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방선생 최흥종』, 최장일 고경태 지음, 바일블리더스, 2018. 74 p.~84p.

오방 최흥종 목사는 1919년 삼일운동 당시에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생으로서 광주북문밖교회(현 광주중앙교회)를 개척하던 전도사 신분이었다. 그는 삼일운동 때 광주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 교인 등 광주지역 인사들과 광주지역의 만세 시위를 모의하였다. 그는 마침 고종의 국장(國葬)에 참석키 위해 상경해서 예기치 않게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일경에 체포되어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여기서는 먼저 최흥종이 삼일운동 참여하게 된 그의 역사의식과 영적 인식의 배경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다.  

20세기 초 일제강점기 한국교회는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1911년 ‘105인 사건’을 빌미로 일제국주의의 체계적인 탄압의 첫 희생양이 되었다. 특히 '105인 사건'은 당시 대한민국의 민족의식이 단순한 혈연적 집체의식(集體意識) 수준을 벗어나 ‘목적지향적(目的指向的)인 이념집단(理念集團)’으로 거듭나게 하였다. 105인 사건은 1909년 천주교도인 안중근(安重根)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독립의군부 소속 안중근 소좌에 의해서 저격되자, 이에 놀란 일본제국주의는 이를 기회로 삼아 날로 확산되는 민족운동을 근절시키려 하였다. 따라서 뤼순 재판정에서 1910년 2월 14일에 군사재판을 요구하는 안중근 소좌의 주장을 무시하고 일반재판으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런데 1911년 안중근 의사의 사촌 안명근이 독립자금 모금 사건으로 발각되며 일제는 대규모 탄압을 위한 조작을 진행하였다.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수사 과정에서 1907년 평양부흥운동의 성격을 잘못 파악하였음을 뒤늦게야 인지하였다. 그것은 대한민국 민족운동의 핵심 주축이 한국교회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을 일차적인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던 중 독립자금책 안명근을 체포한 일본총독부는 한일합방 이후 첫 ‘내란음모죄’를 조작하였는데, 그것이 소위 ‘105인 사건’이다. 모두 600명을 체포해서 그 가운데 105인을 기소한 사건이다. 물론 이로 인해 옥고(獄苦)를 치룬 이들 대부분이 한국교회 지도자들 이었다.

그런데 105인 사건이 일제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 전체에 대한 일제의 적의(敵意)가 드러난 셈이다. 이에 일제하 대한민족은 이 수난자들을 보면서, 그들을 민족의 지도 세력으로 여겼다. 즉 기소된 105인을 적극적으로 비폭력적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로 여기며, 또 그들이 민족을 대신하여 희생양적 수난을 당한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105인 사건은 대한민족 전체가 민족의식을 더욱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한국교회는 이 새로운 민족의식을 키우는 모체(母體)로 자리매김하며 급속하게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아울러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이후에 한국교회의 성장은 1909년 안중근 의거(義擧)와 더불어 1911년 105인 사건과 긴밀한 역사적 사회적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한 일련의 역사적 과정은 일제강점기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새로운 민족의식의 원천을 제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확산되는 기독교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은 자연히 새 민족운동의 향도(響導)역을 맡게 되었다. 즉 일제가 조작하여 벌어진 105인 사건은 평양대부흥운동이라는 기름동이에 불씨를 당긴 것이었다.

혹자는 한국의 비폭력적 독립운동이 인도의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간디는 1911년 당시에 남아프리카연방에서 인종차별 반대운동을 하던 때였고, 그의 소문이 한국에 알려지기는커녕 선진 서구 열강에게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을 때였다. 105인 사건의 희생양들과 민족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 평양 장대현교회의 부흥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거나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다. 이 부흥운동이 민족의식 형성에 끼친 새로운 신앙이념 즉 ‘기독교 민족운동 이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이 세계는 절대진리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지으셨다.

② 예수께선 아버지의 사랑을 배반한 인류를 십자가 희생으로 구원하셨다.

③ 인간은 예수를 좇아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경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④ 모든 인간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이 신앙과 도덕적 원리에 따라 심판된다.

⑤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배와 서구열강의 제국주의는 이 심판의 대상이다.

⑥ 한민족은 이 일제와 서구열강의 악을 거부할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⑦ 이 권리와 의무의 이행(履行)은 십자가 희생의 원리를 좇아야 한다.

105인 사건 이후 삼일독립만세 운동을 통해 대한민족은 ‘비폭력적 자유-평화-민주주의 운동을 지향하는 민족’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 하였다. 동시에 일제는 대한민족과 대비(大比)되는 ‘폭력적인 독재-침략-제국주의 국가’로서의 본색을 온 세계에 드러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9년 삼일독립만세 운동이 벌어지는 현장은 한국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이상(理想)을 실현하기 위해 십자가의 희생을 당하는 제단이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일제에게는 가학적(加虐的)인 자신들의 잔혹성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현장이 되었다.

이로 인해 고난당하는 대한민족은 ‘신앙적 희생양’으로서의 영적 권위와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제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처럼 한국인들의 ‘현대적 정체성’은 이렇게 희생의 피를 뿌리며 탄생하였다. 반인류(反人類)적인 일제의 잔혹성과는 달리, 자신을 압제하고 잔해하는 불법 세력을 향해서 고고(呱呱)한 함성으로 한민족은 하늘 가슴에 자신의 새로운 탄생을 신고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평양 부흥운동은 이 새로운 민족의식의 첫 출발점이요, 그것이 삼일운동으로 이어지는 힘의 공급원(供給源)이었다.

아울러 한국의 젊은 세대는 스스로 ‘신앙과 도덕적인 가치를 위한 희생의 별들’을 찾고 바라보며 자랐다. 경술국치 후, 한국의 서민계층 자녀들 가운데에는 교회 종소리를 듣고 선교사들이 건립한 학교를 향해 달리며 자라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산과 들을 넘나들며 생각하는 것은 ‘이 가난과 억압은 왜 온 것일까? 우리 민족의 잘못은 무엇이며,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교회나 학교에서는 ‘왜 일본이 우리를 지배하고 억압하는가?’라고 질문하였다. 또 교회나 학교에선 목사나 교사가 ‘너는 우리 민족의 미래! 너는 하나님께서 뽑은 별!’이라고 말하면서 그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꾀죄죄한 옷에 굶어서 부황난 아이들은 이 사랑과 희생의 이슬을 먹고 자랐다. 그 아이들의 부모는 이에 대한 고마움에 눈물겨워하며 뒤에서 기도하였다.

여기에 삼일운동 저변에 깔린 진정한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드러난다. 대한민족이 일제와의 도덕적인 한판 대결에 단호하게 나선 이유가 무엇인지 드러났다. 그 어린 학생들은 왜 목숨을 걸고 태극기를 그려서 돌리고, 왜 그토록 모진 고문을 받을 각오로 만세를 외쳤을까? 교회나 어린 학생들이 만들어내는 태극기만 보면 온 백성들은 불끈 일어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 삼일 만세운동 당시에 그것은 다만 일제의 끊임없는 학살과 고문과 투옥과 폭력적인 억압, 그리고 협박을 겸한 간사한 회유(懷柔)를 불러들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일어선 그 희생적인 정의감의 불꽃! 도덕적인 열정의 불기둥! 그것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불어 온 바람일까? 그것은 평양 장대현교회 부흥운동 이래 한국교회가 이 민족에게 준 몇 가지 신념, 바로 그것이었다.

연결기사 <삼일운동과 오방 최흥종 목사(2)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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