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욱 목사의 인문학 산책 (10)

 

이상욱 목사│목민교회(인천) 담임, 호서대학교( Ph.D),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인문학은 인간학이다

최초의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배웠을까? 그리스를 거쳐 로마 시기에 정착된 <7 자유학과(自由七科: seven liberal arts)>나 중국 주나라의 <육예(六藝)>와 같이 지배층으로서의 교양이 학교 교육의 중요 내용이었다. Liberal Arts(자유학과自由七科)는 현대에는 전문적인 기술교육과 구별되는 순수한 학문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며 교양과목이다. 여기서 고대의 기술과 학문에 관한 정의는 현대와 차이가 있는 미학이나 역사의 분야에서는 학문의 특정한 영역을 나타내며 고대 그리스와 중세에 이르는 시기에는 작문, 논리학, 수사학, 산수, 기하학, 음악, 천문학의 7가지 영역을 학문으로 지칭했었다. 주나라에서 6예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이며, 이는 각각 예학(예의범절), 악학(음악), 궁시(활쏘기), 마술(馬術:말타기 또는 마차몰기), 서예(붓글씨), 산학(수학)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학교가 나타나게 된 것은 산업혁명 이후의 일이다. 산업혁명에 따라 노동자 자녀들에 대한 직업교육이 필요해지고, 이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근대 공교육 체제이다. 근대 공교육 체계의 최대 관심은 어떻게 하면 적은 비용으로 많은 아이를 가르칠 것인가에 있었다. 같은 연령층의 아이들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어 직업교육을 하는 이른바 ‘단식 학급’은 이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인문학은 영어로 "humanities"라고 쓴다. "human"에서 알 수 있듯이 인문학은 인간학이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바로 참다운 인간이 되기 위함이다. 그럼 human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잠시 과거로 들어가야 한다. 헬레니즘 시대라는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세계를 정복한 이후 그리스의 생활방식과 문화가 오리엔트 전역에 전파되어 형성된 시기이다. 그리스와 로마 사이의 시기이다. 그 당시 그리스와 로마는 민주주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투표를 할 때 차이점이 있었다. 그리스는 외국인이 투표를 못 했지만, 로마는 가능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는 도시국가였고 로마는 세계국가였으니까. 로마를 세계평등주의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두 나라 모두 여자와 노예는 투표를 못했다. 당시에는 노예를 인간이라고 생각을 안 했기 때문이다.

 

인문학 없는 노예, 인문학을 붙잡은 전문가

human의 반대말은 당시에는 노예였다. 그때는 노예를 영어로 slave(종)가 아닌 expert(전문가)라고 했다. 요즘은 전문가로 쓰이는 말이 당시는 노예였다. 물론 지금 전문가는 좋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전문가는 흔히 "한 가지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 통한다. 당시 노예 역시 한 가지 일, 노동에 특화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노를 젓는다거나 짐을 나르는 일 등이다. 반면에 인간은 문학, 예술, 철학, 정치, 경제, 역사, 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인간은 노예를 한 가지밖에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어느 특정 학문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골고루, 다양한 학문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제대로 인문학을 하는 길이라 여긴 것이다.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expert는 "수단"일 수 있고 human은 "목적"이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돼야 하지만 인문학을 버려서는 안 된다. 인문학을 모르는 존재는 단지 자동차로 말하면 하나의 부품에 불과하고 사회에서는 노예일 뿐이다. 이 사실에는 사회에서 인정하는 의사나 변호사, 예술과 같은 전문직이나 그렇지 못한 전문직이나 노예인 것은 차이가 없다. 현대 사회에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인간이 사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인문학을 하면서도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human"과 "expert"가 반대말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인문학은 정치·경제·사회·역사·철학·문학 등 인류 문화에 관한 정신과학의 총칭이며, 인문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인문주의(휴머니즘)는 인간의 존엄성 회복과 인간성 옹호를 기치로 내건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학은 인간본질을 규명하는 ‘인간탐구의 학(學)’이다. 칸트는 철학을 인간학이라 했고, 막심 고리키도 문학을 인간학이라고 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나 사마천의 [사기]는 인간의 흥망성쇠와 인간 본성의 파노라마를 여실히 보여준다. 인문학의 핵심인문·사·철이 모두 이러할진대 인문학은 인간학이라고 정의해야 마땅하다.

 

인문학이 터부시 되는 한국교회

한국 기독교 사회와 교계 안에는 암묵적으로 ‘인간적’이라는 말을 터부시해왔다. 그래서 목회자들의 설교나 가르침에서 ‘인간적’이라는 단어는 금기시되어 왔다. ‘인간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왠지 신앙이 없어 보이거나, 세속적으로 비치는 것 같이 이해되어 왔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삶에 있어서 성도들 앞에서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성도들 또한 목회자들의 인간적인 면들을 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오히려 목회자들에게 어떤 신적인 모습을 기대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문학이나 예술, 영화, 소설 등을 설교에 인용하면 많은 경우 성도들은 그러한 설교는 ‘인간적인 설교’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심하게는 다른 종교의 경전을 인용하여 결론을 맺으면 그 설교는 ‘인간적’을 넘어 ‘이단적’이라고 까지 비판된다. 이처럼 한국 기독교와 교회 안에 ‘인간성’, 혹은 ‘인간적인 말’을 극도로 터부시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목사의 딸』을 쓴 고 박윤선 목사 딸의 이야기는 사뭇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작가 박혜란 씨는 한국교회가 존경하는 박윤선 목사의 딸이요, 그 역시 목사다. ‘목사의 딸’은 그가 자기 아버지를 폄훼하려고 쓴 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밝히듯이, 한국교회가 아버지를 우상처럼 떠받들고 있는 것이 오히려 한국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고, 아버지가 외쳐댔던 ‘신본주의’가 얼마나 위선 덩어리인지를 밝혀 기독교의 참다운 복음을 제시하고자 쓴 책이다. 그는 한국교회의 그림자를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밝힌다.

“나는 아버지 박윤선 목사의 진실과 가족의 이야기를 사실대로 기록해, 아버지를 우상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이 아버지를 판단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가장 적게는 나를 비롯해 많게는 수많은 교회와 교인에게 영향을 끼친 아버지는 과연 어떤 분이었는가? 일단 그분은 태생적인 신앙의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의 약점은 한국에서 보수적인 교회나 칼빈주의 또는 복음주의 성향을 지닌 교회가 갖는 약점이기도 하다. 이들 교회를 배경으로 목회하는 사람들은 아버지를 선두로 ‘신본주의’와 ‘성경주의’를 주창했고, 인본주의를 들러리로 세워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결사적으로 하나님만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이것은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불러왔고, 동시에 목회자들의 권위도 크게 강화시켰다. 목회자들은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회의 성장을 추구했다. 심지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과 자신의 권위를 공고화하는 것을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자랑하는 대형교회들의 문제점은, 목회자가 마치 황제처럼 군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의 대형화 현상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추락을 부추기는 장애물인 셈이다. 목회자가 자신의 영향력이 확장되는 것을 보면서 두려워하지 않거나 무감각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는, 최근에 물의를 일으킨 몇몇 대형교회 사건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상식에 벗어나고 세상과 소통 없는 신앙

교회 안에서 자란 목회자들은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 마치 신앙이 좋은 것으로 치부하는 때도 있다. 상식이란 모든 사람이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인정하는 보편성을 기준으로 한다. 즉 인간이라면 대다수가 인정하는 지식이나 윤리, 사회규범 등 보편적인 판단력이나 사리 분별이다. 그런데 유독 이러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집단이 바로 종교인, 그중에서도 목회자 그룹이라고 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 속에서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보편적인 지식이나 교양, 가치 체계와 소통할 수 없다는 뜻이며, 나아가서는 사회에 배타적이고 대립하는 모습으로 귀결된다.

‘신 중심’ ‘신본주의’를 외치는 자들일수록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보편적인 상식을 무시하고 자기 독단과 편협함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다. 극단적일 때 안수, 안찰이라는 신앙 행위를 통해 사람을 죽이게 하는 경우까지 매스컴 보도를 통해 접하기도 한다. 한국교회는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 미신이 판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인터넷에 떠도는 설교를 보면 버젓이 김XX 목사는 “십일조를 안 하면 암에 걸린다”라고 까지 설교한다. 이렇게 강요된 헌금은 드린 자나 받는 자를 피폐하게 할 뿐이다. “일본과 네팔이 지진이 난 것은 우상을 많이 섬기는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성도들에게서 무력함을 느낀다. 극단적인 신앙 주의에 빠지면 맹목적으로 되어 상식이 마비되고, 인간의 합리성과 비판적 이성은 신앙에 반하는 행위로 간주한다.

 

신앙의 근거는 지식이지 경건한 무지가 아냐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신앙의 근거는 지식(Knowledge)이지 경건한 무지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소위 겸손한 태도를 보인 무지를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신앙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요 17:3)이지, 교회에 대한 존경이 아니다. 그들 교회가 ‘맹신’이란 것으로 어떤 미로를 만들어 냈는가를 우리는 안다. 무엇이든지 -가장 무서운 오류까지도- “교회”라는 딱지를 붙여서 속여 넘기면, 무지한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신령한 것으로 받든다. 이런 경솔한 맹신이 파멸 일보 직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변명하며, “이것이 교회에 대한 신앙이다”라는 조건만 붙으면, 무엇이든지 확실한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자기들이 가진 오류를 진리인 것처럼, 암흑을 광명인 것처럼 무지를 바른 지식인 것처럼 착각한다. (칼빈, ‘기독교 강요-중’, 19)

기독교 신앙을 신과 인간의 대립, 교회와 사회의 분리라는 틀로 바라보는 ‘신앙 제일주의’는 바른 신앙일 수 없다. 인문학은 신과 인간이 함께 가고, 교회와 사회는 소통해야 하며, 바른 신앙은 상식이 통하고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중세의 안셀무스는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지도자들은 특별히 더욱 성서를 해석하고 기독교 신앙을 전수하면서 인문학적 소양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인문학과 신학의 절묘한 만남

목회자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들은 성서를 해석하고 신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자신들의 인문학적 소양의 확대를 통해 다양한 지평을 경험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사실 성서 자체도 인문학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성서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보다 인간 자체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인문학적 성서 읽기를 통해 인간을 발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발견하는 길이고 성서의 핵심 메시지인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와 인간구원이 무엇을 의미하고, 하나님이 창조 시에 기대했던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인문학적 접근과 독서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훨씬 더 넓어지게 하고, 성서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깊게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실제 경제학과 사회학에 관한 독서는 경제와 신학이 얼마나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경제문제와 사회문제가 신학과 신앙의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음을 배울 수 있다. 실제 사회, 경제학 책 읽기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뒷면에 자리 잡은 인간 탐욕의 정체에 대해서 깊이 있는 깨달음을 갖게 한다. 사실 인간의 탐욕의 문제는 신학적 주제인 인간의 욕심과 죄라는 신학적 주제와 맞물려 있고 최근 한국사회에서 쟁점이 되는 ‘정치문제’가 결국 탐욕과 경제문제가 신앙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해 준다.

인문학적 사고가 없는 신앙과 신학은 질문 없는 학문과 같다. 질문이 없는 학생은 단지 로버트 인간에 불과하다. 단지 머리만을 변화시키거나, 가슴만을 뜨겁게 하는 데에서 그칠 수밖에 없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해 탐구하고 알아가는 학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에게 있다. 인문학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관계에 대한 이해와 인간에 관한 탐구이다. 다시 말해 인문학은 인간학이다. 그러므로 인문학적 이해가 없는 신앙과 신학은 이 세상에 대한 깊이 있고 균형 잡힌 이해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인문학에 눈을 뜨고 인문학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기독교 강요 첫 권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 인간을 발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발견하는 길이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야말로 인간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바로 인간학이라면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공부다. 이 두 학문의 절묘한 만남이 필요하다. 이 만남이 이뤄질 때 목회자는 교인들의 삶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하고 비로소 세상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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