투키디데스(Thucydides)의 펠레폰네소스의 전쟁사(Peloponnesian War)

지금은 헤로도토스가 일반적으로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투키디데스(BC 460~398)가 역사의 아버지라 불렸다. 헤로도토스가 비록 대부분 직접 현장을 답사하며 『역사』라는 책을 집필했지만,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많아서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되기 전까지, 그는 허풍쟁이로 통했다. 하지만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그리스 국가들의 자유와 생존을 위한 투쟁기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투키디데스는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양분한 그리스 도시국가 간의 비참하고 부끄러운 내전의 전개과정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여간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서양 역사에서 쌍벽을 이룬다. 이들의 역사관을 해부해 보면 헤로도토스는 개별성과 특수성을 중시하여 세상에는 다양한 민족과 나라가 있고 강대국과 약소국은 끊임없이 바뀐다는 점을 강조한다. 과거의 사실(史實)이나 전승되는 이야기를 필자의 주관은 될 수 있는 대로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다. 반면에 투키디데스는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 놓이면 인간은 거의 똑같은 행동을 보인다고 믿고 날카로운 이성으로 엄밀성을 추구하여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은 제거했다. 그는 역사의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과감히 생략하고 후세에 교훈을 주고자 했다.

신화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전환

기원전 8세기에 호메로스(Homeros B.C. 800~BC 750)가 등장하여 기원전 13세기 트로이 전쟁(Troian War)을 둘러싼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를 썼다. 그리고 400여 년 후에, 헤로도토스(Hērodotos BC 484?~BC 425)가 『역사 historiai』에서 페르시아 전쟁(Persian Wars BC 490~480)을 썼다. 트로이 전쟁과 페르시아 전쟁은 헬라스인(그리스인) 비헬라스인과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쓴 저작물들은 신화의 세계의 산물이었고, 영웅들의 이야기였다. 그러다가 이제 투키디데스(Thucydides) BC 460~BC 395)의 시대가 열렸다. 그것은 투키디데스의 말에 의하면 ‘인간의 시대’인 것이다. 이제 한 사람의 영웅, 신체적 우월이 아닌, 사회적 우월을 강조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는 곧. 타협. 기능. 이데올로기. 협력. 공동체의 성립 등이 중요하게 되는 문명의 시대로의 출발을 의미한다.

과거의 사건에 대하여 명확한 지식을 얻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현재와 미래의 사건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역사에 투영된 인간의 본성은 가시적으로는 모습을 바꾸어 나타날지 모르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고 반복되기 때문이다. 투키디데스는 바로 인간의 보편적 본성과 그것이 빚어내는 역사를 묘사하고 있다. 투키디데스(Thucydides)는 스스로가 문명국가라고 자부하고 있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탐욕. 질투. 분노. 사랑 등,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는 펠레폰네소스의 전쟁사(Peloponnesian War)를 통해서 역사는 반복적으로 드러내는 인간의 본성을 성찰한다. 반복되는 역사의 전후좌우를 살펴보는 것은 위기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밝히기 위함이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에게 진정한 역사의 의미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의 지도를 그려 보여주겠다는 함의가 담겨 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의 발생원인

펠로폰네소스전쟁의 본질적 원인은 스파르타인을 불안하게 만든 아테네의 급속한 성장이지만 대표적인 전쟁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분석된다. 첫 번째 원인은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있던 코르키라와 스파르타와의 동맹국이었던 코린트의 전쟁에서 비롯되었다. (코린트의 위치는 아티카 지방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곳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중간지점에 자리 잡고 있었고 코르키라는 코린트의 식민지였다) 당시 코린트는 패배에 분개해 전쟁을 준비하였고 코르키라는 위협을 느껴 아테네와 연합해 코린트와 다시 전쟁을 벌였으나 어느 측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는 못했다.

두 번째 원인은 포티다이아에서 발생했다. 포티다이아는 당시 코린트의 식민지였으나 아테네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고, 아테네 측은 포티다이아 측에게 코린트에서 파견하는 행정관을 거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포티다이아는 코린트와 스파르타의 도움을 약속받고 이를 거부하였고 화가 난 아테네 측은 포티디아에 해군을 파견하여 봉쇄한다.

세 번째 원인은 아테네가 자신들과 근접한 스파르타의 동맹국 메가라에게 아테네 근처 항구이용을 금한 것이다. 이는 곧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은 국가들에 아테네를 포함한 아티카시장 내의 모든 지역에서의 무역을 금한 것이다.

Pericles' Funeral Oration (Perikles hält die Leichenrede) by Philipp Foltz (1852)

펠로폰네소스전쟁 시기 구분

펠로폰네소스전쟁은 세 시기로 나뉠 수 있다. 제1기(B.C. 431-421)는 두 전쟁 당사자인 아테네와 스파르타 중에서 어느 한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 못한다. 제2기(B.C. 421-414)는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공격으로 특징지어진다. 아테네는 시칠리아 원정을 승리로 이끌지 못한다. 제3기(B.C. 414-404)에는 페르시아가 스파르타를 물질적으로 원조함으로써 페르시아-스파르타 동맹이 형성되고 아테네는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고 만다.

① 제1기- 아르키다모스 전쟁(B.C. 431~421)

제1기 전쟁이 아르키다모스 전쟁이라고 불린다. 이유는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가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을 이끌어 아티카 지역을 공격해 아테네를 포위하였기 때문이다. 아테네군은 주 병력인 해군을 내세워 스파르타 군(軍)이 지칠 때까지 안전한 장벽 뒤에서 공격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아테네 내에서 페스트가 발생하고 지도자 페리클레스 또한 페스트로 사망하게 되고 페리클레스의 후임으로 클레온이 추대 받지만, 그 또한 암피폴리스 전투(기원전 422년)에서 사망한다. 이후 클레온의 뒤를 이은 니키아스가 주도하여 평화협정을 맺은 후 휴전상태(니키아스의 평화)를 유지한다.

② 제2기- 게으른 평화(B.C. 421-414)

전쟁의 제2기는 평화의 노력이 부족한 “게으른 평화” 시기로 불린다. 페리클레스의 죽음 이후 그의 조카 알키비아데스가 대중을 선동하는 연설가로 등장한다. 시칠리아섬에 서쪽 지방인 세게스타는 동부의 시라쿠스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곧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주요 동맹국이었던 시라쿠스를 점령하기 위해 대규모의 해군을 시칠리아 일대로 보내지만, 시라쿠스와 스파르타 연합군에 의해 패배하고 만다.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 패배로 인해 펠로폰네소스전쟁의 주도권은 스파르타 진영 측으로 넘어가게 된다.

③ 제3기-데케라이아 전쟁(B.C. 414-404)

전쟁의 제3기는 데케라이아(Dekeleia) 전쟁이라고 불린다.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 진영 측으로 넘어가 아테네의 전력요충지였던 데케라이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고, 펠로폰네소스 동맹군 측은 그 후 데케라이아 성을 점령하고 본격적으로 아테네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이 시점에서 알키비아데스는 페르시아 왕을 찾아가 스파르타 측의 해군증가를 위한 재정지원을 성사시킨다. 이후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의 요청을 받아 아테네 측으로 복귀해 몇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나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은 스파르타의 효율적인 해양봉쇄와 곡물 유입 차단으로 인해 허덕이고 결국은 전쟁에 패하게 된다.

[지도] 펠로폰네소스 전쟁( 출처 : http://m.blog.daum.net/picodrim/9873968)

투키디데스의 덫(Thucydides's trap)

아테네의 장군이었던 저자 투키디데스는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아테네가 기존 강국 스파르타에 불러일으킨 두려움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지목했다. 새로운 힘이 부상하고 기존 세력이 이를 두려워할 때 형성되는 소용돌이가 주변을 집어삼키는 '투키디데스의 덫(Thucydides's trap)'이다. 신흥 강국 독일의 호전성과 기존 강국 영국의 대응은 1914년과 1939년의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하버드대학 앨리슨 교수에 따르면 서기 1500년 이후 세계 지도상 힘의 축(軸)이 이동했던 15번 중 11번이 전쟁으로 귀결됐다고 밝혔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의 역사에서 상승의 최고점을 페리클레스(Pericles, B.C. 495-429)의 정치가 실현되는 시기로 보았다. 기원전 431년 여름 개전 후 2년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페리클레스가 사망했다. 사실 그 이후 그가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테네의 대외권력과 국내정치가 내닫고 있는 내리막길에 관한 것이다. 그는 페리클레스의 사망으로 시작된 아테네의 하강 곡선이 국내정치의 혼란과 대외정치의 오만을 동반하며 결국 몰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서술하고자 했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전쟁사』는 권력의 변증법이고 고삐 풀린 아테네 제국의 역사이며 오만과 몰락의 역사이다. 투키디데스는 그리스인의 전형적 모티브인 오만과 몰락의 이야기를 아테네를 통해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인간의 열정에 대한 분석, 전쟁에 대한 거리낌 없는 사실적 묘사, 그의 현실주의와 권력에 대한 분석,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 인간 행위의 전형을 반영하는 서술방식 등이 아테네의 상승과 하강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폭의 그림처럼 담겨 있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에서 우리는 많은 지적 재산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에 대한 이해,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 제국의 성장과 몰락, 예방전쟁이 왜 발생하는지와 과잉팽창이 가져오는 파멸과 같은 여러 주제를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인간이 반드시 자신이 경험해야 배우는 존재가 아니라면 『펠로폰네소스전쟁사』는 과거가 주는 엄청난 선물이다. 투키디데스를 인용할 때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은 그가 전쟁을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그는 전쟁이란 “힘을 얻기 위한 무기경쟁”으로 파악했고 그것은 현재까지도 국제정치학 전쟁을 연구하는 이들의 가장 중요한 화두로 남아있다.

제국주의와 제사장 나라

테미스토클레스 Themistocles의 제국화 정책은 탁월한 선택이었을까? 투키디데스는 부정적이다. 어떤 시대든, 집단이든 제국화의 길은 피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성장도 그렇다. 페리클레스 같은 탁월한 통치자가 나오면 제국화의 길은 평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제국은 필멸한다. 역사는 제국은 영원히 성장할 수는 없다는 것을 증언한다. 투키디데스는 제국화는 추천하지 않지만, 현실로 받아들인다. 종국에는 제국화의 길이 나라를 쇠락의 길로 이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아테네 사절단의 논리는 확장의 논리였다. 체면. 두려움, 이익은 제국의 길로 나가는 메커니즘이다. 그리고 제국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더군다나 인간 본성에 어긋나는 짓도 아니다. 곧, 누구나 다 그러하다는 것이다. 약자가 강자에게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이 논리는 2003년 3월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할 때 정당성을 뒷받침해 준 근거가 되었다.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는 제국주의가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 제국주의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지배하려고 시도하거나 실제로 지배하는 상태이다. 결국, 제국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점령해서 지배하는 형태를 말한다. 제국은 임페리얼(imperial)의 속어적 개념이다. 근대 초기 제국의 의미는 이러한 선례와 거기서 파생된 유사개념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즉 제국은 상위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모든 권력을, 그리고 거기서 확대된 의미로 자치적이고 최고권위를 가진 정치공동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가까운 것은 신성로마제국처럼 공통된 최고 권위자에 지배되는 다양한 영토와 선민들의 공동체이었다. 그 때문에 어떤 나라가 제국 형성을 꿈꾸고 제국주의로 나가게 되면 주변 나라들은 모두 국가적 외교. 안보적 비상사태를 맞게 된다. 제국은 예전에는 군사적 우위를 가지고 지배했다면 오늘날에는 경제적 힘을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 즉 힘을 가지고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점령해 가는 형태들을 말한다.

성경 역사 속에서 다윗의 위대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제국주의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싸움에 나갈만한 20세 이상 남자의 숫자를 130만 명이나 확보함으로써 충분한 국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삼상 24:19). 그래서 이들의 일정 숫자를 상비군 인화함으로써 군사력을 통해 제국주의로 나갈 수 있었음에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이스라엘 나라의 경제를 넘지 않았다(민 34:3-5). 앗수르 제국이 주력부대 18만 5천 명이 군인을 데리고 예루살렘을 공격하며 제국주의를 펼쳤던 점을 상기한다면 다윗 시대 130만 명의 상비군화가 가능한 숫자는 앗수르 제국을 만들 힘이 있었음을 충분히 보여준다.

제사장 나라의 경영기초는 하나님의 언약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나라의 경계를 넘지 않았다. 그는 당시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큰 국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이스라엘 땅의 경계를 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그것은 힘이 있는 자에게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높이 평가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제국이 아니라 제사장 나라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내 종 다윗을 하고 명명하시며 다윗을 그토록 사랑하셨던 이유는 다윗이 제국의 길을 피하고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경영기초는 하나님이 아니라 경제와 국방에 있다. 군사력으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정복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그래서 자기 민족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정책이 제국의 본질이다. 성경 역사 속에서 다윗이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는 근본 이유는 제국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제국과 제사장 나라의 공통점은 무엇이고 차이점은 무엇일까. 먼저 공통점은 둘 다 민족을 그 단위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국도 제사장 나라도 모든 민족을 그 단위로 하고 있다. 차이점은 제국은 민족을 계급화한다. 그러나 제사장 나라는 민족대 민족을 동등하게 하나님 앞으로 가게 한다. 이것이 제국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바로 제국과 제사장나라에 대한 근간이 모세 때 레위기 26장을 통해서 명료하게 정리되었다. 그 때문에 레위기를 놓치면 앞으로 펼쳐질 제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제국은 경제와 국방 문제를 축으로 주변 남의 나라를 흔드는 것이다. 자원의 결핍 때문이다. 힘의 균형 때문이다. 인간의 부패한 본성 때문이다. 이것이 제국의 한계이다. 군사력으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정복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그래서 자기 민족의식을 극대화하는 비열한 정책에 바로 제국의 본질이다. 투키디데스는 테미스토클레스과 같은 리더십으로 제국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후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레위기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는 키워드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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