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대했던 북미회담이 성사되고, 3.1절 100주년을 맞았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 바퀴는 역사의 무대에 선 출연자에 의해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연출자의 지시에 의해 굴러간다는 것이 만고의 교훈이자 진리이다.

인간이 만든 모든 과학적 기구와 산물들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작동 할 수 없다. 이는 자연이 이를 지은 창조주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는 것과 해 달 별 등 천체들이 그것들을 만든 창조주가 정한 항로를 이탈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토기장이가 금그릇 은그릇 질그릇 나무그릇을 그 용도에 맞게 만드는 것은 그의 주권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도에 적합하지 않을 때 단번에 부숴버리는 것 또한 그의 주권이다(롬9:22). 이러한 일들은 작품을 목표로 한 도예가들의 일상을 통하여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릇이 토기장이를 향하여 자신의 의도를 말할 수가 없다. 이것이 무생물의 비극이다. 토기장이로부터 인정 받은 그릇은 다만 자신을 깨끗이 함으로써 사용자에게 쓰임을 받을 뿐이다(딤후2:21). 만약 그 그릇이 음식을 담는 그릇이었다면 청결해야만이 음식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 에베소 마케도니아 등 로마 동쪽의 복음사역을 마친 후 스페인을 비롯한 로마의 서쪽에 로마 교회의 지원을 받아 그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로마서에 지금까지 자신이 전한 복음과 더불어 역사의 주권자를 그릇 비유를 통하여 로마서 9장에 명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뜻하지 않게 감옥에 갇혀 로마서 서신에서 밝힌 스페인 선교의 길이 절망에 이른다. 그래서 그가 세워 디모데에게 위탁한  에베소교회 디모데에게 디모데후서를 통하여 주옥같은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으로서 적합한 깨끗한 그릇론을 설파한다.

바울은 그릇 이미지를 통하여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설파하였고, 그가 쓴 신약성경 13권 중 가장 마지막 로마감옥에서 쓴 디모데후서에서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을 모세오경의 중심인 레위기적 사고로 정결을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을 통하여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오묘하고 신묘막측(神妙幕則)한 섭리를 가늠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바울은 하나님의 선교명령을 이루기 위하여 즉 로마교회의 도움을 받아 로마의 서쪽 지역을 선교하기 위하여  로마교회에 로마서를 보냈다. 그가 쓴 로마서는 선교의 열망에 젖어 로마교회의 인정과 지원을 받아 그가 목표한 이탈리아 서편을 전도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 쓴 서신서이다(롬15:23-24). 

주된 내용은 그가 전한 복음이 거짓 증거자들로부터 오해 받고 있는 거짓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진리의 복음임을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전한다. 이러한 배경을 안고 있는 로마서는 후대에 복음 중의 복음서라고 평가를 받는다.

그럼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러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다지기 위하여 바울이 예루살렘에 방문하였던 일이 계기가 되어 오히려 같은 동포인 유대인들에 의해 억울하게 체포되어 감옥형을 언도 받아 죄수의 몸이 되고 만다. 그리고 유대 가이샤랴 재판에서 받았던 유죄에 불복하여 식민지의 본국인 로마에 상고하여 재판을 받고자 276명의 죄수들과 함께 로마로 압송된다.

가이샤랴에서 로마로 가기 위한 긴 항로 중 바울과 그의 일행들은 유라굴로 광풍을 맞게 된다. 이로 인하여 이들은 보름 동안 칠흑같은 망망대해에서 파선된 뱃조각에 의지한 체 사망을 상징하는 바다의 폭풍에 의해 죽을 고비에 이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멜리데섬에 안착된다. 설상가상으로 섬에 이르자 독사에 물려 두 번째 생명의 위기를 맞으나 또 다시 하나님의 자비가 임한다. 그리고 그곳 보블리오 추장의 환대를 받은 후 로마감옥에 이른다.

결코 짧지 않은 바울의 여정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그는 그가 계획한 복음전도자로 이탈리아 서쪽 스페인 대신 거짓전도자로 오명되어 로마에 이르게 된다. 그는 로마교회의 도움을 얻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죄수의 몸으로 로마감옥에 이르게 된다. 그 결과 그는 유라굴로 광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스토리와 멜리데섬에서 독사에게 물렸으나 해를 입지 않은 기적적인 빅뉴스로 로마에 이른다. 바울은 276명의 증인들과 더불어 로마인들에게 기대심리가 충만한 인물이 된 연고로 이태 동안 로마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바울의 삶을 한 마디로 지칭한다면 잠언 16장 9절 말씀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거친 족장시대와 요셉으로부터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질고를 겪은 후 민족으로 결성되었다. 하나님의 목적인 하나님 나라 건설을(창12:1-3) 이루기 위하여 해방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로 시내산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구원자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과 은혜를, 그 백성은 충성과 순종을 하기로 언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불평과 불순종으로 일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로 결국 가나안에 이른다.

그 후 이스라엘은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그리이스, 로마, 독일의 역사 속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진퇴를 거듭하면서 현대에 이르게 된다.

대표적으로 설례를 든다면 하나님은 남유다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을 때 70년 동안 바벨론의 식민지가 되게 한다. 70년이 이르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정복하는 시나리오로 성취하신다. 이는 바벨론제국이 약해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 다니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미리 정했던 70년의 형벌이 다 차서 무너진 것이다. 그래서 세계를 평정했던 바벨론 제국이 70년 만에 무너진 것이다. 이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제국의 짧은 역사이다.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사아왕 고레스(키프러스)는 하나님으로부터 신탁을 받았다고 하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것을 고레스 칙령을 통하여 어명을 내린다. 그 칙령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예정했던 70년 만에 해방을 맞는다.

우리나라 해방 역사와 단순하게 비교 적용하여 본다면 미국이 일본에 승전함으로 우리나라가 해방된 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의 질곡을 겪고 왔듯이 역사적인 내막은 단순하지 않다.

당시 페르시아왕 고레스가 예루살렘 해방의 일환으로 귀환 칙령을 내렸던 것은 그의 통치철학에 근거가 있었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즉 실패한 바벨론의 식민지정책을 수정한 정책이라고 한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정복한 후 이스라엘의 유력인사들 에스겔 다니엘 등 귀족과 그의 자녀들과 중류 기술층들을 포로로 압송하여 이스라엘의 종교와 이스라엘 본토를 무력화 하는 대신 본국의 댐 건설 등으로 본국 강화정책을 폈다. 그 결과 그들의 식민지인 이스라엘이 황폐화되어 세금 수입이 형편없게 되었다.

페르시아왕 고레스는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오히려 이스라엘 재건 정책을 펼친 것이다. 그 정책으로 유력인사들을 본국으로 귀환하게 하였고, 종교의 자유 등 성전 재건을 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주전 6-7세기 이스라엘과 100년 전 대한제국의 상황과 주후 21세기 한반도의 상황은 어떠한가?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의 정세와 자국의 형편에 따라 진퇴양난을 반복하였다. 이와 같이 대한민국도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의 정세와 나라 형편에 따라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래도 지나온 시대에 비해 나름 소망을 기대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었다.

이제 대한민국이 통일이 된다면 인구면에서는 독일을 앞서고, 경제면에서는 영국을 능가하고, 국방력에서는 프랑스를 앞서는 강력한 나라가 된다.

아, 대한민국이여!
이제는 3. 1정신으로 일어나 조선의 범처럼 포효하자.

100년 전 유관순열사가 죽기까지 외쳤던 자주독립정신과 안중근 의사가 적국의 법정에서 의연하게 주창했던 동양평화론을 양날개 삼아 마음껏 세계를 누려 보자. 그곳에 독수리가 폭풍 속에서 그의 날개로 그의 새끼를 업고 왔듯이, 대한민국을 세계역사의 질곡 속에서 업고 온 하나님의 뜻과 영광이 있으리라.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맹영 목사

 

2·8 독립선언서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得)한 세계의 만국 앞에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하노라. … 우리 민족은 일본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 아래 우리 민족의 의사에 반하는 운명을 당하였으니 정의로 세계를 개조하는 이 때에 당연히 이의 광정(匡正)을 세계에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또 오늘날 세계 개조의 주역이 되고 있는 미국과 영국은 보호와 합병을 지난날 자기들이 솔선하여 승인한 잘못이 있는 까닭으로, 이 때에 지난날의 잘못을 속죄할 의무가 있다고 단언하는 바이다. 또 합병 이래의 일본의 조선 통치 정책을 보건대, 합병시의 선언에 밝혔던 우리 민족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 정복자가 피정복자에게 대하는 고대의 비인도적 정책을 습용(襲用)하여 우리 민족에게는 참정권과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등을 불허하며 심지어 신교의 자유, 기업의 자유까지도 적지않이 구속하며 행정·사법·경찰 등 여러 기관이 다투어 조선 민족의 사적인 권한까지도 침해하였다. … 어느 방면으로 보아도 우리 민족과 일본과의 이해는 서로 배치(背馳)되며 항상 그 해를 보는 자는 우리 민족이니,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의 생존할 권리를 위하여 독립을 주장하노라. … 우리 민족에게는 한 명의 병사도 없다. 우리 민족은 병력으로써 일본에 저항할 실력이 없다. 그러나 일본이 만일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노라. 우리 민족은 구원(久遠)히 고상한 문화를 지녔으며, 반만년 동안 국가 생활의 경험을 가진 민족이다. 비록 다년간 전제 정치 아래에서 여러 해독과 경우의 불행이 우리 민족의 오늘을 이르게 하였다 할지라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위에 선진국의 모범을 따라 새 국가를 건설한 뒤에는 건국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민족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할 수 있게 될 줄로 믿는 바이다. 이미 우리 민족은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우리 민족에게 민족 자결의 기회를 부여하기를 요구하며, 만일 불연(不然)이면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의 행동을 취하여 이로써 독립을 기성(期成)할 것을 선언하노라.”

1919년 2월 8일 재일본동경 조선청년독립단

 

경쾌한 발걸음으로 정의와 평화의 길을 걷다.
    -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한국 그리스도인의 선언


독립, 평화, 혁명

1919년 3월 1일, 우리의 선진들은 유구한 한반도 공동체의 주인들로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독립을, 세계만방에 대해서는 평화를, 스스로에 대해서는 민주공화정으로의 혁명을 선언했다. 이 선언을 살아내기 위해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희생을 치른 선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일본제국’이 한반도와 아시아를 능욕하다가 그들의 왕 3대를 채우지 못하고 패망한 역사는 부도덕한 패권과 이웃 공동체에 대한 탐욕을 체제에 내장하는 행위, 곧 거대 집단을 범죄 조직화 하는 죄악이 자기 파멸로 치닫는다는 교훈이다. 타자에 대한 억압을 선으로 여기는 체제에게는 앞선 근대 문명과 자원이 오히려 스스로를 살라버린 땔감이었다.

우리 선진들은 국권을 되찾을 방도로 당당한 선언과 희생을, 찾아야 하는 이유로 혁명, 곧 이상(理想)을 채택했다. 무능한 왕과 귀족의 체제를 버리고 본래의 주인인 민(民)이 저작하고 이끌어나가는 민주공화제의 여정이 곧 독립의 여정으로 제시됐다.

후일 “독립이 될 줄 알았냐?”던 변절자들 만이랴, 그 때 누가 일제 사멸이 26년 남은 줄 알았을까. 부당한 압제 아래, ‘좋은 것’과 ‘옳은 것’의 판단이 갈라섰고,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옳은 것’만이 실상이라는 믿음 위에 있다. 그 믿음을 굳게 지켜 현실로 만들어 낸 희생이 얼마나 고마운가.

지성, 사죄, 평화 연대

일본이 패전 74년을 맞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기미독립선언서가 천명한대로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붙들어 지탱하는 자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데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반성과 사죄가 생존의 길이라 판단하게 하고, 그들의 도덕성을 격려할 때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피해국들의 통합성이 미약함을 보고 사죄의 절실함을 도외시한다면, 아직도 파탄 난 집단 도덕을 회복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일본에 대하여 다시 기미독립선언의 정신을 구현하려면 스스로 강한 도덕 자산을 확보하고, 그들의 위력(威力)이 크든 작든, 도의(道義)와 인도(人道)에 입각한 평화의 체제로 돌아설것을 요구하여야 하며, 이에 부합한 말과 행동을 격려할 것이다.

일본은 ‘패전 50년(1995) 총리 담화’에서 미흡하나마 식민 지배를 반성하였고, 남북한에 이를 표명했으며, 2010년 한일 양국 지식인 1,000명이 병합조약 자체가 불법이고 무효임을 밝히자, 간 나오토 총리가 이를 받아들이고,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심정’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발전은 기미독립선언의 높은 뜻을 실천하려는 양국 시민사회가 연대함으로 맺은 결실이었다. 2019년 일본의 지식인들은 1987년 한국의 ‘군부독재 정권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민주혁명’으로 인해, 1910년 병합조약의 ‘전문(前文)도 본문도 거짓’이라는 핵심적 역사 인식을 일본 총리가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도덕’과 ‘평화’라는 열쇠

일본을 탓하지 않겠다는 3.1정신은, 우리 스스로의 도덕적 자산을 돌아보라고 말한다. 그토록 인도와 정의를 갈구하던 집단이 헌정을 유린하고 정치 권력을 탈취물로 여기는 체제를 가만둔다면, 압제에 항거한 선열들을 능멸하고 희생자들을 더욱 수치스럽게 하였다면, 공정한 질서를 기만하고 차별을 온존케 한다면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 흔들리는 일본 대중들의 마음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겠는가.

2013년, ‘양승태 대법원’과 ‘박근혜 청와대’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일본 전범기업 상대 확정 판결을 고의로 지연시켜 피해자가 죽을 때까지 보상받지 못하게 한 중범죄와 2015년 박근혜 정부가 이른바 ‘한-일 위안부 합의’로 자국의 피해 당사자들을 모멸한 순간들은 참으로 어딘들 묻어버리고 싶은 우리의 부끄러움이다.

또한, 지난 74년간 해소하지 못한 분단과 남북 적대관계는 일본이 승전국에만 머리를 조아리고 희생자들을 모독하는 어그러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였다. 이를 증명하듯, 남·북·미·중 간에 평화가 예견되자 북·일 수교 논의도 되돌아오고 있다.

인간의 도덕은 완전무결의 영속이라기보다는 오류를 바로잡는 속도에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부정한 정치권력을 수년이 못 되어 평화로운 촛불로 물리쳤기에, 그 힘으로 아시아 평화의 큰길을 열어가고 있기에 실리와 도덕 모두에서 일본에게 ‘사악한 길’에서 벗어날 동기를 선물한다.

교회여, 한국 교회여…

오늘날 한국 교회는 교회 밖의 싸늘한 시선이 하나님의 경고인 줄 알아야 한다. 100년 전 선배들의 신앙 유산은 물론, 후대들이 누릴 자부심조차 갉아먹고 있다. 떠나는 신앙인들을 다잡고자 하여도 정의를 외면하는 교회는 그들을 붙잡을 매력이 없다.

3.1정신은 불의한 정권과 이민족의 압제 모두를 거부하고, 타 종교인들과 공동선을 일으켜 공동체 전체에 생명을 불어넣은 신앙의 혁명이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불의한 정권을 축복하고 압제를 미화하는 망령에 사로잡힌 줄도 모르고 타 종교인들에게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 주님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달으라고 하신다(마7:3).

복음이 이 땅에 뿌린 ‘자유’를 부정하고, 교인들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 목회자들의 헌금도둑질과 성폭행, 교회를 사유화하고 세습하는 기막힌 죄악을 보고도 저항이 없는 다수의 교인들은 주님이 다시는 메지 말라하신 ‘종의 멍에’(갈5:1)를 지고 있다.

그러나, 복음은 일하신다. 예배당이 비어가는 이유는 성도들이 광장으로 나와 ‘소리치는 돌’이 되었기 때문이다.(눅19:40) 교회의 회복은 그들을 받아낼 신앙 역량에 달려 있다.

3.1혁명이 우리게 무거운 짐을 지운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불기둥과 구름기둥처럼 우리가 갈 길을 시대를 앞서 제시하니, 이처럼 고마운 선물이 또 있을까. 우리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이 길을 걷는다.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2019년 2월 28일

교회(6곳) : 높은뜻하늘교회, 두레교회, 빛과소금교회, 사랑누리교회, 일산은혜교회, 지구촌교회

단체(13곳) : 교회2.0목회자운동, 교회개혁실천연대, 기독법률가회, 기독경영연구원,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기독연구원느헤미야, 기독청년아카데미, 성서한국, 좋은교사, 청어람ARMC, 크리스천라이프센터,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한국복음주의교회연합

3·1운동 100주년 선언문

 

우리는 올해로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천지우주의 창조주시요 인류역사의 섭리자이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한 세기에 한 번 오는 이 소중한 때에 울려 퍼지는 하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3·1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불의한 식민지 지배에 저항한 정의롭고 평화로운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이요 아시아와 인류의 미래를 위한 쾌거였다. 전 세계가 제1차 대전의 참상과 비극을 겪고도 미몽과 탐욕에 빠져 제국주의의 침탈 아래 신음하던 불의한 시절에 우리는 3·1운동을 통해 천하보다 귀한 목숨과 희생을 바쳐 인류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냈다. 그래서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저항운동, 필리핀과 베트남과 이집트의 독립운동에 영감과 기운을 주었다.

기독교인들은 이 땅에 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산다. 눈에 보이는 이 땅의 나라를 살면서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신앙인들이다. 3·1운동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길과 우리 민족의 독립의 길이 하나로 만나는 차원에서 옛 조선이 아닌 현대 한국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냈다. 현재 대한민국과 한국인의 자기 정체성은 시공물질의 차원을 넘어 영성의 영원한 세계에 심원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한국감리교인들은 교파와 종파의 벽을 넘어 천도교와 불교 등과 함께 거국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어야 만이 하늘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말씀 하셨다. 한국감리교인들은 이 생명과 진리의 빛을 따라 자신이 독립을 위해 죽으면 이웃 동포들에게, 아니 자기 자식들의 마음속에라도 민족독립의 정신을 심을 터이니 그로서 족하다는 큰 신앙으로 분투했다.

수원 제암리와 수촌교회에서는 신앙인들이 가혹한 악형과 총검의 위험을 당하는 중에도 믿음을 더욱 독실이 하여 ‘죽음은 어느 때나 올 터인즉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 예수께 전심 참으로 충성하겠다.’고 증거 했다. 죽음의 참상과 방화의 잿더미에서도 살아난 한국감리교인들의 신앙고백이었다. 생사를 넘어선 부활의 신앙으로 사랑과 평화의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오로지 걷는 신앙인의 삶이 독립운동의 역정에서 구현된 생명의 진리였다.

독립과 자주, 정의와 평화의 길이 힘겨운 고난의 길만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 한국감리교인들은 저항과 옥중투쟁의 가혹한 현장에서도 세상의 그 무엇과 바꿀 수 없고,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아름다운 환희의 영적인 삶을 누렸다. 오직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는 신앙인만이 지닐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무한한 기쁨이었다.

우리가 3·1운동 100주년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인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했고 또 그 온전한 실현을 향해 분투해온 역정을 오늘날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데 목적이 있다. 우리는 다시 큰 뜻을 품고 최선을 다해 분투해야 한다.

하나, 우리는 한국감리교인으로서 3·1운동에서 생명을 바쳐 복음의 진리를 살아낸 선조들의 신앙과 전통을 이어 받아 이 시대에 희망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다. 한국감리교회가 혼돈의 위기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손으로 새롭게 빚어져서 아직도 어두운 세력이 판을 치는 한반도와 아시아와 세계를 살리는 사랑과 평화의 샘이 되도록 한다.

하나, 우리는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체제 아래 신음하고 있는 남과 북이 화해와 평화의 길로 통일을 이루도록 헌신한다. 자주독립의 열매가 아니라 씨를 심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3·1운동에 헌신한 선조들의 얼을 되살려 평화통일의 씨를 피땀으로 심어서 우리 민족이 하나 되는 부활의 그날이 어서 오도록 한다.

하나, 우리는 인류의 일원으로서 주변 강대국들의 과도한 물질문명을 넘어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와 세계에 생명과 평화문명의 빛을 발하도록 한다. 동양과 서양의 진수를 복음의 빛으로 통합하여 3·1운동에서 제국주의를 뚫고 공존공생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낸 선조들의 길을 따라 미국과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 재편 과정에서 균형 잡힌 삶의 영성문명을 선도한다.

이제 온 누리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더욱 힘차고 환하게 펼쳐지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여기 한국감리교인들은 뜻과 힘을 모아 전 인류와 만물을 향해 3·1운동 100주년 신앙선언을 한다.

                       

                 주후 2019년 3월 1일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우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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