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는데 철학이 필요한가?

현대 인간은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과학의 지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과학적으로 맞지 않으면 어떠한 것도 거부한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을 앞뒤로 잘 끼워 맞추어서 인간의 이성에 거스리지 않으면 진리가 되고 인간의 이성에 맞지 않으면 거부당한다. 믿음이라는 것도 철저히 인간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믿음이다. 이러한 인간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은 철학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철학은 인간의 지혜의 꽃이다. 인간의 지혜인 철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철학은 성경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철학은 성경과 충돌된다. 골2:8절에 보면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쫓음이요 그리스도를 쫓음이 아니니라”고 했다.

예수를 믿는데 철학이 필요한가?

예수를 믿는데 플라톤 데카르트 헤겔 칸트 노자 마르크스 사상들을 알아야 하는가? 철학은 그리스도를 쫓는 것이 아니다. 고전2:4-5절에 바울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 충돌이 없이 전제 없는 해석은 불가능하다 하면서 인간의 철학을 전제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성령의 지혜를 모독하는 행위이다.

고전2:13절에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친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 하느니라 했다.

바울이 왜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조심하라고 했는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는 그리스도를 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미련하게 본다(고전1:18,23). 반면에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지혜를 어리석게 본다(고전1:19-20). 둘이 공존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는 섬기는 것과 같고 빛과 어둠이 사귀는 것과 같고 그리스도와 베리알을 동시에 섬기는 것과 같다(마6:24,고후6:14-15).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지혜로는 절대 알 수 없다. 인간의 지혜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았더라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다(고전2:8).

철학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만하게 만든다. 물론 거짓된 겸손은 얼마든지 있다. 종교인들 대다수가 겸손한 것처럼 행동한다. 특히 유대 종교의 율법은 거짓 겸손으로 위장되어 있다. 이것은 또 다른 인간의 철학일 뿐이다.

철학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인간의 지혜이다. 철학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원수관계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는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고전1:25).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사람이다(고전2:12).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보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의 지혜가 더 낫다.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사람은 인간의 지혜와 철학이 미련하고 어리석다는 것을 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 철학를 보아야 복음이 전해진다고 하는가?

인간의 지혜인 철학을 공부해야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가? 하나님의 지혜인 성경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충분하게 알 수 있다. 철학이 없어도 성경은 인간의 죄의 깊이를 충분하게 말해주고 있다. 오히려 성경이 죄의 깊이를 더욱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따로 철학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 성령이 충만을 구하고 성령에 충만해야지 철학을 공부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철학과 성경이 어울릴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지혜는 이 둘을 교묘하게 조화시킨다. 물론 성령과는 관계없다. 문제는 예수를 믿는다는 인간들이 철학은 복음이 아니라고 하면서 복음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복음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슬거머니 인간의 지혜 속으로 성경을 끌어들인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를 인간의 지혜로 전락시켜 놓고 빈틈없이 성경해석을 했다고 승리의 노래를 부른다. 여기에는 뿌리가 말라 죽은 앙상한 가지는 있을지언정 생명의 푸르름은 없다. 이러한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빠진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이러한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은 기도를 하지 않고 성경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하면 무능한 인간이 되고 성경을 보면 인간의 지혜가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만 나타나기 때문에 성경을 보지 않는다. 그들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빠져 있기 때문에 성경에 귀를 기울일 수 없다. 그들은 인간의 지혜로 무장해 있기 때문에 똑똑하고 비판력이 강하고 예리하고 빈틈이 없고 말꼬리를 잘 물고 자기 방어에 강하고 위기가 오면 잘 빠져나간다.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가지고 노는 인간들이다. 예수님을 유혹한 마귀도 성경에 능통하다(마4:1-11). 마귀는 항상 성경을 가지고 유혹한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성령의 사람이 아니면 분별하지 못한다(요일4:1). 인간의 지혜는 정말 위대하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가 위대할수록 그리스도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인간의 지혜는 그리스도를 쫓아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령의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해서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미련하다. 대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고 고난 속에서도 그 은혜로 인해 기뻐한다(고전2:12, 행5:41).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성경 말씀이다. 성경 말씀대로 한다면 분명히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찬은커녕 멸시와 천대와 핍박이 날아온다. 그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능력 있게 드러난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는 세상으로부터 멸시받고 핍박 받는 것을 본능적으로 피한다. 성경을 조금만 관심 있게 보면 이런 꼴은 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을 보기 싫어하는 사람은 이유가 무엇이든 성령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예수 성경 십자가 고난 핍박 부활 영광 이야기를 거품을 올려 가면서도 성경을 보기 싫어하는 인간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빠져있는 악마의 하수인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십자가의 고난을 입술로는 외치지만 정작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교만이 넘쳐서 입만 열면 하나님이 하신다 성령이 하신다고 하면서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는 손 하나 가딱 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의 지혜로 충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갈 틈이 없다. 그들은 성경도 하나님도 비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사도바울의 사역이 성령의 사역이라 하면서 정작 자기 옆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는 사람은 정죄한다. 성경을 이용하여 자기 자존심을 채우는 지혜로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예수 이름으로 당하는 핍박도 없고 고난도 없다.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인간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인 성경마저도 인간의 지혜로 만드는 무한한 능력이 있다.

이단이 왜 생기는가? 성경을 인간의 지혜로 돌려버린 이 교묘함을 누가 알겠는가? 성령만이 알고 성령을 받은 자만이 안다.

성령 안에 있지 않은 인간은 맞는 말을 듣지만 진리는 거부한다.“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로 돌아가느니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쫓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쫓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골2:20-23).

그리스도로 부족해서 철학을 공부하는가? 예수 믿는데 인간의 지혜가 필요한가?

성경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지혜를 알기 위해서 인간의 지혜를 동원해야 하는가? 한국교회에 존재하는 마귀보다 더 악랄하고 교묘한 마귀가 바로 성경을 이용해서 인간의 자존심을 채워주는 인간들이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는 자기를 편하게 해 주는 피이고 자기 자존심을 마음껏 세워주는 피이고 헌금 안 해도 되는 피이고 자기 욕심 부리는 피이고 말씀 안 듣고 놀러가도 되는 피이고 전도 안 해도 되는 피이고 성경도 필요 없는 피이다. 주님이 알아서 하신다. 성령께서 알아서 하신다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의 편리를 추구한다.

그런데 주님이 알아서 하시는데 성령께서 성경을 왜 기록했을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했는데 왜 쓸데없이 성경을 주셨을까? 성령께서 알아서 하시는데 사도바울은 왜 그런 고생을 했을까?

사도바울에게는 죽으라고 고생하는 성령이 임했고 우리에게는 게으르고 방탕하면서 비디오 보고 성경 안보고 전도 안 해도 되고 기도 안 해도 되고 이래도 죄 저래도 죄 하면서 할 짓 안 할 짓 다 하면서 인간의 지혜인 답이 없는 철학공부나 하면서 자기 자존심 세워주는 성령이 임했는가?

주를 위해 죽고 싶은 마음이 없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지 않는 인간은 아무리 위대한 철학적 괴변을 늘어놓아도 악마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쫓음이요 그리스도를 쫓음이 아니니라"(골2:8).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골2장에서 철학 뿐 아니라 헛된 속임수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는데 헛된 속임수란 유대교가 율법을 이용한 장로의 유전들이다. 그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일부러 겸손한척 하고 천사를 숭배하면 더 나은 인간이 된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했다. 머리를 붙들지 않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참 신앙은 율법주의자들을 배격할 뿐 아니라 인간의 철학의 지혜에 속아서도 안 된다.

골2장의 철학을 유대교의 율법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율법을 왜 철학이라고 했는가? 바울이 철학과 율법을 구분하지 못하고 말씀을 했는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는 인간의 철학과 유대교의 율법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이것들에게 속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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