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로부터

Ⅰ. 들어가는 말

Ⅱ. 2·8독립선언과 3·1운동의 발단

Ⅲ. 광주3·1운동과 광주북문안교회

Ⅳ. 나가는 말

 

Ⅰ. 들어가는 말

신라시대로부터 일본은 침략근성을 가지고 왜구(倭寇)로 한반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려초기에는 일정한 물품을 조정에 바치고 고려 국왕의 하사품을 받아가는 조공무역의 형태를 취하였는데 1223년(고종 10년)에 금주(金洲;지금의 김해)를 무력으로 침입하기 시작였으며 이후 출몰이 계속되자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이 2차례의 공격을 통하여 격퇴하였으나 1350년(충정왕 20년)부터 본격적으로 한반도의 내륙까지 위협하기 시작했고 백성들을 잡아가자 고려조정은 포로송환을 위해 적지 않은 사례품을 가지고 일본에 가게 된다.

조선중기 일본은 1592년(선조 25년) 4월부터 이 땅을 조총으로 유린하기 시작하였으나,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퇴각하는 왜군 전함 300척을 격파하고 최후를 맞으면서 7년 전쟁이 종결된 것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다,

1875년 9월 20일(음력 8월 21일) 일본군함 운요호(雲楊號)가 강화해협에 불법침입한 후 1876년 2월 3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즉, 강화도불평등조약을 맺게 된다. 이는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함포로 위협해 1858년에 일본 가나가와 현 앞바다의 배 위에서 맺은 미일수호통상조약(美日修好通商條約)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1894년 발발한 동학혁명을 진압한다는 명목아래 청·일 양국이 군대를 파견하면서 벌어진 1894년 6월부터 1895년 4월까지의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승리하였고, 이어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미우라 고로를 주동으로 일본 공권력 집단이 국모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천인공노할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자, 이 땅의 백성들은 을미의병(乙未義兵)으로 항거한다, 1904~1905년에 걸친 러·일전쟁마저 승리하여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확실히 하게 된다, 1905년 11월 17일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통감부를 설치하였으며 초대 통감으로 일본 추밀원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에 파견되었다.

급기야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통감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에 날인 했다. 1주일 뒤인 8월 29일 일본은 이 ‘조약’을 공포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 국권을 상실하고 ‘조선’이란 지명으로 일본의 일부가 되었다. 일제는 칙령 제319호로 통감부를 폐지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로부터 1945년의 광복까지 35년간 한반도를 통치하게 되는데 9월 30일에는 총독부 관제 및 소속관서 관제를 공포하고 10월 1부터 이를 실시한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1910부터 1918년까지 불분명한 토지의 소유관계를 명확히 밝힌다는 명분을 내걸고 대대적인 토지조사사업을 벌여서 빼앗은 토지를 동양척식회사에 넘김으로써 동척은 곧 국내 최대의 지주가 된다.

1919년, 이 땅은 왜구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침탈로 인하여 백성들의 울분이 임계점을 향하여 들끓고 있을 무렵 두 가지 사건을 맞이한다. 헤이그밀사 사건을 빌미로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1907년 7월 20일 퇴위된 고종황제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 서온돌에서 식혜를 마시고 승하(昇遐)하게 된다. 또한 1919년 2월 8일 도쿄의 조선인 YMCA 강당에서 ‘유학생회 임원 선거회’라는 명목으로 400여명이 모인 가운데 2·8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본고는 2·8독립선언과 광주3·1운동이 광주북문안교회(현,광주제일교회) 성도들을 통하여 어떻게 연결되었고, 그 전개과정을 약술하는 가운데 만세운동을 이끈 주역들과 2019년 교회 설립 115주년을 맞는 광주제일교회와의 관계를 살핌으로써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때에 기독교의 시대적 역할을 되새기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Ⅱ. 2·8독립선언과 3·1운동의 발단 및 의의

1. 2·8독립선언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1919년 1월 18일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세계평화를 위한 제14개조의 민족자결론을 제창하게 된다. 이는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것으로 압축되는데 이는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루소의 천부인권설 즉,“모든 인간은 개인으로서의 기본적 인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창한 것이다.

이에 동경의 조선 유학생들은 조선이 독립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되었고, 1918년 12월 유학생 학우회 망년회와 동서연합웅변대회에서 독립문제를 의제로 토론을 벌이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듬해 1월 6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다시 웅변대회를 개최하고 백관수·윤창석·최팔용등 10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여 독립운동 실천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다음날 1919년 1월 7일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 독립단에는 백관수를 수장으로 최팔용·김철수·이광수·김도연·김현준(나주)·최원순(담양)·정광호(화순)·장영규(광주)·김희술(광주)등 이며,정광호·장영규·김희술은 광주공립보통학교(현,서석초등학교) 동기였다.

이광수가 작성한 2·8독립선언문에는 최팔용·윤창석·백관수·이선근·김도연·이광수·송계박·최근우·김철수·서춘·김상덕 등 11명이 서명하였고 나머지는 전략상 서명에 빠지고 거사 이후의 뒷수습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또한 황신덕·현덕신·박승호·박순천·김마리아·황에스더 등 많은 여학생들이 참가하였다.

이 무렵 동경에서는 도트가죠(戶塚町)에 있는 김희술(광주)의 하숙집에 광주 출신 최원순·정광호·장영규·박한경·손의순 등 10여명이 모여 밤낮으로 일주일에 걸쳐 10,000여 장의 독립선언문을 등사하였다. 또한 영문으로 번역된 선언서는 타자기로 쳐서 각국 대사관·영사관 및 외국 언론기관에, 그리고 일문으로 된 선언서는 일본 정계와 언론기관 등 요로에 우편으로 발송하였다.

드디어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인 YMCA 강당에서 약 4백여 명의 남녀 유학생이 모인 가운데 ‘유학생회 임원 선거회’라는 명목으로 독립선언문 선포식을 열었다. 대회는 최팔용의 사회로 백남규의 개회선언과 윤창식의 기도에 이어 서 춘과 이종근의 경과보고와 취지 설명이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백관수와 김도연이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하자 장내는 일시에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으며 우레와 같은 박수와 조선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일본 경찰이 투입되었고 최원순,백관수 등 20여명이 검거되어 9명이 구속 기소되었으며 모두 금고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이 2·8독립선언은 국내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2·8 독립선언서는 다음과 같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得)한 세계의 만국 앞에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하노라. … 우리 민족은 일본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 아래 우리 민족의 의사에 반하는 운명을 당하였으니 정의로 세계를 개조하는 이 때에 당연히 이의 광정(匡正)을 세계에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또 오늘날 세계 개조의 주역이 되고 있는 미국과 영국은 보호와 합병을 지난날 자기들이 솔선하여 승인한 잘못이 있는 까닭으로, 이 때에 지난날의 잘못을 속죄할 의무가 있다고 단언하는 바이다. 또 합병 이래의 일본의 조선 통치 정책을 보건대, 합병시의 선언에 밝혔던 우리 민족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 정복자가 피정복자에게 대하는 고대의 비인도적 정책을 습용(襲用)하여 우리 민족에게는 참정권과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등을 불허하며 심지어 신교의 자유, 기업의 자유까지도 적지않이 구속하며 행정·사법·경찰 등 여러 기관이 다투어 조선 민족의 사적인 권한까지도 침해하였다. … 어느 방면으로 보아도 우리 민족과 일본과의 이해는 서로 배치(背馳)되며 항상 그 해를 보는 자는 우리 민족이니,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의 생존할 권리를 위하여 독립을 주장하노라. … 우리 민족에게는 한 명의 병사도 없다. 우리 민족은 병력으로써 일본에 저항할 실력이 없다. 그러나 일본이 만일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노라. 우리 민족은 구원(久遠)히 고상한 문화를 지녔으며, 반만년 동안 국가 생활의 경험을 가진 민족이다. 비록 다년간 전제 정치 아래에서 여러 해독과 경우의 불행이 우리 민족의 오늘을 이르게 하였다 할지라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위에 선진국의 모범을 따라 새 국가를 건설한 뒤에는 건국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민족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할 수 있게 될 줄로 믿는 바이다. 이미 우리 민족은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우리 민족에게 민족 자결의 기회를 부여하기를 요구하며, 만일 불연(不然)이면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의 행동을 취하여 이로써 독립을 기성(期成)할 것을 선언하노라.”

1919년 2월 8일 재일본동경 조선청년독립단

여기서 2·8독립선언에 참여한 광주 학생들중 광주제일교회와 관련된 최원순·현덕신·김마리아에 대해서 살펴본다.

2. 최원순(1891~1936.7.6.)

최원순은 1891년 전남 담양에서 최의준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나 광주공립보통학교(현,서석초등학교) 4회 졸업한 후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진학하였으나 졸업을 한 달 앞두고 교내 항일사건으로 퇴학을 당한다. 만주로 가서 1916년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양성기관인 군사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참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후 동경의 조선인 YMCA에서 일하면서 와세다대학을 다녔다. 이 때 수시로 한국을 오가며 독립에 대한 강연을 하였으며 광주에서는 흥학관(興學館)을 이용하였다. 1919년 동경의 2·8독립선언의 주역이었으며,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하우회의 기관지인 <학지광>의 편집장을 맡았고, 1923년 졸업한 후 귀국하여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하게 된다.

1923년 6월 16일 동경유학중 사귀었던 현덕신과 김창준 목사의 주례로 서울 종로 중앙예식장에서 결혼을 한다.

동아일보에서 정치부장으로 있다가 편집국장 대리를 맡게 되는데 그 전임국장이 춘원 이광수였다. 1926년 8월 22일자 동아일보<횡설수설>에 일제의 총독정치를 비판하는 필화사건으로 3개월 옥살이(1926.12.20.판결)를 하게 되는데, 도쿄 2·8독립선언에 이은 고문 후유증으로 폐결핵을 앓게 된다. 1928년부터 병보석이 되었고 보석지로 광주가 지정이 되자 현덕신과 함께 광주로 내려와 무등산 기슭에 ‘석아정’을 짓고 요양중 동아일보 광주지국장을 맡아 활동한다.

현덕신이 광주금정교회에 출석하며 열심히 섬겼던 것을 본다면 최원순도 함께 했을 것으로 보이나 교회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추적해봐야할 것이다.

막역한 사이였던 최흥종 목사와 함께 애향운동을 위한 계유구락부의 결성을 주도하였고 신간회에 참여하였다. 그는 1934년 6월 28일자 동아일보에 6월 26일 새벽4시에 별세한 서서평에 대한 글을 실었다. 그리고 1934년 7월 1일자 동아일보 광고란에는 7월 7일 오후8시반 재광 각 단체연합으로 추도회를 개최한다고 하였으며 준비위원으로 최흥종·최원순·김윤식·최양준·김용환이 선임되어 있었다.

1936년 7월 6일, 광주에서의 8년간에 걸친 아내 현덕신의 헌신적 치료와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결혼 13년만에 광주읍 누문외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3. 현덕신(1896.1.12.~1963.11.27.) 집사

현덕신은 1896년 1월 12일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교회가 설립된 황해도 해주의 기독교 가정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1911년 15세에 이화학당 중등과를 입학하였고 졸업후 1916년 동경여자의전에 입학하여 산부인과와 소아과를 전공하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 동경유학 중이었던 그녀는 가슴속에 애국심을 되새기며 살았다. 항상 오빠 현석칠 목사의 말도 잊지 않았다. “너의 출신이 어디이며, 지금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언젠가 떳떳하게 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 우리 민족의 존재를 잠시도 잊어서는 안돼”라는 말이 었다.

그래서 그녀는 재일본동경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였고 2개월의 학비에 해당하는 큰 돈 40원의 자금을 의연했으며 1919년 2월 8일, 2·8독립선언에 와세다대학 2학년이던 최원순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리고 옥고를 치루고 나와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몸져누운 최원순을 간호하면서 정이 들었고, 1921년 11월 24일 동경의전을 졸업한다. 귀국후 최원순과 1923년 6월 16일 결혼하였으며, 총독부병원·동대문 부인병원(현,이화여대부속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였다. 1927년 5월 27일 서울에서 근우회 결성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28년 5월 초순 남편의 요양을 위해 광주로 내려온다. 이 때부터 광주금정교회에 출석하였으며, 금정유치원(1922년 4월 설립)을 이끌었다.

1928년 10월에 수기옥정(현,충장로 4가)에 ‘현덕신 산부인과병원’을 광주 최초로 개업하였다. 당시 조선의 여의사는 현덕신·정자영·박정자·허영숙(이광수의 부인) 등 4명 뿐이었다.

광주YWCA는 1922년 11월 초대회장 양응도(광주금정교회 제4대 김창국 목사 사모)와 총무 김필례의 주도로 설립이 되었는데, 현덕신은 1930년 1월부터 2년간 제2대 회장을 맡아 여성운동으로 부녀자들을 어둠에서 광명으로 인도하는 등불 역할을 했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다. 다음날인 16일 광주금정교회에서 김필례·김정현·조아라 등 여성사회 지도자급 70여명이 모여 건국준비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뒤이어 건국부녀동맹 초대 부회장에 선출되고,독립촉성애국부인회 3대 회장, 대한부인회 전남지부 회장등을 맡았다. 또한 1945년 12월 19일 광주금정교회 당회록에 1946년도 서리집사에 김필례·조아라와 함께 임명되었으며, 1948년에는 아들 최상옥(한국신학대학 졸업)과 함께 자신의 병원 옆에 사설 신생유치원을 설립하였다. 1954년에는 신생보육학교를 설립하여 자부 위현옥 집사(1982년 광주제일교회 권사 임직)와 함께 교육사업에 이바지 하였다. 또한 최상옥은 1959년 5월 5일 어린이날 광주공원에 어린이 헌장탑을 세워 어린이 사랑과 어린이 보호운동에 앞장섰다.

손자 최영훈 집사(전 조선대 미대 교수/ 부인 손연자 권사)가 광주제일교회에 출석하고 있고, 손녀 최새로나 권사는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4. 김마리아(1892.6.18.~1944.3.13.)

김마리아는 1892년 6월 18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아버지 김윤방과 어머니 김몽은 사이에서 김함라,김미렴에 이어 막내로 태어난다. 마리아는 세례명이자 이름으로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부친이 지어준 것이다.

그녀의 가계를 살펴보면 구한말 한국교회의 부흥과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산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부 김성섬은 첫째부인에게서 1남 김윤방, 2남 김윤오, 3남 김윤열을 낳는다. 김윤방의 첫째 딸 김함라의 남편이자 김마리아의 형부가 광주제일교회 제3대 담임목사였던 남궁혁이다. 김윤열은 서북학회의 총무였으며, 김윤오는 장티푸스로 일찍죽는다. 김성섬은 첫째부인 사별로 안성은(安聖恩)과 재혼을 하여 4남 김필순, 5남 김인순, 1녀 김구례, 2녀 김로득, 3녀 김순애, 4녀 김필례를 낳는다. 김필순은 1908년 세브란스 제1회 졸업생으로 한국인 최초 의사면허를 취득했으며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고 독립단체를 지원했다. 김구례의 남편은 서병호로 그는 소래교회를 세운 서경조의 둘째 아들이며 상해임시정부의 내무의원을 지냈다. 서병호의 손자가 서경석 목사이다.

김로득의 남편은 양응수인데 그의 여동생이 광주제일교회 제4대 담임목사인 김창국 목사의 사모인 양응도이다.

김순애의 남편은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외무총장을 지냈고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로 파견된 김규식이다. 막내 김필례의 남편은 최영욱으로 광주제일교회 제5대 담임목사인 최흥종 목사의 이복 동생이다. 최흥종 목사의 누나 최영온과 정해업의 사이에서 정율성이 출생하였고 정율성의 형제들은 큰 형 정호룡이 화순의 3·1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대부분 독립운동에 헌신한다. 최흥종 목사와 강명환 사이에서 태어난 최숙이는 강순명과 결혼한다. 끝으로 가족은 아니지만 조아라는 김필례의 제자로서 광주의 사회운동을 함께 이끌어 간다.

이렇듯 한국근대사의 큰 물줄기를 타고흐르는 가정에서 태어난 김마리아는 1896년 부친이 세운 소래(松川)학교에 들어가 고모·언니들과 함께 기독교의 박애주의와 평등사상에 입각한 신학문을 익혔고, 1901년 이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집에서 여공(女功;길쌈 등 여자들의 일)을 수업하며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5년에 아버지가, 1904년에는 어머니가 별세했다. 1905년 상급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상경한 그녀는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던 삼촌 김필순의 집에 기거하면서 1906년부터 이화학당에 입학했다가 교파문제로 연동여학교(정신여학교/현,정신여자중학교)로 전학한다. 이 때 을사늑약 이후 점증되던 국망의 위기의식 속에서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맹렬하게 전개되던 구국계몽운동을 목격하게 되었고, 또 삼촌의 집에 드나들던 안창호·김규식·이동휘·노백린·유동열·이갑 등 애국지사들을 보면서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더욱 키워 갔다.

1910년 6월 16일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후 큰언니 김함라(1909년부터 수피아여학교 교사)가 초빙하여 광주의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였고 광주땅에 하나 밖에 없는 광주북문안교회에 출석하며, 교육 계몽운동에 동참하였다. 3년 후인 1913년 모교인 정신여학교로 전근한 뒤 1914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히로시마(廣島)의 긴조여학교(錦城女學校)와 히로시마여학교에서 1년간 일어와 영어를 수학한 뒤, 동경여자학원(현, 동경여자대학교) 예비과를 졸업하고 1917년에 고등과에 입학하였다. 그녀는 조선청년독립단에 들어간 후 2·8독립선언에 가담해 일본 경찰에 붙잡혔고 이틀 동안 모진 고문을 받고 나왔다고 한다. 곧이어 조국광복을 위해 일신을 바치겠다는 굳은 의지를 세운 뒤 스스로 졸업을 포기하고 귀국을 위해 관부(關釜)연락선에 올랐다. 그녀는「2·8독립선언서」10여 장을 베껴 변장한 일본 옷 기모노의 오비(허리띠) 안에 감춰 넣고 다시 바늘로 한 땀 한 땀 꿰메어 허리에 둘렀다. 이미 요시찰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일경은 기모노 차림으로 변장한 마리아의 몸수색을 하지 않았고 차경신(車敬信) 등과 1919년 2월 15일 부산으로 무사히 들어왔다. 부산에서 우연히 상해 신한청년당에서 국내의 독립운동을 촉구하기 위해 밀사로 파견된 큰 고모부 서병호와 셋째 고모 김순애를 백산상회에서 만났으며, 대구와 대전을 거치면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일에 매진한다. 또한 2·8독립선언문을 복사하여 배포할 장소로 교사로 근무했던 광주로 결정하고, 2월 19일부터 양림리(현,양림동)에 사는 언니 김함라(남편 남궁혁 장로/숭일학교 교사겸 평양신학교 재학중)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1918년 6월 20일 결혼한 막내 고모 김필례도 남편 최영욱의 고향인 광주에 내려와 있었는데 김필례의 집에서 2·8독립선언서를 수백 장을 등사기로 등사해 그것을 다시 그것을 전국으로 배포하며 독립운동의 조직적 궐기를 촉구하였다. 2월 21일에는 서울에 도착하여 황에스더를 다시 만나 함께 이화학당 교사인 박인덕·신준려 등을 만나 동경 2·8독립선언의 소식을 전하면서 여성 독립운동의 전개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리고 황해도 봉산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3월 5일 모교인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찾아갔는데 이미 전국적으로 3·1운동이 봄 불처럼 번지고 있을 때였고, 일본 형사들은 김마리아를 붙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바로 붙잡히고 말았다. 독립운동을 촉구한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그 해 8월 4일 면소·석방되었으니 3·1운동이 끝나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고 수감된 상황이었다. 이 때 모진 고문으로 상악골축농증에 걸려 평생을 고생하였다.

그녀는 석방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여성항일운동을 북돋우고자 기존의 애국부인회를 바탕으로 하여, 그 해 9월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를 다시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된 후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는 일에 힘을 쏟던 중 그 해 11월 말 애국부인회 관계자들과 함께 다시 붙잡혔다. 김마리아는 심문을 받으면서 “한국인이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 연호는 모른다.”는 등 확고한 자주독립정신을 보였다. 3년형의 판결을 받고 복역 중 병보석으로 풀려나자 마자 인천항을 통하여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는 상해애국부인회 간부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약하였다.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였다가 1923년 6월 미국으로 건너가 1924년 9월 파크대학 문학부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28년에는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 석사학위를 받고, 1930년 뉴욕 비블리컬 세미너리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928년 2월 12일 황애덕·박인덕 등 미국에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하였다. 선생은 이 회의 회장으로서 회원들과 함께, “조국 광복의 대업을 촉진하기 위하여 재미 한인사회의 일반 운동을 적극 후원”하는 활동을 벌여 나갔다. 그리고 1930년에는 뉴욕의 비블리컬 세미너리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그런 다음 1933년 늦은 봄 13년 동안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였지만, 일제의 감시와 압박으로 말미암아 서울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 부임하여 신학을 강의하였다. 이 때에도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고문 후유증이 재발함에 따라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조국 광복을 1년 여를 앞 둔 1944년 3월 13일 별세하였다. 유언에 따라 시체는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졌다. 정부에서는 그녀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동경에서 1919년 2월 8일 2·8독립선언에 주역으로 참가했던 최원순·현덕신·김마리아는 3·1운동을 위한 불쏘시개로써 광주를 넘어 한국과 맞닿아 있었다.

5. 3·1운동의 발단및 의의

1910년대 일제의 식민통치는 가혹했다. 헌병경찰제도에 의한 무단통치로 한국인의 자유와 권리는 박탈되고, 토지조사사업으로 대표되는 약탈적 경제정책으로 대다수가 농민이었던 한국인들은 생활의 터전인 농토마져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또 우민정책(愚民政策)·동화정책(同化政策)을 목적으로 한 식민지 교육정책과 민족차별정책 때문에 한

국인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그리하여 한국인들 사이에는 기회만 오면 독립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해외 상해에서는 1918년 6~7월 무렵부터 여운형(呂運亨)·김규식(金奎植)·장덕수(張德秀)·김철(金澈)·선우혁

(鮮于爀)·서병호(徐丙浩)·한진교(韓鎭敎)·조동호(趙東祜) 등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그 해 11월 28일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에 온 크레인(Charles R. Clane)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다. 그리고 1919년 1월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고,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로, 선우혁·김철·서병호·김순애(金淳愛) 등은 국내로, 장덕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각지의 인물들과 협의하여 대규모 독립운동의 추진을 준비하였다.

미국에서는 1918년 12월 안창호(安昌浩) 등이 조직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중앙총회를 열어 이승만(李承晩)·민찬호(閔瓚鎬)·정한경(鄭翰景) 등 3인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출국을 허가하지 않자 1919년 2월 25일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을 일본의 학정에서 구할 것, 장래 조선의 완전 독립을 보증할 것, 조선은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하에 둘 것 등의 3개조로 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1918년 12월 조소앙(趙素昻)이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여준(呂準)·김좌진(金佐鎭)·황상규(黃尙奎)·박찬익(朴贊翊)·김교헌(金敎獻)·안창호·김규식 등 39명의 서명을 받아 이듬해 2월 1일 이를 발표하였다. 음력으로 무오년(戊午年)에 작성되어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이라고도 불리는 ‘대한독립선언서’는 무장투쟁으로 완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독립군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일본의 경우는 1919년 2월 8일 2·8독립선언이 발생하여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음을 위에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1918년 말부터 국내의 천도교와 기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윌슨의 14개조 강화원칙에 포함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독립 요구를 위한 운동을 계획하였고, 이후 종교 지도자들이 실질적으로 주도하게 된다.

2·8독립선언을 촉발한 파리강화회의의 민족자결주의나 고종황제의 갑작스러운 승하가 간접적인 3·1운동의 동인이라면 직접적인 원인은 다음과 같다 할 것이다.

➀ 한국인의 독립에 대한 갈망,

➁ 일제의 엄한 군정과 횡포,

➂ 민족성 말살기도,

➃ 사법기관이나 행정기관에서의 한국인 배제 및 차별,

➄ 임금·교육·법 적용에서의 한국인 차별대우,

➅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박탈,

➆ 종교의 자유 제한,

➇ 한국인의 해외여행과 유학금지,

➈ 비옥한 토지의 약탈,

➉ 공창제도 및 마약 방임 등 한국 청년의 비도덕화와 퇴폐풍조 조장,

⑪ 만주에서의 한국인 강제이민,

⑫ 일본인을 위한 개선과 한국인에 대한 착취 등 이다.

한편,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여러 종교인들이 주축이 되었던 3·1운동에 특이한 것은 기독교인의 투쟁방법이 제시되었다는 것인데 “➀ 일본인을 모욕하지 말 것 ➁ 돌을 던지거나 주먹으로 치는 폭력을 사용하지 말 것 ➂ 매일 기도와 성경 묵상을 통해 신앙투쟁으로 전개할 것” 과 함께 1주일간 읽을 성경구절을 제시하였다.는 것 무저항 비폭력을 의미한다.

끝으로 3·1운동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➀ 3·1운동으로 일제가 1910년부터 9년간 닦아놓은 식민지 무단통치와 한국민족 말살정책이 근본적으로 붕괴되고, 잔혹한 식민지통치의 진상이 전세계에 폭로되었다.

➁ 3·1운동으로 어떠한 힘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독립운동 역량이 비약적으로 고양되고 강화되어, 한국민족의 독립쟁취의 주체적 실력을 내부적으로 확고부동하게 세워서 독립을 스스로 튼튼히 보장하였다.

➂ 3·1운동으로 상해에 공화정체의 새로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써 9년간 단절되었던 민족정권을 계승하게 되었다.

➃ 3·1운동으로 만주와 노령에서 독립군 부대들이 조직되고, 독립군의 무장투쟁이 비약적으로 고양되어 국경지방에서의 국내진입작전까지 감행하게 되었다.

➄ 국내에서 일제의 잔혹한 탄압을 물리치고 극소 부분이나마 언론집회결사의 부분적 자유를 쟁취하여, 민족문화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는 민족보존운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➅ 3·1운동으로 국내에서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함으로써 농민노동자의 권익향상뿐만 아니라 민족독립운동에도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➆ 3·1운동은 한국민족 스스로의 실력에 의하여 국제적으로 한국민족의 독립을 보장받아 냈다.

이필성 안수집사, 광주대학교 강사 역임, 조선대학교 대학원(무역학) 박사, 조선대 철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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