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i, 1821-81)는 19세기 러시아 소설가로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대문호입니다. 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을 섭렵하고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책을 쓴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의 책이 최근 번역 발간되었습니다.(도스토예프스키, 포이에마, 2018. 10) 투르나이젠은 스위스 신학자요 목회자이며, 칼 바르트와 함께 변증법적인 신학을 발전시킨 인물입니다.

그가 쓴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책은 20세기 신학을 대표하는 칼 바르트의 “로마서”가 쓰이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정교회 신자인 도스토예프스키가 개혁주의 목회자 투르나이젠을 통해 현대 개신교학에 파문을 일으킨 것입니다.

바르트와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 중에서 특히 “인간의 죄와 용서의 은혜”의 대립이 자아내는 긴장에 집중했고, 이는 그들의 설교와 저작뿐만 아니라 변증법적 신학 전체에 있어서도 핵심주제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고 “죄와 속죄”의 대립구도를 발견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이들은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과 “인간을 용서하는 하나님의 은혜” 둘 중 하나를 택하며 대립을 해소하기 보다는, 둘 사이의 긴장을 포착하여 “변증법적 방식”을 배웠습니다. 이들은 죄인과 은혜의 하나님 사이의 대립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을 가지고 인간이 처한 상황을 분석했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본 죄와 은혜의 대립구도는 성경의 원리와 배치됩니다. 성경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 5:20)고 합니다. 그 극치가 은혜의 실체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악 세상에 죄인들과 똑같은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와 연합해 주셨습니다.

좌와 은혜는 대립구도가 아닙니다. 은혜는 죄를 담당하고 덮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칼 바르트는 영원(예수 그리스도)이 시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계시는 일반적인 역사 바깥에 있는 비언어적이고 직접적인 신의 현현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참된 말씀으로 보는 역사적 개혁교리에 반한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증거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피 흘려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으로 우리 인생 모든 문제가 처리되고 해답을 얻습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의 피의 복음으로 깊이 뿌리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이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의 피의 복음으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엡 1:10) 하나님의 뜻입니다. 죄는 간접적인 선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 죄가 종속되고, 다스려지고, 정복되어 하나님의 위대하심, 능력, 공의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죄와 은혜의 변증법적 구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임덕규 목사(중계동 충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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