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관점’으로 읽는 성경이야기③

‘살다가 죽었다’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

임승훈 목사 - 월간목회편집부장 역임, 한국성결신문 창간작업 및 편집부장역임, 서울신학대학교총동문회 출판팀장, 위대한맘 인천한부모센터 대표, 설교학 신학박사(Th,D), 더감사교회 담임

감사의 사람, 에녹

인류의 시작을 알리는 성경은 창세기이다. 창세기는 4대 사건, 4대 족장을 다루는 책이다. 4대 사건은 창조, 타락, 홍수, 바벨탑이야기다. 4대 족장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야기다. 창세기 5장은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타락한 인류의 족보를 다룬 이야기이다. 5장 전체가 ‘낳고 살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뿐이다. 타락한 인류의 계보다. ‘복을 주시고 기회를 주었건만’ 저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는커녕 아들딸 낳고 그저 사는 데에만 바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이미지)대로 지으셨다(1절). 또 복을 주시고는 그 이름을 사람이라 지칭하셨다(2절).

사람이라 하심은 뭔가를 기대하셨다는 말이다. 사람의 본분이 남아 있기를 바라심이다. 감사의 사람이기를 소망하시고, 감사의 제사를 고대하셨다는 말이다. 아담은 130세에 자신을 꼭 빼닮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셋이라 했다. 셋을 낳은 뒤 그는 8백년을 더 살면서 자녀를 낳았지만,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셋도 아비를 따라 자녀만 낳았지 하나님께 감사 한번 하지 못한 채 912년을 ‘살다가’ 죽었다. 그 뒤를 이어 에노스, 게난, 말할랄렐, 야렛, 므두셀라, 라멕까지 모두 그렇게, 그렇게 ‘살다가’ 죽어갔다.

하지만 에녹만큼은 달랐다. 그는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22절).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았다. 에녹에 대한 설명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다.”는 표현은 인상적이다. 사람이 부부간에 사랑하고 애정을 나누며 자녀를 낳고 살아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뭔가 큰 시사점을 던져준다. 첫 인류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사람이라 칭하실 때 이미 하나님과 교감을 나누며 살도록 허락받았다. 이름하여 감사생활이다.

신약성서는 에녹을 가리켜 “믿음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면서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히 11:5)라고 평가한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으며 살았다는 것(창 5:22)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다는 대목 사이에 뭔가 이유가 있다고 본다. 히브리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히 11:6)고 말한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믿음이 있었다는 말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여호와께 감사제물을 드리려거든 너희가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레 22:29)드리라고. 그러니까 에녹의 경우 그는 감사로 여호와께 제물(제사, 예배)을 드렸기에 영광이 되었다는 말이다.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했는지를 보여주고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누리도록 베풀어주셨다. 아낌없이 말이다. 그분이 기대하는 것은 없었다. 인간에게 무엇을 바람도 아니다. 다만 바람(기대)은 한 가지, 감사였다! 감사의 제사, 감사의 언어, 감사의 생활, 감사의 후손들로 이어가길 소망하셨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감사에 성공한 인물로 생각된다. 너무나 귀하여 이 불의한 세상에 물들기 전 하나님께서는 그를 데려가셨던 것이다. 그에게만 ‘죽었다’가 아니라, “365세를 살았더라”(23절)라고 표현한다.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 사람들

왜 인류의 조상들은 그 귀한 기회들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을까? 세상의 일과 땅을 일구는 일에만 몰두했을까? 사로잡는 뭔가가 있었다. 사람의 눈과 입, 귀를 사로잡는 것들 말이다. 저들은 하늘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땅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인간을 현혹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중독되면 죽음을 불사한다. 사업이 망하는 지도 모르고 한눈을 판다. 여자에 눈이 멀면 위기가 오고 부도가 눈앞인데도 딴살림을 차리고 들락거리며 향락을 즐긴다.

광산의 황금, 술과 유흥, 성매매와 도박, 국제무역이 중계되는 큰 거점(항구)에는 대개 이런 시설이 위치한다. 돈, 쾌락, 술집, 퇴폐시설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차고 넘친다. 거기에 카지노까지. 카지노에는 전략적으로 3가지가 없다. 첫째는 시계, 시계는 정한 시간, 타인과의 약속을 떠올리게 한다. 시간가는 줄 모른 채 도박에 빠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둘째는 창문, 가정이나 일상 환경을 돌아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셋째는 거울로, 자신의 얼굴, 초췌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 세 가지를 숨김으로써 도박에만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인간의 생각을 빼앗고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도록 유인하는 것으로, 심리학에서 차용한 철저한 마케팅전략이다.

상상이지만 인류 초기에도 인간을 몰두케 한, 중독될 만한, 인간을 홀리는 뭔가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남자들이 예쁜 여성들을 찾기에 혈안이었다. 부자들은 아내를 여럿 두었다고 한다. 여성을 상품화해서 파는 산업이 발달했다든지, 여성을 소유하고 더 많이 차지하려는 풍토가 조성되었다고 본다. “남자가 여성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창 6:2). 남녀관계에 심상치 않은 문제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3, 4절을 건너면 매우 심각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함을 보시고”, “땅에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였다.”(창 6:5,6). 더욱이 “사람들을 지면에서 쓸어버려야겠다.”(창 6:7)고 작정하셨다.

하늘도 쳐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찌 하나님까지 생각할 수가 있을까. 하나님을 기억했다면, 하나님을 묵상했다면 누군가는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고, 감사하며 더욱 복된 삶을 누렸을 텐데 말이다. 에녹의 ‘하나님과의 동행’이란 관련성을 살필 때, 그의 사고, 행동, 제사와 삶의 태도 등 어떤 것에도 ‘감사’란 단어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행히도 감사생활은 유추해 볼 수 있다. 감사생활을 빼고 에녹을 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에녹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바빴다. 모두 무엇엔가 홀린 것 같다. 이웃을 돌보지도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못한 채 그저 바빴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도 않다. 너무나 바쁜 사람은 감사할 수 없다. 범사에 감사하고 감사로 예배하는 일은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다. 바쁘기만 한 사람은 하나님에게는 필요치 않은 사람일 수도 있다. 제사 때문에 짬을 내기 어려운 그 바쁜 레위인을 향하여 성경은 말한다. “아침과 저녁마다 서서 여호와께 감사하고 찬양하며”(대상 23:30). 바쁘다고 감사를 잊어선 안 된다는 경고이다. 감사는 언제나 놓치지 말아야 할 인간의 본분임을 주지시킨 말씀이다. 레위인이라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며, 제사에 관여하는 사람이라고 특권은 없다. 어느 누구도 감사에는 예외가 없음을 언급하는 대목이다.

 

감사는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본분

성경이 요청하는 감사는 ‘범사에 감사’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여기서 ‘범사’(All circumstance, NIV)란 환경이 좋을 때나 나쁠 때를 막론하고 사용되는 개념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 여유 있을 때나 바쁠 때, 실패했을 때나 성공했을 때, 그 어떤 시간도 포함되는 단어이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감사에 있어서 주의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엡 5:20). 이를 세심히 살펴보면 감사가 예배의 중요 요소임을 언급한다고 볼 수 있다. 아니, 아니다. 감사는 인간의 삶 가운데에 늘 존재해야 한다. 인간의 본분을 말할 때마다 감사를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 그 하나님을 대할 때, 인간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하는 것이 바로 감사이다.

그런데 창세기 5,6장을 보면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였다거나,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제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없다. 다만 인간의 먹고사는 이야기, 남녀가 결혼하였다는 이야기, 몇 살에 아들을 낳고 자녀를 낳았다는 이야기뿐이다. 아니, 남자들이 분에 넘치도록 예쁜 여자들을 마음대로 취하여 아내를 삼았다는 이야기뿐이다. 이러한 인간 군상의 추함을 보고는 여호와께서 경고하셨다.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창 6:3). 수백 년씩 살던 수명을 120년으로 단축시켰다. 무려 700% 정도 감한 수치다. 보기 싫은 사람들의 수를 획기적으로 줄인 조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자,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반복해서 한탄하셨다(창 6:6,7).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인간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모두 악할 뿐임(창 6:5)을 보시고 난 뒤의 일이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선택된 남자들마저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는 욕정이 불 일듯 하여 좋다고 생각되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고(창 6:2), 자식 낳기에 바빴다(창 6:4).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

하나님께 경배할 시간이 없었다. 감사할 의도도 없었다. 아니, 하나님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시대적 흐름이 그러했다. 아무도 드러내놓고 하나님을 말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이 있었다.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노아도 있었다. 모두가 한 흐름으로 달렸기에 그 큰 거대 물결을 저들이 거스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인가 에녹은 데려가셨고, 에녹 없는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잠시 지켜보셨다. 역시 인간의 근성은 악하여 돌이키지 않음을 보셨다. 하나님은 몇 세대 후 노아를 새 시대의 인물로 지목하셨다.

왜 복의 기회를 얻었으나 누리지 못했을까? 신학적 관점으로 볼 때 인간의 죄와 악의 문제가 대두된다. 하지만 새로운 감사의 관점으로 보면 감사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본다. 감사에 문제가 생기고 구멍이 생겨 축복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고난은 하나님의 새로운 길

감사 책 『나는 당신을 만나 행복합니다』를 낸 후 어느 날, 두툼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내용이 기가 막히다. 나이 40이고 아내는 한 살 연상이라 했다. 청년담당 사역자인데, 고혈압에 당뇨가 심해 지난해 두 번이나 쓰러졌단다. 한 쪽에 중풍이 왔다. 글씨를 쓰기도 매우 불편해졌다. 한 쪽 안구는 출혈이 생겨 수술을 하였고, 손발 끝에 상처가 나면 아물지를 않는다. 매일 19개의 알약을 먹으며 버티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 지난 7월에는 아내에게 간암선고가 내려졌다. 중학생 딸과 함께 세 식구가 모두 지쳐 하나님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라 했다. 불안과 염려, 조급한 마음에 우울증까지 겹쳐온다. 감사는 고사하고 먹고살기 위해,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 설교해온 삯군이라고 고백한다. 헌데 나의 감사책을 만나고 소망을 찾았다며, ‘1532감사’를 실천하며, 감사로 살겠다는 고백의 편지였다. 나는 먹먹한 마음으로 한 주일을 보내다가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고난이 올 때, 오래 참음의 본을 삼을 수(야 5:10) 있을까요? 온전하게 하심이려니(히 2:10) 생각이 들까요? 순종을 배우는 반면교사(히 5:8)라는 생각이 들까요?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히 11:25)보다 좋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했는데, 고난을 받아도 부끄러워하지 말라(딤후 1:12) 하셨는데, 너는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자(딤후 2:3)고 하셨는데, 복음에는 죄인같이 고난을 받으라(딤후 2:9)고 하였는데요..., 고난 속에서 주께서 건지실 것(딤후 3:11)을 과연 얼마나 기대할 수 있을까요?

고난이 오면 보통 ‘분노와 절망, 울화’가 치밀어 오르지요. ‘왜 나만, 왜 우리 가족만, 왜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라는 생각이 듭니다. 심각한 질병은 고통과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게 사실이지만 긴 호흡을 가지고 대하면 지나가는 것이더군요. 그리고 인내와 연단과 깨달음을 주시더군요. 반면교사로 삼아 심기일전하면 제2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헌데 주저앉으면 그대로 쓰러져버리지요. 인생후반 역전승을 위해 달리십시오. 저는 탁구, 팔굽혀펴기, 걷기, 자전거타기 등 간편 운동과 함께 매일 감사를 쓰고 있어요. 주일저녁에는 가족들과 함께 감사모임을 가지고요. 또 올해는 월간지에 감사 글을 연재하게 되었기에, 또 한 권의 감사 책을 구상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형제님의 고통이 얼마나 클지 상상이 되지 않네요. 하지만 길은 있고, 방법은 분명 있다고 믿어요. 새로운 길을 내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겁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 말입니다. 힘내세요. 또 교제해요. 이사야 43:19 말씀은 제가 고난을 받기 전에 하나님께서 2년간 지속적으로 안내해주시던 말씀이었지요. 그땐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했고. 고난을 통과하며 깨닫게 되었어요.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광야와 사막 같은 험지에도 길을 내시고 강을 내시겠다는 뜻이군요. 문제는 내가 그런 곳이라도 달려가겠다는 자세겠지요. 말씀이 지금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어집니다. 분명코 하나님은 살아계시니까요. -2018년 12월 22일, 나무그늘.

 

모든 사람들이 몇 세를 살고 죽었다고, 표현되었지만 예외가 있다. 노아는 365세를 살았다. 에녹만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고 말한다. 그는 죽음을 이기고 산 유일한 사람이다. 그 사역자 형제도 감사로만 산다했으니 놀라운 경험을 하리라 생각된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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