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이타공동체(利他共同體) 교회의 이전투구(泥田鬪狗)

권위란 권세와 위엄이다. 인간은 권력지향적인 존재다. 권위나 권세는 권력에서 나온다. 원래 약육강식은 동물계에서의 생존 법칙이다. 인간이 서로의 영역과 불편한 차이를 수용하고 더불어 살 수 있다면 싸움과 전쟁의 역사를 능히 퇴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바람은 단지 이상이다. 현실은 더불어 살려는 인간의 발목을 잡는다. 갈등과 투쟁을 극복하지 못하고 상대를 제압해야 자신이 생존할 수 있는 상황에서 누구나 동물적인 본능을 보인다. 내가 살기 위해선 상대를 죽여야 한다. 상대를 눌려야 내가 편하다.

전형적 이타공동체인 교회 역시 이런 이전투구의 양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하며 눈물짓지 않을 수 없다. 순교자의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르면서 자신의 작은 고집과 주장 하나 꺾지 못해 앙앙불락한다면 이 무슨 비극인가! 자기 부정의 십자가를 외치고 수난절에 아합처럼 조심스런 행보를 보인 직후에 갈등을 조장하고 분쟁의 불꽃놀이에 앞장서는 아이러니란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다. 왜 이토록 사람들이 악착같이 되었고 힘을 갖기 위해 사생결단이 되었는가? 저마다 간직한 쓰라린 경험 때문이다. 역사를 통해 인간이 터득한 교훈은 한두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통솔하고 억누를 수 있는 것이 바로 힘임을 알게 되었다.

 

정당 권력의 널뛰기에 뒤처지는 역사

권력을 향한 인간의 의지는 매우 강하다. 니체는 이 권력 의지를 찬양했다. 운명에 굴복하기보다 힘의 의지로 투쟁하며 극복하고 극복하는 ‘극복인’(Übermensch)을 지향했다. 자기 자신을 극복해 자기 자신이 되려는 의지였다. 권력 의지의 산물로 권력을 획득하면 곧바로 권력을 행사하려는 의지가 강력히 작용한다. 강자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약자 역시 자기보다 더 약한 자를 억누르는 의지로 똘똘 뭉쳐있다. 무소불위의 권력이 행사되었을 때 그 파괴력이 얼마나 엄청난지 우리는 알고 있다. 소수를 위한 달콤함 때문에 절대 다수는 쓰디씀을 맛보아야 했다. 권력의 균형적 분배를 통해 다수의 권익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 결과 족장과 왕권은 무너지고 독재자의 설 땅도 좁혀졌다.

부당한 권력에 대한 거부는 개인의 분노가 집단적인 항거를 거쳐 민중 봉기로 결속되면 반란이나 혁명을 거쳐 권력 해체와 힘의 재편성이 이루어진다. 다수의 권익은 향상되지만 그와 같은 변화를 가져온 주체 세력이 다시 새로운 권력으로 자리 잡는다. 합법적인 과정을 거치지만 권력 찬탈로 규정하는 항거 세력이 남아있는 한 새로운 권력은 비합법이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역사의 평가는 준엄해서 500년 후에라도 합법과 비합법은 가려진다. 어떤 형태의 권력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조국은 정당 권력의 변천에 따라 법 적용의 잣대가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하면서 역사의 사이드미러를 자주 들어다봄으로 세계인들과의 경주에서 뒤처지곤 한다.

 

인간의 어떤 제도도 완전한 평등은 없어

하나의 체제를 수용하면 체제는 그 사람에게 안전과 보호를 약속하고 그 사람은 체제에 자신을 순응시켜야 한다. 그렇게라도 질서와 평화가 보장되면 서로에게 득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권력 구조를 회피할 수 없다. “더”(more)와 “덜”(less)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 사회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조 아래 갇힌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인간의 권익 보장에 가장 근접한 제도로 정착된 것이 민주주의다. 불완전해도 민주주의는 하나의 대안이다. 어떤 제도도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지 못한다. 결국 자유와 평등은 제도보다 인간 내면에서 스스로 구축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권력의 속성상 권력자가 등장하면 그가 펼친 우산 밑에 기생하며 보호와 안전을 보장받고 권력의 핵심에게 충성하는 아류가 생긴다. 권력은 나눌 수 없기에 권력자가 측근 세력에 의해 자신의 권력이 일부라도 침해당한다고 느끼면 즉각 숙청과 보상을 통해 주변을 정리한다. 측근이 뒤바뀐다. 피라미드와 같은 정점에서의 권력 구조가 와해되고 피자 조각처럼 민중에게 골고루 권력이 나누어지면 세상은 좋아질까? 권력의 성질은 나눠지지 않음에 있다. 나눌 수 없는 권력을 수렴된 민의나 다수의 합의로 나눈다 해도 일시적이다. 작은 피라미드들이 무수히 형성된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피라미드의 정점을 주시한다. 하지만 피라미드의 중간 지점에 과녁을 겨누는 이들도 있다.

 

현실에서 절대적인 안정은 존재할까?

장안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스카이캐슬>은 스카이(S.K.Y)를 출세와 권력의 최고봉으로 간주하는 한국사회의 피라미드식 경쟁 현실을 풍자 고발한 작품이다. 극중에서 별로 돋보이지 않으면서도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낸 우양우, 진진희의 아들 우수한이 내뱉은 말은 스카이캐슬이라는 전통적 관념의 피라미드를 사정없이 깨뜨리는 방망이 같은 압권이었다. “피라미드에서 미이라는 꼭대기에 있는 게 아니래. 중간이 제일 좋은 자리라고. 그러니까 거기 있지.” 현실에서도 이런 절대 권력 대신 안정 추구의 신념이 살아남을 것인가?

분산된 권력이 가져오는 것은 질서보다 혼란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거나 세워주지 못하면 대등한 서로는 이내 대칭 국면에 접어든다. 대칭 상황에서는 언제나 힘의 균형이 돌발 사태를 억제하는 기능을 하지만 그만큼 긴장감이 팽팽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는 서로를 견제하고 상대의 경계를 넘어설 수 없는 평균적 권력들은 저마다 집단 이기주의의 온상이 되어버린다. 무서운 정적 같은 긴장을 견디지 못하면 대칭(對稱)이 대항(對抗)으로 바뀌고 경계 침범이 이루어져 싸움을 통한 권력의 재집결이 일어난다. 지금 미국과 북한의 정치적 협상 국면은 핵무기를 둘러싼 힘겨루기다. 대칭이 대항으로 급변하면 한반도는 재앙에 휩쓸리기 쉬우므로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운다.

 

언제나 동(動)을 지향하는 권력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함은 액튼(Acton) 경의 혜안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수없이 증명된 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권력을 좇고 절대 권력에 집착한다. 이것은 인간의 오만함이며 어리석음이다. 권력은 수평상태를 못 견뎌 한다. 권력은 정(靜)의 상태를 못 견뎌하고 늘 동(動)을 지향한다. 반드시 위아래 층을 구분 짓고 위에 머물기를 고집한다. 권력은 계급을 낳고 계급은 인간이 인간을 구속하는 역작용을 일으킨다.

씨족 사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급 사회의 구조 속에서 인간이 보여준 폐해에 반기를 들고 계급 없는 사회를 내세우는 공산주의자나 아나키스트들이 억눌린 민중들을 파고들었다. 계급 철폐를 아무리 부르짖어본들 인간 현실은 한 순간도 계급 없는 상황이 없다. 사회생활을 통해 인간이 습득한 것은 위계질서가 보여준 질서와 안정감이었다. 자신의 소유와 자유가 침범당하지 않으면 계급이 사라진 불확실한 사회보다 계급이 있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그 자신 사회주의자이면서 계급의 현실을 작품 세계에서 보여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그의 친구요 전기 작가인 조지 우드콕(George Woodcoak)에 의해 ‘상징이 되기엔 너무 혼자고 성자가 되기엔 너무 분노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음미할수록 일품 멘트다. 사람은 권력을 떠나거나 계급을 초월해서 살 수 없다. 모든 체제와 힘과 계급을 초극한 인물로 살아가기에 우리는 너무 속물이다. 세상을 살아가기엔 성자보다 속물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조직의 일원이기를 거부할 수도 없고 실제가 아닌 관념, 실존이 아닌 상징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생활인으로서의 인간이다. 안타깝지만 분노하는 개체로서 나는 실존한다.

 

세속적 권위를 걸치는 교회 지도자

한국교회 목회자 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말은 권위다. 주어진 권위를 적절하게 나타내는 것은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 절실하다. 문제는 권위가 권세의 속옷과 권력의 겉옷을 걸치기 좋아한다는 점이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서 전반적으로 느끼는 것은 권위주의다. 대형교회, 소형교회 가릴 것이 없다. 목사직이 주는 어떤 힘 때문일까? 가진 자는 덜 가진 자에 비해, 덜 가진 자는 아예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해 비뚤어진 권위를 보인다. 장로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필자는 장로 대의원 제도를 우려하는 입장이다. 비현실적인 생각인줄 알면서도 그렇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을 목사들이 만들어 놓았음을 100% 인정하기 때문이다. 목사들의 죄가 크다.

목사와 평신도를 대표한 장로의 파송을 민주적 대의 제도의 실현이라 하지만 득보다 실이 많다. 총회에서 보이는 것은 역기능적인 것이 많기에 장로들이 배우는 것도 순기능적이 것이 거의 없다. 총회에 참석하고 나면 장로의 영성은 죽고 정치 맛에 물들기 쉽다. 장로들이 결집하면 지방회(노회)나 총회에서 정치 세력화하고 그 힘은 막강하다. 일부이긴 하지만 회의에서 발언하는 내용도 투쟁적이고 태도도 방약무인이다. 정치 목사와 결탁하면 총회가 어지럽다. 장로 대의원들의 책임을 추궁함이 아니다. 총회가 회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100년이 가도 정치 세력에 의해 농단당하는 교단의 모습은 변치 않는다. 소수의 정치 목사들이 주창하고 비정치적이라 생각하는 다수가 묵인하고 방조한 결과이니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권위는 가성(假聲)이 아닌 진성(眞聲)에 있어

교단은 성경의 산물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지 교단의 머리가 아니다. 주님이 오셔서 제일 먼저 하실 일은 교단 통합이 아니라 교단 해체일 것이다. 조직으로서의 한 교회 안에서도 분쟁과 갈등이 있고 같은 지방회나 노회에서도 분쟁과 갈등이 봉합되지 않는데 교단이 일치단결하기가 그리 쉽겠는가? 하물며 교단 대 교단의 통합이겠는가! 이런 판에 종교간 대통합을 주장하는 이들의 두뇌는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고픈 생각이 든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함은 원시 상태의 그 작고도 강한 교회, 약하지만 굴하지 않는 교회, 조직(organization)보다 살아있는 유기체(organism)로서 세상에 확연히 드러나는 모습으로 회귀함을 뜻한다.

지도자가 권위를 내세우는 현장에서 느끼는 것은 역겨움이다. 개인으로서의 형편은 처절하다. 아무 힘도 없다. 조직에서 부여된 어떤 힘이 작용하면 일순간 괴물로 변한다. 이 정도는 약과다. 권위주의를 즐기는 계층이 있다. 제거되어야 할 악의 축이다. 권위주의의 한 작은 예를 들자면 이렇다. 일상에서의 목소리와 설교에서의 어투가 다르다면 문제다. 대개 정치가의 대중연설이나 설교나 강연에서는 전하는 바를 강조하거나 일상 대화와의 차별을 보이기 위해 어조에 강약의 변화를 꾀한다.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지시하거나 상관이 부하에게 명령을 하달할 때도 평소와는 다른 어투를 보일 수 있다. 문제는 목소리에 지나칠 정도의 힘을 실어 일종의 권위를 과시하려는 유치함이다. 소위 가성(假聲) - holy voice다. 윗자리에 있을수록 본래의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 권위는 가성(假聲)이나 변성(變聲)이 아니라 진정성과 진솔함이 실린 진성(眞聲)에 있다. 이런 권위도 필요한 것이지만 우선적이어야 할 것은 바나바의 권위(勸慰)다. 그는 안디옥교회의 탁월한 지도자였다. 그는 권위를 나타나 보임으로 지도자의 권위를 유지하지 않았다. 그는 권면과 위로를 통해 권위자(勸慰者)가 됨으로 권위자(權威者)가 되었다. 섬기면 섬김을 받고 버리면 얻는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