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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철 칼럼】 님비와 핌피 사이의 교회
  • 한명철 목사
  • 승인 2019.02.20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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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비와 핌피 사이에 선 교회

님비(Not In My Back Yard)와 핌피(Please In My Front Yard)는 이기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님비는 공동체에게 유익이 되어도 자신에게 이롭지 않으면 반대하는 이기주의다. 한편 핌피는 유익되는 바를 공동체보다 자신에게 적용시키려는 또 하나의 이기주의다. 찬반의 논리가 의(義)나 공동체의 유익보다 이(利)나 개인의 유익에 맞추어진다. 쓰레기 하치장이나 핵폐기물 시설은 환경을 이유로 님비를 내세우고, 위락시설이나 관광지 개발은 경제발전 때문에 핌피를 주장한다. 우리 사회의 갈등은 결국 님비와 핌피의 충돌이다.

지역이기주의가 강화되면 나라의 균형적 발전이 저해된다. 비단 나라나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에서도 이런 현상을 본다. 사역 분담에 있어 재정이 튼튼하고 사역의 보람이 드러나는 편에는 사람들이 몰리고 그렇지 못한 쪽에는 늘 인원이 모자란다.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큰 교회는 클 만한 요소를 갖추었기 때문이요, 자라지 못하는 교회에는 뭔가 그럴만한 결정적 요인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대세다. 이런 흐름 속에 결론은 뻔하다. 대형 교회, 소형 교회처럼 크기 별로 교회를 나누거나 자립 교회, 미자립 교회처럼 재정의 다소로 교회를 분류한다.

교단이기주의와 교회이기주의

교회에는 다양한 지역을 배경으로 한 사람들이 모인다. 그렇다면 교단이란 칸막이가 때로는 울타리 없는 교회에 족쇄 역할을 한다. 같은 교단과 다른 교단에 대한 자세가 다르다. 이른바 교단이기주의의 기형아가 생겨난 것이다. 지역이기주의보다 나라를 망국으로 내모는 것이 교단이기주의다. 교단이란 과연 불필요한 선인가? 아니면 필요한 악인가? 모든 다양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하나의 교단이 여러 교단들과 어울리다 보면 다른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국적 차원에서의 일치와 연합이 이루어져야 당연한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소 닭 보듯 하는 형국은 갈등 구조에 휩싸인 개인들이나 세상의 여타 조직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교회에 진정 섬김과 희생이 있는가? 대도시 교회와 농어촌 교회, 특히 산간벽지나 도서 지방에 있는 교회들 간에 형성된 간극은 전체적으로 교세가 늘어날수록 더 벌어지고 있다. 벌어진 틈이 좁혀지기보다는 갈수록 틈새가 벌어진다는 데에 사랑공동체요 이타공동체인 교회가 갖는 해묵은 고민이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섬김과 희생의 부재 때문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섬김과 희생을 표방하지 않는 교회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진정”이란 말을 서두에 붙였다.

지체의식이 결여된 교회

규모는 작아도 섬김과 희생에 위력을 갖춘 교회가 있는가 하면 웬만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제 몸 하나 건사하느라 기진맥진하는 교회도 있다. 그렇다면 섬김과 희생이 결코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며 능력의 강약에 따라 좌우되는 일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지식은 넘치고 설교도 반복 강조되는데 실천하는 삶이 뒤따르지 못한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실천 의지의 부재요 지체 의식의 결여다. 교회가 이런 면에서 본을 보이지 못하면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에 바른 목소리를 낼 수 없다.

한국 사회는 가족중심의 사회제도가 오랜 기간 축적되었지만 서구사회는 그렇지 않다. 반대로 개인의 가치와 존엄을 강조한 결과로 개인주의가 매우 발달했다. 국제결혼을 하거나 외국인과 관계를 설정함에 있어 우리는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몰아세우는가 하면 외국인은 한국인의 끈끈한 정과 선의의 간섭을 프라이버시의 침해로 규정한다. 이는 문화적 차이로서 무엇이 더 낫고 모자란 차원이 아니다. 둘 다 강점과 약점이 있다. 강약을 보완하고 상대의 문화를 존중, 이해하려는 노력이 관계증진에 도움이 된다.

교파이기주의와 부서이기주의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는데 서로 자신의 이득을 노린다면 몸은 이내 망가진다. 지체이기주의가 사회적으로 적용된 것이 부처이기주의다. 같은 회사에서도 가장 강력한 라이벌은 다른 회사가 아니라 같은 회사 내의 다른 부서 간의 경쟁이다. 더욱 한심한 것은 같은 부서 내에서도 팀끼리 경쟁적으로 다툰다. 교회가 교파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면 교파이기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힌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교파에 속했기에 무조건 내 쪽을 지원한다. 심지어 한 교회 내에서도 협조를 아무리 외쳐도 결정적 순간에는 자신이 속한 부서나 팀을 위해 한쪽으로 쏠린다.

이기주의를 위한 10계명이 있다. 첫째, 자신 외에 타인이 내 삶에 끼어들지 않게 하라! 둘째,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세우라! 하늘 아래 땅 위에 나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 셋째, 자신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분투노력하라! 넷째, 자신의 생일과 기념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다섯째,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라! 여섯째, 살신성인하지 말라! 일곱째, 양보심을 멸시하라! 여덟째, 주기 위해 기어가고 받기 위해 날아가라! 아홉째, 네 이웃의 곤란함에 마음 쓰지 말라! 열째, 네 이웃을 돕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말라!

거룩한 자멸(自滅)인가 지독한 공멸(共滅)인가

이기주의는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다. 교회는 이기주의가 소멸되는 곳이어야 한다. 주님이 보여주신 이타주의의 정신을 본받아 나를 버려 남을 구하고 이웃을 위해 자신을 불쏘시개로 삼아야 한다. 이기주의는 결국 모두를 공멸의 길로 이끌지만, 거룩한 자멸에의 의지를 갖고 살신성인으로 표현되는 이타주의를 성경적 사랑으로 구현해갈 때 파국의 풍파를 딛고 공존 상생의 항구에 도달할 수 있다.

이기주의는 영적 성장에서 성도의 발목을 붙드는 찰거머리다. 의외의 숨은 복병이요 믿음의 순항을 파탄으로 이끄는 암초다. 이기주의는 승자 독식의 사고방식과 일맥상통한다. 지는 꼴을 못 본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한국은 국제경기에서 다른 나라에 져도 되지만 일본에 지는 것만은 용서받기 어렵다. 민족감정이 뒤섞인 집단정서다. 언론도 가세한다. 거의 몰매 수준이다. 왜곡된 민족 이기주의의 한 예다.

이기주의는 곧 우상숭배

이기주의는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자기 발현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 원한다. 모두가 행복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타인보다 나의 행복을 더욱 원한다. 나를 남보다 낫게 여기고 생존에 관한 문제면 사생결단을 해서라도 나를 지킨다. 이런 본능이 사회 규범 내에서 도를 넘으면 이기주의로 불린다. 적당하면 용인되지만 과도하면 지탄받는다. 이기려는 주의와 사상이 이기주의다. 주님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하신다. 기필코 이기려면 반드시 져야 한다. 모두 이기려면 매번 져야 한다. 그런 정신으로 살라는 말씀 정도가 아니라 그렇게 살라고 명하신다. 이기주의는 곧 우상숭배다. 모든 우상숭배의 기저에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이기주의를 우상숭배로 보는 이유가 있다. 이기주의가 다른 사람의 유익보다 과도하게 자신의 유익을 챙기는 정신이라면 탐욕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성경은 탐심을 우상숭배와 동일시한다. 돈의 관점에서 타인보다 자신의 이득을 앞세우면 그것이 탐심이므로 우상숭배다. 명예의 측면에서 다른 사람에 비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려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이 탐심이므로 우상숭배다. 사람이 교만하면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되고 모든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최종결정권자가 자신이 되므로 이기주의와 다르지 않다. 선입견은 자기 입장에서 상대를 느끼고 판단하고 반응하는 일종의 편견이므로 이기주의에 가깝다.

우월주의와 비교의식에 사로잡힌 병든 ‘우리’

성도나 목사나 할 것 없이 공동체의식인 “우리”를 과도하게 적용하면 “우리 교회”, “우리 교단” 하는 식이 되어 이기주의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는 추태를 보인다. 자존감을 넘어 자만심에 이르고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우월감을 느낀다면 이것 역시 이기주의의 독성에 마비된 증거다. 주님은 하나님의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고 인간과 평균을 이루셨다. 성육신의 삶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이해하면 모두가 평등하고 사랑 가운데 서로를 세우는 삶이 가능하기에 이기주의를 능히 이긴다.

연합을 방해하는 것은 지나친 개교회주의다. 교회 활동의 최우선 대상이 자기 교회가 되어버리면 연합활동이 끼어들 틈이 없다. 교회의 바른 영성은 개인의 영성이면서 공동체의 영성이다. 지체 없는 몸이 없고 몸 없는 지체가 있을 수 없다. 개교회주의는 교파주의의 병적 산물이다. 너무 높아서 넘기가 어렵고 너무 두꺼워서 깨트리기가 난감하다. 사회성이 결여된 신앙의 사유화가 개교회주의를 낳고 이 개교회주의가 쌓여 교파주의라는 철옹성을 이룬다. 무분별하고 목적의식 없는 경쟁은 교회 간의 소모전을 장기화시키고 영적 전쟁의 격전지에서 발산시켜야 할 힘을 소진하게 만든다. 교회간의 경쟁은 자중지란으로서 공멸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건강한 ‘우리’를 회복하는 교회

주기도문에서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기 이전에 우리 하나님이시다. 우리 하나님이 없으면 나의 하나님도 없다. 성경을 열면 첫 장에서부터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창 1:26)로 표현하셨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가 개교회주의의 편협한 의식에서 벗어나 보다 크고 넓은 틀에서 우주적 교회가 되기를 바라신다. 교회가 지향하는 것은 개교회주의가 아니다. 개교회주의를 넘어 그리스도를 한 머리로 삼은 한 교회로 부르신다.

건강한 사회를 해치는 병적 현상 중의 하나인 양극화가 교회에서도 보인다. 서로를 외면하고 자기에게 과도히 집중하고 집착하는 개교회주의가 그 근본 원인이다. 교회의 양극화(ecclesiastical polarization)는 서로의 관계를 더 멀어지게 만들고 교회 간의 격차를 더 벌어지게 하여 평등공동체의 불평등 상태를 더욱 심화시킨다. 세계 최대 규모의 대형교회 거의가 한국에 몰려 있고 한국교회 전체의 약 80%가 미자립 상태에 놓여 있다. 세계 선교사 파송 제2위이지만 신앙의 강도에 있어서는 약세를 면치 못한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가 왕권을 행사하는 유기체(christianity)지 교회가 왕권을 행사하는 조직체(churchnity)가 아니다. 한국교회가 지닌 고질적인 병폐의 대부분은 대형교회에서 비롯되었다. 교회의 대형화, 매머드화를 스스로 경계하고 성육신정신으로 자신을 줄여 거품을 제거하는 자기연마가 없으면 홀연히 재앙의 날을 맞이할 것이다. 지나치게 크면 교회다움을 오히려 잃는다. 자원도 많고 재정도 넘쳐나고 일꾼도 부족함 없지만 교회의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 영적 측면에서 역동성과 진정성을 최대화하기가 어려워진다. 문제도 다양화해지고 덩치도 커진다. 적당한 크기에 영적으로 최강을 유지함이 가장 이상적이다. 작고 강한 교회가 증가해야 한다.

 

 

한명철 목사  jesuspoin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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