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 § 10의 제목은 “아버지 하나님(Gott der Vater)”이다. § 10의 테제문장이다. 

 
Der eine Gott offenbart sich nach der Schrift als der Schopfer, d.h. als der Herr unseres Daseins. Er ist als solcher Gott unser Vater, weil er es als der Vater Gottes des Sohnes zuvor in sich selber ist. 
한 하나님은 자기를 창조자라고 성경을 따라서 계시하는데, 우리에게 현존(Dasein)하는 주(主)이다. 그래서 그는 아들의 아버지로서 자기 안에서 앞서서 계시하였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다(고경태 역). 
 
현존(Dasein)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에 의해서 시작된 존재 개념이다. 박순경은 Dasein을 ‘현존’으로 번역했다. 영어에서 Dasein(Existenz als Aktualitat, 행동성으로 존재)과 Sosein(Essenz als Realitaet, 실재로서 본질)을 existence로 번역하기 때문에 영역(英譯)이나 국역(國譯)에서 존재, 현존 등을 만나면 독일어 원문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독일 사고인 히스토리(Historie)와 게쉬히테(Geschichte)와 Sosein, Dasein은 영어 번역에서도 쉽게 옮기지 못한 사고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유럽 사고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바르트에게 신(Gott)은 현존(Dasein)한다. Dasein은 하이데거 이전에 없었던 이해 방식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자’(das Seiende)와 ‘현존’(das Sein)을 구분했다. 존재를 피투성(被投性, 독일어: Geworfenheit), 던지고 던져진 현실성(활동성)으로 제시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6)은 인간 존재(Sein)를 탐구한 것인데, 바르트는 그 개념을 신(神)에게 부과시키는 것 같다. 자유주의는 칸트와 헤겔에 의존하고, 현대신학은 계몽철학과 하이데거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철학 개념을 적극적으로 따르면서, 1세기 사도들이 헬라 철학을 차용해서 기독교를 왜곡했다고 비판했다(마 7:1-6). 현대신학은 자유주의보다 철학을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프란시스 쉐퍼는 현대 사조를 극복하고 기독교 세계관을 세우려고 노력했다. 신앙과 신학이 철학과 세상을 주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필자는 대항(세상에서 구별된 의식)하려는 자세를 가진 것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신학이 철학을 주도할 수 없기 때문에, 구별하여 서 있어야 할 뿐이다. 두 축은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 속에 있지 않은 모습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칼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I/1>, § 11, § 12, § 13은 “아버지 하나님(Gott der Vater, Schopfer)”, “아들 하나님(Gott der Sohn, Versohner)”, “성령 하나님(Gott der heilige Geist, Erloser)”을 전개하는데, 모두 “성경을 따라서(nach der Schrift)”라고 기술한다. 바르트가 매우 성경적인 자세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성경 단어를 말한다고 해서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꾸준하게 반복할 내용인데, 바르트는 아들 하나님을 화해자(Versohner)로, 성령 하나님을 구속자(Erloser)로 제시하는 것이다. 박순경은 Schopfer(Creator)를 창조자라고 번역했다. Creator and Redeemer는 창조주와 구속주로 번역하는 것이 상례인데, Reconciler를 ‘화해주’로 번역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생각했다. Versohner를 ‘화해주’로 번역하면, 창조주, 구속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성령이 구속주가 된다. 
 
바르트는 “아들 하나님의 아버지”라고 제시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버지가 아들을 증거하는 구조와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내용이다. 세 복음서에서는 아버지께서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고,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께서 증거하시는 말씀이 많다(요 5:37; 6:40,57; 10:15,30).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데 아버지의 백성으로만 영광을 받는다(요 17:10). 아버지의 것은 아들의 것이다. 바르트는 성경을 따라서 제시한다고 하지만, 성경 전체가 아닌 일부 내용을 전체로 제시한 것이다. 일부로 전체 구도를 왜곡시켰다. 성경 전체 이해 방식에 대한 해석 쟁론이 필요하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한 신(神)”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슐라이어마허가 주장한 유일신 종교 이해 구조(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를 확정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새관점학파(New Perspective on Paul)의 톰 라이트(N. T. Wright, 1948-)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계를 구원하는 것이 신의 단일 계획(God's single plan)이라고 제언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인데,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의 가족에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있다. 우리는 한 신, 유일신을 강조하기 때문에 바른 제시라고 이해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종교다원주의의 강점은 한 신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미 불교에서는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원불교는 자기 종교를 “은혜 종교”라고 표현하고 있다. 기독교는 유일신 종교나 사랑의 종교 집단이 아니라, 예수를 성령으로 주와 구주로 믿어, 믿는 주와 한 몸을 이루어 교통하는 집단이다. 바르트는 나사렛 예수가 주(主)라는 것이 신약성경에서 근거해서 자명하지 않다고 제시했다(KD I/1., 405, GG 496, CD, 385). 바르트에게 “한 주(主)”는 아버지뿐이다. § 12에서 아들 하나님도 주(主)라고 제시하지만, 왜 주인지를 설명할 것이다.  
 
창조는 삼위일체 사역이다. 창조에 대해서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III권(1,2,3,4권)에서 기독교 역사상 가장 많은 분량으로 제시했다. 바르트는 아버지를 (단독) 창조자라고 규정했다. 필자는 그러한 표현은 이사야 9:6,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로서” 메시아에 대해서 거부 의식이 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제시를 거부한 것이다. 무지(無知)일까? 부지(不知)일까? 모든 사람은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기 싫어 멸망 길에서 나오지 않으려 한다. 그 멸망 길에서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주의 은혜뿐이다. 1세기 예루살렘 최고의 석학이었던 사울은 자기 귀로 들었던 예수를 거부했고, 추종자를 죽여서라도 흔적을 제거하려고 앞장섰다. 그러나 그 사람이 예수 복음 전파 선봉장이 되었다. 예수는 주이시고 구주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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