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hanasius contra mundum. 아타나시우스는 네 명의 황제(Constantine, Constantius II, Julian the Apostate and Valens)와 격돌하면서 니케야 공회의 문서의 정통성을 확보했다. 나지안주스 그레고리우스는 “산 자들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청지기”라고 찬사하며, “아타나시우스를 예찬하는 것은 덕 그 자체를 예찬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덕을 온전히 지닌 분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김소일, <사막으로 간 대주교>, 19). 아타나시우스(Greek, immortal)는 4세기 교부 중의 교부이다. 그것은 니케야 공회의의 결정을 한 몸으로 막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니케야 공회의를 정통 신조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타나시우스의 사역 때문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이방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298년),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인(Alexander Ⅰ of Alexandria, 250-328, 312년 취임) 알렉산더에게 발탁되어, 그의 아래에서 수학하며 사역했다. 교회사가 소크라테스나 루피누스는 아타나시우스가 세례 놀이를 하는 광경을 보면서 알렉산더가 발탁했다고 한다(김소일, 25). 약 14세에 알렉산더 문하에 들어갔고, 20세에 첫 작품인 <하나님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De incarnatione verbi Dei>를 출판했다. 319년에 집사(deacon)으로 알렉산더를 보좌했고, 그 해에 알렉산드리아 12 교구 중 바우칼리스(Baucalis) 교구의 장로인 아리우스(225-336)와 논쟁이 발발했다. 아리우스는 사벨리안의 양태론을 배격하면서 과격한 단일신론자가 되었다(최덕성, <위대한 이단자들>, 67).

아리우스의 반격에 알렉산더의 응전으로 논쟁은 시작되었고, 아타나시우스는 그 중간에 서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알렉산더는 320년에 총회(Synod)를 개최해서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이에 아리우스는 니코메디아의 감독 유세비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제국의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당시 아리우스는 가이샤라의 감독 유세비우스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황제는 325년 니케야에 제국 전체 교회 회의(공교회의 회의)를 개최했다. 27세의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더를 보좌해서 회의에 참석했다. 간혹 아타나시우스가 니케야 회의를 주도했다고 하지만 보좌의 위치로 참석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최덕성, 71).

알렉산더가 328년에 임종하면서, 자기계승자로 아타나시우스를 지목했다. 30세의 나이에 로마 제국 최대 교구인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교구장이 되었지만, 아리우스 파의 격렬한 반대로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것은 어린 나이도 있었겠지만, 니케야 공회의의 결정을 수정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아리우스의 가장 큰 조력자인 유세비우스는 황제의 도움을 받아 안디옥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아리우스 복권을 결의했다. 거기에 참석한 중도파들은 포용, 화평을 주장하면서 동조했는데,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만 거부했다. 결국 알렉산더의 뒤를 이는 아타나시우스는 정치적으로 공격을 받았는데, 그것은 곧 진리를 왜곡하는 신학 공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까지 아리우스를 옹호하면서 사면과 복권을 선언했고, 아리우스는 복권을 받으려고 의기양양했지만 복권현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리우스가 죽었지만, 아리우스파의 격렬한 공격은 식지 않았다. 니코메디아의 감독 유세비우스가 주도하며 아타나시우스를 공격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은 뒤, 유세비우스의 지도를 받은 콘스탄티누스 2세가 즉위하여 아타나시우스를 해임하고 추방시켰다. 아타나시우스는 로마로 가서 교황 율리오 1세의 열열한 지지와 지원받아 다시 서로마 황제와 관계하며 알렉산드리아로 복귀했다. 서로마 황제가 죽자 동로마 황제는 335년 군대를 파견해서 교회를 유혈 진압했고, 아타나시우스는 이집트 사막으로 피신하여 6년 동안 생활했다. 황제가 죽자 알렉산드리아로 귀환했는데, 율리아누스도 아타나시우스를 추방했다. 율리아누스가 전사하고, 그 뒤를 이는 발렌스 황제도 364년 아타나시우스를 추방했다.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황제를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키자, 어쩔 수 없이 아타나시오를 366년에 약 4개월 만에 다시 복권시켰다. 그 후 아타나시오는 373년 5월2일 78세까지 알렉산드리아에서 사역했다. 아타나시우스는 15년 10개월을 유배와 도피 생활을 했고, 7년을 알렉산드리아 대주교로 사역하며 임종했다.

359-360년 도피한 아타나시우스에게 트무이스(Thmuis)의 감독 세라피온(Serapion)과 네 차례 서신 교환을 했는데, 세 번째 편지에서 성령에 관한 내용을 심도있게 다루었다(참고, 김용준, <아타나시우스 성령론>). 아타나시우스는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367년 아타나시우스는 신약성경 정경 범위와 목록을 제안했고, 397년 카르타고 공회의에서 신약성경 27권을 확정했다.

아타나시우스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진수는 “인간 역사 안에 사람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의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였다(최덕성). 그런 아타나시우스는 동료들에게 심각한 공격을 받았지만,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아타나시우스를 끝까지 지지했다. 결국 아타나시우스 사후(死後)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의 결정을 통해서 논쟁은 종료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교회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을 때에는 교회의 걸림돌로 평가받았다. 모든 선지자는 그랬다. 사역에서 영예를 받는 선지자는 거의 없다. 사역자에게 이 땅에서 영광은 없고 오직 십자가뿐이다. 그 길을 아타나시우스가 갔고, 모든 경건한 교회 사역자들이 갔고, 가고 있고 또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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