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마이너스 성장과 대형교회 불패시대

미국에서의 한 연구 논문에 의하면 대형교회 하나가 세워지면 인근에 있는 200개 교회가 사라지며 신자 수도 8%의 이탈 현상을 보인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어 씁쓸했던 적이 있다. 대형교회는 몸집 불리기에 헌신적이고 열정적이다. 교회 건축에 천억 단위를 돌파한지는 벌써 옛말이다. 200명 미만의 소형교회 중에서 80%가 미자립이라는 조국교회의 통계가 놀랍다.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와중에도 이른바 대형교회 전성시대다. ‘대형교회, 망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불패 신화가 교회의 정수리를 겨누고 있음을 모르니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했다. 대형교회 해체 발언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목회자의 미래 목회가 사뭇 기대된다.

매년 수많은 목회자들이 배출되지만 사역지를 찾지 못한 대부분의 목사들은 별 수 없이 개척의 길을 걷는다. 실제로 많은 교회가 개척하지만 수년 내에 상당수가 미자립 교회가 되어 그런 상태로 고착되어버림은 우려스러운 현실이다. 도시는 도시대로, 농어촌은 농어촌대로 개척이 예전 같지 않다. 해결의 실마리도 없다. 대형교회가 분립 개척을 통해 목회 초보자들에게 길을 터주지 않는 한 이런 현상은 계속 누적될 것이다. 한국에는 이마트 교회가 유행이란 얘기를 듣고 쓴 웃음을 지었던 적도 있다. 분립 개척과 역행하는 문어발식 분점 형태의 교회는 대형교회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그곳 출신의 목회자를 세운다. 이는 교회왕국이다. 반드시 망할 조짐이다.

자본주의를 닮아가는 교회의 양극화

교회의 양극화 현상은 세상의 경제 현상을 닮았다. 부익부 빈익빈은 교계에서도 통하는 현실이다. 부자 교회와 가난한 교회 사이에서 허리 역할의 중형교회가 감소 추세다. 경제의 허리인 중산층이 무너지면 경제의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절대 다수인 빈자의 숨통이 막힌다. 교회와 교회 간에 양극화 해소를 위한 실천적 나눔이 실행되지 않는데 세상을 향해 외칠 사랑의 메시지가 있겠는가? 국내의 가난한 교회들을 부자 교회가 돌보는 것은 성경적으로 보아도 바른 일이다. 나눔은 실제여야 한다. 지갑을 열고 은행 잔고를 정리해서 동역자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 N목사는 중형급 이상의 목회자들이 소득의 십일조만 모아도 어려운 동역자들의 짐을 어느 정도 나누어질 수 있을 것이라 말했는데 공감한다. 나눔의 길이란 결코 멀지 않다.

윌로우크릭교회는 32년간 사역의 중심 철학과 여러 프로그램에 대한 수년간의 연구 결과를 <계시: 당신은 어디에?>(Reveal: Where Are You?)란 책에 수록했다(2007). 교회의 핵심 사역자요 공동 저자인 그렉 허킨스와 콜리 파킨슨은 이 책에서 “뭔가 잘못됐다, 우리가 실수했다....... 숫자로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를 만드는 일에는 실패했다”고 결론지었고 빌 하이벨스 목사도 동의했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의 목회자가 고백한 일종의 양심선언은 대형교회의 한계와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해주었다. 탁월한 프로그램과 다양한 영적 활동이 신자들의 영적 성숙을 이끄는 데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이 필요한 것보다 원하는 것을 제공한 결과는 겉치레의 성공과 알맹이뿐인 실패였다는 솔직한 자탄이다.

교회가 대형화 될수록 주님의 입지는 좁아져

하나님은 가정교회를 시작했고 인간은 교회왕국을 세웠다. 하나님은 작은 교회를 심었으나 인간은 대형교회를 건립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권세를 포기했으나 사람은 교회를 키우고자 권세를 붙들었다. 교회가 대형화될수록 주님의 입지는 좁아지고 사탄의 활동 영역은 넓어진다. 대형마트가 구멍가게를 말아먹듯 공룡이 된 대형교회가 스치는 곳에 한을 품고 죽어간 작은 교회의 시신들이 즐비하다. 2016년 종교전문잡지 <Christian World>에 따르면 세계 50대 대형교회 중에 상위 23개가 한국에 있다니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대책이 서지 않는다.

교회가 거대주의의 망령에 붙들리면 나라가 거덜 나는 것은 지난 역사가 준 뼈아픈 교훈이다. 비잔틴제국이 그랬고 러시아정교회가 그랬다. 유럽교회가 그랬고 조국교회가 그 전철을 밟고 있다. 미국은 매년 200만 명씩 신자수가 급격한 감소를 보이고 청교도운동의 본산이었던 영국의 기독교는 이미 1%의 소수 종교로 전락해버렸다. 그 빈 영적 공간에 이슬람 세력들이 무서운 속도로 침투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의 최전선에서 초토화되는 것은 한 때 기독교가 강세였던 나라가 대부분이다. 영적 현실은 초비상시국이다.

독과점과 승자독식의 대형교회

대형교회가 추세인 조국교회의 형편도 비관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매년 3천 개의 소형교회가 폐쇄된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소형교회의 급격한 감소 현상과 중형교회의 약세와 대형교회의 강세는 역 피라미드 형태를 지나 압정(押釘)과 같은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형교회는 흡착력이 있어 주변의 군소교회들을 빨아들이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흡인력이 강화되어 거의 블랙홀 수준이다. 주님의 교회를 문 닫게 하는 것이 대형교회라면 큰 일이 아닌가? 주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님은 자명하다.

교회가 문을 닫으면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이 슬퍼하신다. 결코 이길 수 없던 교회가 자중지란으로 무너지니 음부의 권세가 무력해서 상심이었던 사탄이 크게 기뻐할 일이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대형교회 목회자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 사탄을 기쁘게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소형교회들의 지경까지 침투해서 독과점에 승자 독식의 파렴치한 행위를 자행하는 대형교회의 몰염치와 인면수심을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큰 교회는 커지고 작은 교회는 줄거나 사라지는 사이에 1,200만을 자랑하던 교세가 어느덧 900만, 700만으로 줄었다는 조사 보고니 착잡한 심경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어디까지 갈려나?

왕국을 이어가려는 욕심, 세습

왕조가 아닌 시대에 부자 세습 3대를 이룬 왕조형 국가가 있다. 북한의 공산주의 이념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면서도 세습제를 답습하는 이중성 앞에서 교회가 침묵하는 것은 죄다. 세습은 악습이다. 조국교회에서 세습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 대형교회다. 작은 교회에서는 세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형교회도 세습은 불가능하다. 결국 세습은 1대가 쌓은 왕국을 대를 이어가며 누리려는 욕심의 발로다, 조국교회 세습의 원조는 북의 정치나 남의 교회에 있어 모두 김씨다. 김씨의 세습을 본받아 또 다른 김씨, 이씨A, 이씨B, 최씨, 석씨, 지씨, 그리고 곽씨가 그 뒤를 이었다. 김이김이최석지곽의 8대 세습이 이루어졌다.

약간 시끄럽긴 했어도 세습 작전은 일단 성공적이었다. 그 성공이 복이 될지 화가 될지는 아직 모른다. 땅에서 왕에 버금가는 영광을 누렸으니 천국에서 누릴 것은 없으리라!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 아닌가? 세습의 질긴 고리를 단칼에 베어버려야 한다. 경우야 어떻든 세습을 받아들인 교회도 공범의 죄를 벗기는 힘들다. 베드로는 세습을 유언하지 않았는데 그의 후계자들이 지금까지 266대째 세습하는 교단도 있다. 그들과 결별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세습이라니!

추억은 나눠도 현실과 미래는 나눌 수 없어

대형교회 목회자와 작은 교회 목회자의 심정적 소통은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옛 추억의 단편을 피자 조각처럼 나눠먹으며 소담을 나눌 수 있어도 현실과 미래에 관한 대화는 불통이란 말이 정확하다. 이론과 이상적 추구는 같은 방향이라 하더라도 그려가는 도면 자체가 다르고 접근하는 방식에서 확연한 차이가 난다. 대형교회 목회자는 작은 교회 목회자들이 결코 겪어 보지 않았고 겪을 수 없는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다고 토설한다. 배부른 하소연이다. 그 고민거리라는 것이 과연 작은 교회 목회자들이 사역과 삶의 피 터지는 현장에서 몸부림쳐야 하는 그런 아픔에 비할까?

큰 목회 현장에서 져야 할 짐의 무게와 해결해야 할 문제의 크기를 강변하면서 소자들을 주눅 들게 말라!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고 길거리로 쫓겨나야 하는 상황에서 한 목회자가 지닌 처연함과 목회자다움의 자존감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들의 정체성 혼란과 무력감은 몇 마디의 위로와 몇 푼의 지원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큰 자들과 격의 없이 나눌 수 있는 인간적 소통이며 영적 하나 됨이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먹고 산다. 그런데 이 땅의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상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한다. ‘잡상인 금지’처럼 보이지 않는 팻말을 쳐놓았기 때문이다. 모든 목회자는 작은 교회였을 때의 아픔을 지녔기에 누구보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의 현안 해결에 적극적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웬걸! 개구리는 올챙이 적 일을 까맣게 잊는다.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큰 것을 지향하는 매머드 증후군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외면당한 소자들은 주님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새 시대의 소망 소강교회(小强敎會)

다니엘 벨은 탈산업사회를 예견했고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운위했으며 마이클 프로스트는 기독교왕국으로서의 교회시대의 마감을 설파했다. 바울은 겉사람의 자연적인 후패와 함께 속사람의 강건함을 외쳤는데 교회시대가 막을 내린 다음에 이 땅에 출현할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기독교공동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하나님이 심으신 구속의 씨알로서 처음 배태되던 날의 원형질, 교회가 숱한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도달할 형체는 다름 아닌 ‘작지만 강한’(小强) 교회여야 한다. 크면 반드시 무너진다. 역사상 대제국 중에서 지금껏 현존하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유럽의 대형교회들 중에 숨 쉬고 있는 교회는 없다. 한국, 미국 할 것 없이 이 시대의 소위 대형교회들은 지난 역사가 보여준 참혹했던 추락의 현실을 외면치 말고 반면거울 삼아 교회의 기틀을 바로 잡고 내실을 기하는 일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작은 교회 역시 스스로 자신의 건강한 정체성을 견지하지 못한다면 체질 개선에 나서야 한다.

작은 교회가 실패를 방지하려면 복음 자체가 능력이 되도록 철저한 기본기부터 다져야 한다. 교회가 적대적인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은 다른 요소가 아니라 복음을 삶으로 구현한 사실에 있었다. 안디옥교회의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칭함 받은 것은 조소나 멸시의 뜻이 아니라 칭송과 호감의 의미가 더 강했다. 그들은 기도와 말씀에 철저했으며 자신들이 믿고 전하는 바를 삶으로 실천했다. 작고 강한 교회는 인간적 측면에서는 작아도 영적 측면에서는 강한 교회다. 자신을 버리고 크신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으면 작아도 이긴다. ‘커도 강한’(大强) 교회라면 더할 나위없다. ‘작아서 약한’(小弱) 교회, ‘커도 약한’(大弱) 교회가 대세인 영적 현실에서 소강(小强) 교회들이 약진을 이루어 가기만을 고대하며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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