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욱 목사의 인문학 산책 (12)

 

이상욱 목사│목민교회(인천) 담임, 호서대학교( Ph.D),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하루는 직소퍼즐의 한 조각

하늘에서 강림하는 섬세한 눈들이 정원에 나뭇가지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이내 쌓이기 시작하였다. 눈발 하나도 똑같이 내려오는 법이 없다. 흩날려 춤추듯 곡선으로 제멋대로 내려오는 가냘픈 눈들이 이젠 조그만 마당을 거의 덮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 묻는 것이 있다. 나는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아는가? 내가 진심으로 시도하여 완성하고 싶은 과업은 무엇인가? 나는 오늘 이 눈처럼 무엇인가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루는 인생이라는 커다란 직소 퍼즐의 한 조각이다. 직소 퍼즐이란 그림이 그려져 있는 여러 개의 퍼즐 조각을 맞물리는 홈대로 끼워 맞춰서 완성하는 퍼즐이다. 당연히 기본적으로는 1인용 게임이지만 1000조각, 2000조각 하는 식으로 양이 많은 퍼즐은 여럿이서 할 수도 있겠다. 이 조각 없이 내 인생은 완결될 수 없다. 조각 수가 많을수록 난도가 높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흔히 1000조각은 500조각보다 시간이 두 배로 걸린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 인생도 하나의 조각 퍼즐을 완성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19세기 영국인 존 스필스버리(John Spilsbury)는 나무판자를 새겨 세계지도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이 만든 세계지도가 그려진 판자를 실톱을 이용하여 여러 조각으로 잘랐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그것들을 장난감으로 주었다. 아이들은 이 조각들을 맞춰 세계지도를 완성하며 놀았다. 이것이 오늘날 레고와 같은 직소 퍼즐(Jigsaw Puzzle), 장난감의 효시다.

인생이란 어떤 그림이 될지는 명확히 알지 못하지만, 퍼즐 놀이처럼 기본이 되는 가장자리 퍼즐 조각들을 맞추면서 차근차근 내 인생의 그림을 찾아가는 것이다. 오늘 하루이란 조각 없이 인생은 불완전하며 실패다. 나는 오늘 서로 상관없을 것만 같은 수많은 조각에서 서로 연결된 하나를 상상하고 감지한다. 곡선으로 아무렇게나 잘린 조각들이 다른 조각의 면과 일치하면, 그것은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어쩌면 오늘은 인생에서 마주치는 사건과 사고들은 내가 그려내야 할 거대한 작품의 중요한 한 조각일 수밖에 없다.

인생은 한 권의 책이나 한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책일 수도 있지만, 건축물일 수도 있고, 한 편의 명작일 수도 있다. 작품의 장르는 다양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만들어가는 것은 누구도 아니고 자신이다. 그래서 나는 독서법에 관한 책을 쓸 때, 『명작독서, 명품인생』라 이름을 달았다. 물론 독서법을 제시한 책이다. 하지만 명작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은 독서가 으뜸이라는 것을 주장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경험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 독서이기 때문이다. 독서는 그 자체로서 의미를 주기도 하지만 글이 마중물이 되어 내 안에 보물을 드러나게 한다. 비록 사람이 책을 만들지만, 책이 사람을 만드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 권의 책을 만나 명작인생이 된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다. 하여튼 내 손에 쥔 하루는 내가 그려야 할 내 인생이라는 ‘명작 名作’의 일부다. 내 인생이 걸작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명작독서, 명품인생』, 이상욱 저, 예영커뮤니케이션, 2012

첫째, 오늘 하루는 ‘나 자신’을 감동을 주는 하루여야 한다. 나의 심금을 울려 눈물짓게 만드는 하루는 내 작품을 읽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에게도 감동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나는 매주 설교를 한다. 내가 감동적이지 않은 설교가 다른 사람들을 감동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느낀다. 나의 개성이 드러나는 작품이, 최고의 작품이듯이 오늘 하루도 나다움이 드러나는 하루이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독창성이 발휘되는 인생이다.

프랑스 사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은, 예술가를 지망한다고 한다. 두 번째로는 교수 혹은 교사를 지망하며, 세 번째는 기업인이 되고 네 번째는 직업 관료가 된다고 한다. 이는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직업인의 순서가 예술가, 교육자, 기업인, 직업 관료 순이라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의 직업인에 대한 존경은 “독창성”을 중요시하는 순서대로이다. 프랑스인들이 예술가를 가장 존경하는 것은, 예술가가 가장 뛰어난 독창력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나의 독창성이 발휘되는 인생은, 제로섬 게임으로 동일한 작품을 양산하는 사회에서, 돋보일 수밖에 없는 ‘파랑새’<(RARA-AVIS):라라 아비스,천상에서 살던 '金鸞鳥'>이다. 제로섬(zero-sum)은 게임이나 경제 이론에서 여러 사람이 서로 영향을 받는 상황에서 모든 이득의 총합이 항상 제로 또는 그 상태를 말한다. 어원은 레스터 써로(Lester C. Thurow) 교수가 1981년에 쓴 책 『제로섬 사회』(The Zero-Sum Society: Distribution and the Possibilities for Economic Change)에서 그 용어가 기인하였다. 제로섬 게임이 적용되는 게임은 '무승부'가 없고, '상대방의 점수를 빼앗아 와야 승리 한다'라는 특성상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이 독창성을 정신분석학자 빅터 프랭클은 ‘존재의미’라고 불렀고 융은 ‘중심은 셀프(Self)’라고 정의했다. 종교전통들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칭하고, 예술에서는 ‘영감’이란 이름으로 칭송된다. 윌트 휘트먼이 『Song of Myself』이란 시의 첫줄, I celebrate myself and sing myself, 즉 “나는 나 자신에게 예배하고 나 자신을 노래합니다”에서 언급한 ‘myself(마이셀프) ’이다.

따지고 보면 교육이라는 말도 내 안으로 무엇인가를 주입하는 과정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끄집어내는 과정이라는 것으로 정의한다. 교육(Education)은 본래 라틴어의 educare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 어원(語源)을 따져보면 ‘e’+'ducare'의 합성어로 되어 있는데 ‘e’는 ‘밖으로’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ducare’는 ‘끌어내다’의 어원을 가지고 있다. 즉 내재적으로 구유 하는 선천적인 소질이나 능력을 밖으로 신장⦁발전시킨다는 뜻이다. 서양에서 교육을 뜻하는 말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며, 소질을 계발시켜 준다⌟는 행위이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성찰하면서 삶을 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수 없는 억압된 실체, 그림자를 만들어 내면서 살아간다. 그림자는 자아를 억압함으로 만들어진다. 이중 ‘그림자’는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며 자아의 어두운 면이다. 의식은 그림자를 억압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때 무의식의 그림자를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에게 투사해서 다른 사람을 욕하거나 비판하는 것이다.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버럭 화부터 내게 되는 것은 우리의 무의식의 ‘아픈 곳’이 건드려졌기 때문이며, 운전하면서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는 것은 사소한 계기이지만 순간적으로 무의식의 그림자가 통제할 겨를도 없이 먼저 튀어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온전한 나’라는 내면의 소리를 자신의 것이라는 이유로 깎아내린다. 내게 무슨 선한 것이 있겠는가? 패배자의 착상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기 안에 있는 보물을 존경하지 않고 무시한다. 어쩌면 학교 교육이 우리에게 남들을 부러워하고 경쟁하라고 세뇌해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가둬두고 산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하고, 그로 인해 성공적인 결과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압박은 내가 집중해야 하는 과정을 방해한다. 불안정해질 대로 불안정해진 마음이 몸으로 드러나는 이는 결과적으로 또 다른 악순환을 가져온다.

내 안에 있는 보물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밖으로 보물을 찾아 나선다. 좋은 스승을 찾기 위해 좋은 학교를 찾아 헤매고, 명산을 찾아 등산하고, 고전과 경전을 암기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란 말은 ‘Βασιλεία του Θεου 바실레이아 투 데우’라고 표현된다. 여기서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는 왕권, 통치, 주권, 다스림 등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임하는 곳은 내 안에 있다. 천국이 하늘에 있다 하면 새들이 우리보다 먼저 가고, 천국이 땅속에 있다 하면 물고기들이 우리보다 먼저 가리라. 천재는 자신의 이데아를 자신의 마음에서 발견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소위 위인이라 하는 셰익스피어, 단테, 괴테, 베토벤, 세종대왕, 구텐베르크, 아인슈타인, 노자, 예수, 공자, 붓다, 소크라테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자신의 이데아를 자신 안에 찾아 자신의 방식대로 노래한 사람들이다.

조선 시대 반정(反正)이라 이름 붙인 사건은 세 개가 있었다. ‘반정(反正)’이라 함은 올바른 곳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옹립한 중종반정 그리고 광해군을 폐하고 인조가 왕위에 오른 인조반정, 마지막은 연암의 글 때문에 문체가 어지러워졌다고 해서 일어난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연암의 글이 도대체 어땠기에 반정까지 일어났을까.

연암의 글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글은 당시 사대부들이 쓰던 글과는 완전히 달랐다. 사대부들은 고고한 한시(漢詩)나 옛 성현의 경구를 자신의 글에 적용하는 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연암은 자유로운 문체와 신변잡기의 이야기로 글을 지었다. 그리고 그 문체를 순정고문체로 돌리기 위한 반정(反正)이 일어난다. 연암은 형식을 파괴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문체를 만들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느낌, 생각을 가장 잘 전달할 때 글이 훌륭해지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추하거나 비속어라고 여겨지는 말도 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글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21

두 번째, 나 자신에게 ‘숭고해야’ 한다. 자신의 숭고와 미를 찾지 못한 사람은, 타인이 정한 아름다움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 한다. 자신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찾고, 그것을 매일 연습하는 심정이 ‘개성’ 個性이며, 그 개성은 타인들에게 ‘아우라’로 표현된다. 아우라(aura)는 인체로부터 발산되는 영혼의 에너지다. 또는 어느 인물이나 물체가 발하는, 일종의 독습인 영적인 분위기도 가리킨다. 「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아우라(αύρα/aura)」에 유래해 영어로서는 약간 문어적인 표현이다.

하루는 자신 안에 있는 숭고와 미를 찾는다는 의미에서 자신에게 감동적이다. 하루는 자신에게 숭고한 그림을 조금씩 찾아가는 ‘회복回復’의 기회다. 회복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자신의 모습을 보고 구축하는 과정이다. 회개는 자신의 원래 모습, 퍼즐의 원래 그림을 발견하는 행위다. 회개는 그리스어로 메타노니아이다. 그리스어 Metanoeo 혹은 Metanoia의 뿌리가 ‘돌아보기’, ‘달리 생각하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회심의 가장 중요한 단서는 바로 이 ‘돌아감'이다.

’돌아감‘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구속 사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이다. 범죄 한 인간들과 죄에 물든 피조세계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성경의 주요한 줄거리이다. 회개나 회심을 생각할 때 ‘멈추고 고치고 뉘우치는’ 일에 집착하기보다는 ‘돌아감’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돌아갈 생각을 하니 멈추어지고, 멈추고 보니 고치고 싶고 뉘우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기도의 응답이 안 오는 경우는 없다. 다만 내가 바라는 답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다.

 

내 인생이 걸작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 마음가짐은 ‘눈치’ 혹은 ‘체면’이다. 死要面子活受罪“죽어서도 체면을 차리기 위해 살아서 고생한다.”라는 표현이다. 중국인들에게는 체면이 즉 자존감, 존엄성이라 한다. 그러므로 체면을 목숨만큼 중시한다. 식당에서 음식을 많이 주문하는 것,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할 때도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리는 것, 성대한 결혼식 등이 모두 체면에서 나온 문화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체면 문화에 익숙하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중요시한다. 명분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까닭에, 때로는 실리를 버리는 현상까지 발생한다. 눈치나 체면은 내 인생을 눈물 나게 감동을 주는 것도 아니고, 자신에게 숭고함을 주는 것도 아니다.

유대인의 창의성의 원천은 “티쿤 올람(Tikkun Olam)” 사상이다. 많은 유대인이 성공한 저변에는 유대교의 사상인 “티쿤 올람”(Tikkun Olam)이 있다. 티쿤은 “고친다”라는 의미이고, 올람은 “세상”이라는 의미이다. 티쿤 사상은 세상을 고친다는 뜻이다. 인간은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간다는 말처럼 티쿤 올람 사상에는 신이 창조한 세상은 완벽한 것이 아닌 미완성의 상태라는 사고방식이 들어있다. 즉 세상은 끊임없이 개선해서 완성해야 할 대상이다. 그것은 세상뿐인가? 오늘은 새로운 나를 창조하는 시간이요. 창조된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이다.

안셀름 키퍼(Anselm Kiefer) <세비라쓰 하 켈림> ‘Shevirath Ha Kelim’ (2009) 유대신비주의인 카발라의 형상화하려 구원을 잃은 현대인들의 상실을 표현. ‘세바라쓰 하 컬림’이란 ‘그릇의 깨짐’이라는 히브리어

독일 출신 현대 미술의 거장 안셀름 키퍼 Anselm Kiefer(1945-)는 나치스의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독일인들과 유럽인들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회복’이라는 종교적이며 예술적인 주제를 사용한다. 그는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히브리어: קַבָּלָה 캅발라, Kabbalah)에 등장하는 히브리어 ‘티쿤’이란 개념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있다. ‘티쿤’의 의미는 ‘원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을 얽매고 오염시키는 모든 형태의 우상들을 부수고, 자신 안에 존재하는 신적인 불꽃에 다시 불을 붙이는 행위’다. 키퍼는 우주의 질서가 무너진 세계를 ‘혼돈의 세계’를 ‘그릇의 깨짐’이라고 설명한다. ‘그릇의 깨짐’은 회복을 위한 퍼즐의 시작이다. 혼돈은 인간의 영적, 개념적, 도덕적 그리고 심리적 회복의 발판이다. 이 파편 조각들은 플라톤이 말한 창조적인 행위가 일어나는 ‘수용체’이며,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 위한 어머니 뱃속이다.

오늘은 나에게 거대한 예술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조그만 퍼즐 조각이나 카발라의 그릇 조각이다. 나는 오늘 이 조각으로 무엇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내가 완성할 예술작품은 무엇인가? 고민하는 인간. 호모 페이션스(Homo Patience), 오늘 감동을 자아내는 삶을 살 것인가? 오늘 나 자신에게 얼마나 숭고했는가? 고민하는 하루가 모여 명작인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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