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이머징 교회

21세기의 여명과 함께 수면으로 부상한 이머징 교회(emerging church) 운동이 여전히 확산일로에 있다. 문화는 변화하는 것이므로 교회도 그에 따른 변화를 보여야 한다는 주장은 언뜻 보기에 이상할 것이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이 1950대부터 시작되었지만 교회는 그에 상응한 변화를 이루지 못했다. 기본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은 이성보다는 감정, 객관보다는 주관, 종교보다는 영성, 단어보다는 이미지, 내면보다는 외면, 사실보다는 느낌을 중시하는 경험 체계다. 70년에 가까운 사상이지만 아직도 새롭게 들리는 것은 교회들이 이러한 문화의 흐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이 사상은 기독교의 진리 체계를 뿌리부터 뒤흔든다. 이성보다 감정을 중시하면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 되고 문제들에 대해 모든 가능성을 허락함으로 기독교의 절대적 진리를 파괴해버린다. 절대적 진리의 근원인 성경은 부정되고 개인의 경험에 따라 진리가 정의되므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무시된다. 종교와 영성에 다원론적 접근을 허용하여 근본적으로 기독교를 해체하여 재구성하려는 파격적 운동이다. “이머전트 빌리지”를 이끄는 프린스턴 출신의 토니 존스(Tony Jones)는 대표적인 이머징 교회 운동가로서 전 세계를 다니면서 활동한다.

이교와 신비주의의 몸통에 입혀진 ‘기독교’라는 옷

이머전트 교회가 신학적인 변화에 중점을 둔다면 이머징 교회는 교회론과 선교적인 측면에 관심을 겨눈다. 이머징 교회에서 행하는 관상 기도가 버젓이 교회 안에서 유행하는 현실은 우려를 자아낸다. 건물을 중시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기본자세는 옳다. 그리스도를 따름의 구체화에 들어가서 그것이 믿음보다 믿음의 실천인 구제와 섬김에 집중됨은 둘의 균형을 잃어 편향적이다. 로마서를 제치고 야고보서를 중시한 또 다른 극단의 오류다. 이머징 교회를 경계하는 목소리와 함께 이머징 교회를 옹호하는 세력들의 논전이 기존의 정통과 이단 시비를 보는 듯해서 편치 않다.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선교적 삶을 강조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전에 모여서 선교적 가치를 실행할 영적 힘을 키울 여지를 남겨두지 않아 그들의 선교가 의미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그들이 추구하는 영성이 성경에서 의미하는 영성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매우 위험하다. 각종 이교와 신비주의로 조합된 몸통에다 기독교의 옷만 걸친 괴이한 모습이다. 특히 관상기도는 용어에서부터 풍기는 이질적 분위기가 마땅치 않고 가톨릭을 비롯하여 타 종교의 영성 수련과 유사해서 정통적 기도 신학에 정면으로 부딪힌다. 교회가 상실한 수도원의 영성 전통은 회복해야겠지만 신중해야 할 일이다.

전통적 예배에 싫증난 사람들이 추구하는 신비

서구 기독교의 모더니즘 영향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운동이기에 현대교회는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이머징 교회는 완고한 교리 논쟁이나 교회 성장을 거부한다. 그들은 고대의 신앙 의식들을 초감각적 미디어와 하이테크 시각 효과로 결합시킨다. 음악은 시끄럽고 명상은 고요하며 시와 향이 교회 공간을 채운다. 십자가 장식과 스테인드글라스 대신 고대의 켈트 십자가와 교회 내부를 예술적으로 장식하며 전통적 의자 대신 소파를 즐긴다. 성찬과 성경 읽기를 중시하며 육체의 건강을 위한 요가와 마사지도 제공한다. 고대의 영성과 현대의 비영성적인 것들을 혼합시켜 전통 예배에 싫증내면서도 뭔가 신성한 것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을 겨냥한다.

그들은 신자보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더 많이 둔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외면하고 새롭게 재해석한다. 웨슬리의 “교회 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처럼 이머전트 교회는 이머징 교회 안에 있다. 복음의 마케팅을 부정하고 분열을 비난하며 변질된 기독교를 혐오하는 저항 운동으로서의 이머징 교회는 사라져야 하되 교회를 교회다움의 본질로 회귀시키도록 도전한다.

일상과 변질된 영성이 조합된 예배

에큐메니즘은 타 종교인들과의 대화를 출발로 다양한 종족들과의 교류를 시도하며 다양성 속의 단일성이라는 구호 아래 궁극적으로는 종교통합을 추구한다. 이머징 교회는 그들이 함께 모여 절대자에게 예배하는 행위에 강조를 두기에 에큐메니칼적이다. 기독교의 우월성을 고집하지 않고 타 종교에 대해 완고한 자세를 포기한다. 교회 일치를 표방하는 에큐메니즘의 타협정신은 타 종교로 개종하는 것을 종교적 배도라 규정할 수 없게 만들고 성경도 진리의 유일한 체계로 우뚝 서지 못하고 물속에 잠겨버린다. 신자들의 신앙과 삶의 괴리에 분노한 일반인들을 달래고자 만든 대안적 교회라 볼 수 있다.

그들은 일상과 영성의 절묘한 조합을 시도한다. 영성의 가시적 표현인 예배에 고대와 현재를 뒤섞고 자유로운 대화와 토론의 장으로서 교회는 언제든지 들를 만한 곳이다. 이머징 교회는 교회의 변질을 성토함으로 기성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해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로 하여금 진지하게 문제의식을 붙들고 고민하게 한 공로가 있다. 빈자와 소외 계층을 돌보는 일에 주안점을 두고 지구의 생태계와 환경 문제도 중시한다. 따끔한 깨우침이지만 여전히 거짓되다.

복음을 부인하는 배도자의 영이 깃든 교회

주님은 종말 강화에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을 예언하셨다.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소환하여 자신이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교회에 침투해 양떼를 노략할 것임을 경고했다. 주님의 재림 직전에 배도의 범람을 우려했던 바울은 바른 복음을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갈라디아교회의 배도자들로 인해 마음 상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종말의 때에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가려운 귀를 긁어주고 자신들의 욕심을 부추겨줄 거짓 스승을 많이 두며 진리보다 허탄한 이야기를 좇게 될 것을 강력히 경고했다.

베드로 역시 백성들 중에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이 있을 것을 언급했다. 배도의 영에 조종당하는 거짓 선생들은 교회 안에 몰래 침투하여 교회를 더럽히는데 가장 추악한 짓이 유일하신 하나님인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가르침이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거부하고 다른 통로를 열어놓은 모든 교리는 사탄적이다. 신사도들은 거짓 사도들이며 사도를 참칭한 거짓의 역군이다.

유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훔친 교회

이머징 교회는 유랑하는 교회다. 자신들의 신앙을 키우고 안주했던 신앙 공동체가 세상의 급진적인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함으로 신자들은 일반인들에 비해 세상에서 뒤쳐지는 그룹이 되었다. 교회가 하늘에 속한 끝없는 논쟁에 열을 올릴 때 고단한 삶에 지친 사람들은 아무 위로도 받지 못하고 반복적인 종교축제를 감상해야만 했다. 떠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교회는 사람들의 영혼을 가두는 감옥으로 변해버렸다. 현대교회의 상황은 영적으로 바벨론 포로기와 유사하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지만 기대감은 갈수록 희미해진다. 일상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지 못하고 신학적 담론이나 성경이야기의 되풀이에 식상해버렸다.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한 마디도 듣지 못하며 자란 이 시대의 영혼들은 말씀에 굶주린 노숙자 신세가 되어버렸다. 바벨론 강변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슬픔의 노래를 불러야 했던 유대의 포로들처럼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둔 교회의 감옥을 부수고 탈출을 시도했다. 그것이 이머징 교회다. 그들은 관계에 굶주려 인격적 관계를 강조하고 소외당하고 외로웠기에 참여와 공동체와 네트워킹을 굳게 붙든다. 교회가 추구하던 가치관이어서 부끄럽다.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에 유랑했던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 자체가 하나의 교회였다. 현대교회의 실제 상황이 애굽의 종살이에 버금간다면 이는 재앙이다. 교회가 세상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물과 한숨을 보시고 구원자 모세를 통해 출애굽을 단행케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이머징 교회에게 그런 역사적 고민이 담겨있다면 새로운 교회 형태가 위험해보이긴 해도 교회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신비적 제의가 강조되면 복음의 진리는 사라져

C목사의 DI공동체는 이머징 교회와 비슷한 점을 지녔기에 우려스럽다. “우주선”이라 불린 기도원에서 “북극성”으로 호칭된 C목사의 강의와 참석자들의 반응이 기괴스러웠다. 가톨릭, 고대 밀의종교, 각종 신비제의가 짬뽕된 영성 수련회는 비기독교적일 뿐 아니라 반기독교적이다. 가난한 자의 대변인이었던 그가 새롭게 출현한 이머징 교회의 대부가 되었다는 평판을 듣는 것 자체가 곤혹스럽다. 혼합주의적 성향을 보인 다일(DI)공동체보다 C목사가 미혹의 영에 사로잡혀 인형극의 인형처럼 움직임이 서글프고 그를 깨우치지 않는 동료들에게 심한 분노를 느낀다. 다일(DI)공동체의 선행이 칠천오백만 겨레와 아시아의 빈자들을 감동시켜도 진리에서 벗어나면 아무 유익이 없다. C목사가 성경의 바른 진리로 급선회하기를 바란다. 그의 선한 인상에 필자의 마음이 아프다.

이머징 교회가 교회 갱신의 한 지류로서 새로운 시도 중에 있기에 그 흐름에 교회 공동체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신본주의적 성격이 강한 교회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이머징 교회는 분명히 인본주의적이다. 이미 있어온 미국을 비롯한 구미의 선진 시장과는 구별되면서 위협이 될 수도 있는 한국이나 중국 같은 신흥 시장을 가리켜 이머징 마켓이라 부르듯, 이머징 교회는 이미 안정세를 구축한 교회 세력을 갈아엎거나 대등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기에 주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영적 체험을 강조하고 예배의 전형적 틀을 깨면서도 여러 장식이나 조형물들을 사용하는 특징들은 너무 이질적인 것들의 조합이어서 무엇이라 단정하기엔 아직 이르다.

개혁은 걸치는 것이 아닌 벗는 것

서구 교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확대해가면서 빠른 속도로 퍼져가는 이 운동의 끝이 어디까지 이를지 아무도 모른다. 이미 한국에도 이런 교회 현상에 대한 찬반 논란이 뜨겁다. 변화를 위한 몸부림이라면 어느 정도 격정의 시간이 지나면 안정세로 돌아설 것이다. 교회 개혁의 과정에서 형성된 운동이라면 개혁 정신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관망하며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가는 소재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아예 비성경적 운동이라 단죄하는 세력과 시대에 적합한 운동이라 긍정하는 극단적 평가를 사이에 두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경적 교회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의 교회가 직면한 위기 상황을 직시하면서 한국 교회의 현주소를 냉정하게 확인하고 화장기 없는 맨 얼굴로 현안들을 마주 대해야 한다. 결국 개혁은 뭔가 새로운 것을 계속 덧입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걸치지 않는 에덴의 나신(裸身) 상태에 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 개혁을 위한 필자의 작은 변(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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