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해석과 과학적 해석의 사이에서

창세기 과학적으로 접근하기?

교회에서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대해 창조론이 맞는지? 진화론이 맞는지? 이런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을 말려야 한다. 창세기의 창조이야기를 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과학적 접근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오히려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

C. S. 루이스, “과학이론을 움켜잡는 일에 주의해야 한다.” “과학이 이제 증명했다고 시작되는 문장은 피해야 한다.”

과학자 진 폰드(Jean Pond), “성경은 과학적 문서로 해석되지 않아야 한다.” “창세기에 대해 우리가 어떤 과학적 주장을 하든지 우리는 실수를 하는 셈이 된다.”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 (Helmut Thielicke) “창조 기사는 어떤 과학적인 관심거리가 될 수 없다.” 신학자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는 “창세기 1장은 P 문서의 교설이다.”

신학자 고든 웬함(Gordon J. Wenham)은 “성경 대 과학의 논쟁은 창세기 1장의 독자들을 곁길로 빠지게 했다.”

신학자 월터 브루거만(Walter Brueggemann)은 창세기 본문은 “과학적인 진술이 아니라 신학적인 주장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주장한다.

창조론자들이 성서 해석에 대해 과학적 해석으로 해석하는 것과 신학자들이 신학적 해석을 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종교적 문서를 과학적 해석으로 접근하게 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창세기는 과학적 해석(주로 자연과학 분야)인 어떻게(How?)라는 질문으로 출발하고, 신학자들은 신학적 해석인 왜 (Why?), 누가(Who?), 무엇 (What?)이라는 질문에 초점을 두고 출발하므로 질문의 출발점부터 매우 다르다.

여기서 자연 과학적 방법은 (1)관찰(observation), (2)인과론의 단계(cause and effect), (3)가설(hypothesis)의 단계, (4)실험을 통한 증명(proof)을 하려는 해석 방법을 말한다. 그러나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이 4단계를 통한 증명 할 수 없으므로 과학적 해석에는 매우 주의가 필요하다. 즉 과학적 해석 방법은 어떻게(how)? 에 대한 출발이다. 또 과학적 해석방법은 사실인지, 아닌지를 밝히는데 더 큰 목적이 있다.

신학적 해석은 각 본문이 어느 시대의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썼는지에 대해 알아보고 어떤 상황에서 무슨 동기로 썼는지에 대한 저자의 의도, 즉 그 당시 청중이 독자에게 무슨 의미를 주려고 썼는지에 대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적용하려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다. 신학적 해석은 왜(why)? 누가 (who)? 무엇(what)? 등 저자의 의도를 찾아서 우리의 삶에 적용까지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래서 신학적 접근 방식과 과학적 접근 방식에는 그 출발점부터 매우 다르다.

 

창조 이야기, 과학적 해석과 전혀 다른 본문

창조론과 진화론은 과학자들 사이의 논쟁이며, 또 특히 창조이야기도 과학자들 사이 인류의 기원에 대한 논쟁이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와 창조론자들이 창조에 대한 과학적 해석의 창조론과는 사실 아무런 관련이 없다. 창조론 진화론 말만 나오면 기독교인들은 창조과학자들이 강조하는 창조론이 맞는다고 자동으로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창조 이야기와 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과학적 해석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본문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주로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에 더 가까운 그들 간의 논쟁일 뿐이다. 인류 기원에 대한 과학적 논쟁에 증명하려는 순간 창세기는 오히려 과학적 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전 세계에서 제대로 공부한 신학자 중에서 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과학적 창조에 대해 동의하는 신학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읽으며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해 휘말려 들 필요가 없다. 창조 기사는 창조론이나 진화론과는 관련 없는 창조 이야기이다. 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과학적 증명을 하려는 창조론자들과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성경의 창조 기사와는 한참 다르다.

 

창조이야기, “누가?” “왜?” “무엇?”로 접근

창세기는 기원전 4천여 년 전부터 구전으로 내려오던 것을 기원전 1,500여 년 전에 쓰인 것으로 여겨진다 (저작설과 저작 연대는 아직도 논쟁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어떻게(how)란 질문으로 절대 풀 수 없는 본문이다. 누가(who?), 왜 (why?), 무엇(What?)으로 신학적 해석으로 출발할 때 풀 수 있는 본문이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누가(who?), 왜 (why?), 무엇(What?) 때문에 창조했는가? 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포로 생활할 때 가져온 이방인의 창조신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상 대대로 믿어 오던 창조 이야기, 그들이 믿던 하나님 (엘로힘)이 창조신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왜(why) P 기자(제사장)가 이것을 교설(설교) 했는가? 저자의 의도가 무엇일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에서 동팔레스타인 (Eastern Palestine)으로 이동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당시 주변국에 많이 있던 창조 신화를 가지고 와서, 유대인들은 그들이 믿던 유일신을 믿지 않고, 이방 신들의 여러 창조신을 가지고 와서, 이 모습을 본 P 기자(제사장)가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포로 생활하면서 섬기던 저 이방인들이 믿던 창조신이 아닌, 당시 유대인들이 믿던 유일신 하나님(엘로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교로 선포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창조론자들이 한국 교회에서 본인들이 경험한 과학적 지식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가 크다는 것을 과학적 지식을 통해 간증 (고백) 하는 것은 허락될 수 있지만, 성경을 과학적 해석을 하려는 시도는 분명히 위험한 해석임을 지적해 주어야 한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과학적 시도는 기독교적 사고가 아니며, 기독교적 해석 방법도 아니며, 일반적인 신학적, 종교적 사고도 아니며, 신학자들에게 검증된 것도 없으며, 권위가 있는 신학계 또는 종교학계에 검증된 논문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어떤 창조론자는 진화론자들과 논쟁한 과학 관련 논문을 수천 개 제시하는 경우도 있는데, 여기서 권위가 있는 신학계나 종교학계에 검증된 논문을 말한다. 권위가 있는 신학계나 종교학계 저널에 검증된 논문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성경은 과학 문서가 아니고 종교적 문서이다. 그래서 성서 해석에 관한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신학계나 종교학계 저널이나 이쪽 학자들에게 검증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직 창조론자들이 권위 있는 신학계(혹은 종교계) 유명 저널에 검증받은 것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혹시 필자가 모르는 검증된 것이 있다면 알려주면 좋겠다.

반대로 생각해서 신학자가 과학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과학 관련 논문을 써서 “셀”이나 “네이처” 같은 권위 있는 과학 저널에 논문을 제출한다고 해서 통과될 리도 없고, 모르고 통과된다고 하더라도 그 권위를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창조에 대한 창조론자들의 과학적 해석에 대해 신학계에서 논문으로 검증받은 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과학은 과학자에게 성경은 신학자에게

인류의 기원에 대한 이론은 과학자들에게 맡기고, 창세기 해석 방법은 신학자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 한국 교회는 창조론자들이 성경을 (예, 창조사건, 노아의 홍수 사건 등) 과학적으로 밝히려는 그들의 노력에 좋아하기보다는 위험성을 알릴 필요가 있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누가, 무엇? 에 대한 저자의 의도가 중요한 것이지 과학적으로 증명한데 초점이 있는 게 아니다. 노아의 사건, 창세기에 나오는 흙으로 사람을 만든 사건 등 수많은 성서의 기적 사건이 사실인지, 아닌지 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런 과학적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결국 과학적 증명이 되지 않는 부활 사건, 흙으로 사람을 만든 사건 등 수많은 성경의 기적 사건에 대해 증명 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이 오히려 거짓말이라고 과학적 증거를 제시해 주게 되는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과학적 증명을 통해 성서를 해석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성서해석을 하는 데 해가 될 수 있다.

다만 한국 교회가 기독교인 창조론자들이 한국 교회에 와서 본인들이 과학을 통해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신앙 간증은 허락될 수 있어도 성경을 과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매우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일부 성경을 과학적으로 증명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 그건 다른 단군신화나, 다른 종교의 경전에서도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문구만 골라서 과학적 증명 하려 든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창조, 신학적 의미를 알려 주는 게 중요해

우리는 창세기를 읽을 때 (다른 성경 본문도 마찬가지) 끊임없이 성경을 쓰게 된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찾는 게 중요하다. 왜 썼을까? 내게 주려고 하는 종교적, 신학적 의미는 무엇일까? 어떤 배경에서 저자가 이 말을 했을까? 어떤 문화적 배경에서 당시 저자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했을까? 그 의미가 오늘을 사는 내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성경을 읽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창세기의 수많은 질문과 성경의 수많은 기적 사건들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성경의 말씀을 순수하게 그대로 다 믿어도 전혀 상관없고, 전혀 손해 볼 일도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창조 이야기를 수천 년 동안 전승되어오던 창조 이야기를 그대로 믿었듯이, 우리도 그대로 믿어도 전혀 문제가 될 게 없다. 다만 과학적 증명을 통해 성경을 해석 하려 하면 오히려 큰 문제를 만들게 된다.

창조론에 관련된 간격 이론, 날-시대 이론, 연대기, 골격 가설, 유신론적 진화론, 점진적 창조론, 성숙한 창조론, 문자적 6일 창조론 등 수많은 분야에 걸쳐 수백 개의 대부분 질문도 출발점이 모두 어떻게(how)라는 현대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관점에서 해석하려 해서 생기는 문제들이다. 이런 질문에 과학적 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성경을 억지 끼어 맞추기 식 해석을 하게 되는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흙으로 사람을 지은 이야기나 부활 사건, 그리고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 등 성경의 수많은 기적 사건을 과학적 증명을 하려 할 때 성경해석에 오히려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이제 더는 성경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신중해야 한다. 창조론자들이 창조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려 할 때 오히려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창조 이야기는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신앙 고백과 선포라는 신학적, 철학적, 심리학적, 종교적 영역에 속하는 믿음과 고백의 영역이다. 과학적 해석의 영역이 아니다. 신학과 과학은 얻고자 하는 진리의 대상도, 영역도 다르며 연구 방법도 다르며, 해석의 출발점도 다르기에 그 결과도 매우 다르다.

그래서 C. S. 루이스, 과학자 진 폰드(Jean Pond),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 (Helmut Thielicke),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 고든 웬함(Gordon J. Wenham), 월터 브루거만(Walter Brueggemann) 등 많은 신학자들의 주장에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어떻게(How?)로 시작하는 과학적 해석이 아니라 저자의 의도가 왜(why)? 누가 (who)? 무엇(what)? 에 초점을 둔 신학적 해석을 할 때 풀리는 본문이다.

김동규 목사, 본헤럴드 호주 특파원, The University of Sydney. Ph.D. (종교학) 저서 - 한국 기독교와 문화 : 한국 교회의 하느님. 하나님 이해 (신성출판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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