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 7:1-5] 비판하지 말라. 예수님은 비판(정죄)하지 않도록 가르치셨다. 우리 시대에 뒷담화가 정형화되었다. (참고. 뒷담화는 뒤에서 헐뜰는다는 표현이고, 언어적으로 뒷말에 대해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김한샘 선생은 뒷말, 뒷이야기로 제안했다. 뒷담화는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뒷담화의 소재는 그 안에 없는 사람으로 가장 흥미롭게 이야기 진행을 할 수 있다. 뒷담화는 관음증(voyeurism, 觀淫症)의 한 부류라고 볼 수 있다. 합법적인 관음증이 영화와 연극 등 예능프로그램이다.)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 형제를 비판할 때 자기의 과오와 약점이 사라진다(상대적 의인). 예수께서는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보도록 가르치셨다. 내 눈에 들보가 있는 것을 아는 방법은 타인의 티가 보일 때이다. 타인의 티가 내 눈에 들보가 있다. 그 들보를 뺀 뒤에 타인을 비판해 보자.

2.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6절). 여기까지가 6장에서 시작한 내용을 종결하는 것 같다. 선인(善人)이 착함을 행할 때 무조건 행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선을 행함에서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행해야 선이 된다. 선을 행하는 목적이 악한 결과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것이 지혜의 일부이다. 우리는 의지와 능력 그리고 결과의 일치를 추구한다.

3. [마 7:7-12] ASK, Ask, Seek, Nock, ‘77 원리’라고 필자는 정의한다. 마 7:7은 매우 적극적인 명령이다. 말씀을 보면서 필자는 “순수 학문은 반드시 주의 복음에 도달한다”고 생각했다. 에타 린네만은 기독 지성인에게 성경 본문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의 선행을 요구했다.

구(求)함의 원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선하심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마태는 하나님의 겸양을 계시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악인을 비교하는 것이다. 의심하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으로 구하는 것이다.

구함의 목적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12절)이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 마 7:7과 마 7:12절은 잘 연결되는 문맥이 아니어서, 많은 해석을 양산시킨다. 어떤 사람은 “배워서 남 주자”는 표어를 만들기도 했다. “구해서 남 주자”, 구함의 목적을 자기 욕심을 따르지 말자(약 1:5-8). 그래서 필자는 열심히 자기 욕심을 위해서 구해보자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결국 마 7:12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자신을 위한 그리스도인은 없다. 그럼에도 어린 그리스도인들은 옛모습이 많아 계시 진리와 자기 지식이 상충될 때 머뭇거리기 쉽다. 그 때 힘을 내어 선하신 아버지께 구하도록 훈련시킨다.

4. [마 7:13-14] 좁은문으로 가라. 좁은문으로 들어가면 좁은길을 가게 된다. 좁은길은 문에서 결정된다. 마 7:7의 ASK는 결국 좁은문으로 들어가고, 좁은길을 걷는 사람이 되도록 한다. 좁은문은 사람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다.

5. [마 7:15-27] 마태복음 산상수훈의 마지막은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것이다(15절). 선지자(선생)에게는 열매가 있다. 열매를 보아서 선지자를 구별하라. 선지자 노릇을 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18절). 그들은 가인처럼 자기 행적을 하나님께 늘어놓는다. 바리새인처럼 사람을 의식하여 행동한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았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선언하신다. 그것은 좁은문(양의문)으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참고 요한 10:7-21).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집을 짓는데,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고 하셨다. 반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집이 홍수에 무너지면 반석 위에 짓는 것이 아니다. 반석 위에 짓지 않은 집은 무너질 집이기 때문에 집이 아니라 쓰레기다. 천국의 주인께서 쓰레기 반입을 허용하지 않으신다. 상식적으로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영은 육이 아니기 때문에, 헛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경우가 많다.

6. 예수의 산상수훈을 들은 사람들은 그 가르침의 권위에 놀랐다(마 7:28-29). 놀란 이유는 들어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레미아스는 예수의 가르침은 1세기 유대인들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고 제언했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도 예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했다. 하물며 제자들도 반복해서 집중하여 가르쳤지만 알지 못했다.

예수는 율법의 저자이기 때문에, 율법의 수종자인 모세의 가르침과 비교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율법을 어그러뜨린 서기관과 더욱 견줄 수 없다. 예수의 가르침을 육신으로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1세기나 21세기 지금에도 동일하다. 우리가 주전 15세기 홍해의 현장에서 기적을 목격했어도, 1세기 산상수훈을 들으며 주와 함께 음식을 먹어도 육신으로는 절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오직 성령의 감동과 감화가 있어야 계시의 말씀을 이해하고 소유할 수 있다.

7. 전능하신 하나님, 주께서 주신 선물인 ‘눈’으로 범죄하지 않게 하옵소서. 심령으로 ASK 함으로 좁은길에서 주의문에 이르게 하옵소서. 그 문에서 주의 온유한 음성을 사모하나이다. 이 시대에 무너질 집을 짓는 거짓선지자들의 획책에서 주의 양들을 지켜주시옵소서. 그 일에 미약한 종을 사용하시어 주의 어린양들과 함께 주의 문으로 가게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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