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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8장. 성벽 완공 후 율법을 공포하고 준수(遵守)함느헤미야 3장. 느헤미야 북서남동 성벽 수축, 1장, 2장, 예루살렘 총독으로 파견되다.

1. 성벽은 52일, 엘룰월 25일에 마쳤다(6:15). 엘룰월은 6월이고, 7월 초하루에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의 율법 강해를 경청했다(1-2절). 에스라는 새벽에서 정오까지 율법책을 읽으며 강론했다(3절). 에스라는 특별하게 만든 나무 강단에서 강연했고, 오른쪽에 맛디댜, 스마, 아나야, 우리야, 힐기야, 마아세야가 있었고, 왼쪽에는 브다야, 미사엘, 말기야, 하숨, 하스밧다나, 스가랴, 므술람이 있었다(4절).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위인들은 에스라가 전하는 강론의 증인이고 권위였다. 에스라가 율법을 해석할 때 백성들이 아멘, 아멘으로 응답하며 여호와께 경배했다(6절).

백성들이 아멘, 아멘 할 때에도 에스라 좌우에 있는 동역자들이 함께했다(7절). 오늘날 장로교의 말씀사역자의 형식적 권위는 노회에 있다. 뒤에 앉는 것이 아니라 옆에 서 있는 모습이 8:4의 말씀이다. 참고로 예배에서 말씀을 전할 때 뒷자리에 앉아있는 모습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2. 에스라와 동역자들은 백성들이 율법을 깨닫게 했다(8-9절). 성경은 율법의 내용이 무엇인지?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예루살렘 거민들이 깨달은 율법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뒤에 나오는 말씀에 근거하면, 그들이 행한 죄악이었을 것이다(9절).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슬퍼하는 백성들을 격려하며 성일에 근심이 없도록 권면했다(10절). 성일(this day is holy to our Lord)에 왜 슬퍼하면 안 될까? 우리 번역은 ‘성일(聖日)’로 했는데, 영어 번역은 주께로 가는 거룩한 행동으로 번역했다. 슬퍼할 것이 아니라 주께로 나가야 하는 날로 규정한 것이다. 주의 날은 주께로 나가는 날이다. 주께 받은 바된 기쁜 날이기에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는데,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 나누어주며 함께 기쁨을 나누도록 권면했다(10절).

율법을 깨닫게 하는 것은 전하는 자가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동역(증인)으로 진행한다. 복음을 전할 때에는 증인 두 사람이 대동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에스라가 율법을 해석한 것은 아마도 예레미야가 전한 것에 대한 연속을 말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유다가 실패한 역사를 제시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그들의 시간이고 공간이었다. 율법과 복음과 관계없는 시간과 공간은 동남아시아가 유력하다. 필리핀, 인도(네팔) 등은 16세기 기독교 세력과 정치적으로 접촉했다. 한중일은 종교적으로 접촉한 지역이다. 그러한 지역에서 전하는 복음에 공감될 수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 역사가 필요하다. 지금은 복음을 상실한 서구 지역에서 에스라처럼 성경을 강론할 때가 된 것 같다.

3. 에스라는 안식후 첫날에 족장, 제사장,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에스라에게 모였다(13절). 그 때에 읽는 내용은 모세 율법 중에서 초막절 규례였다(14절). 에스라는 모세의 규례대로 초막을 짓도록 했고, 그들은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해서 나무 가지로 초막을 짓도록 명령했다(15절). 그들은 지붕 위에, 뜰 안에, 하나님의 전 뜰에, 수문 광장에,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지었다(16절). 이 초막절(7월 15일)은 여호수아 때 이후에 가장 크게 지킨 것이었다(17절). 초막절 시작부터 끝날 까지 에스라는 율법책을 강론하며 절기를 지켰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서 성회를 열었다(18절). <이강근 목사가 지금 예루살렘 초막절 상황을 SNS에 보여주었는데, 지붕 위에, 길 가에 초막을 짓고 지내는 모습이었다> 이강근의 페이스북에서

4.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주의 율례가 얼마나 선하고 달콤한지요. 송이꿀보다 더 합니다. 그럼에도 빠르게 넘어지는 육의 사람인 나약함과 탐욕을 고백할 뿐입니다. 그 잠깐인 기쁨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주의 말씀으로 훈계를 받으며 굳건하게 하옵소서. 수 많은 유혹과 압력이 오지만, 주의 복음을 전하며 거룩을 증진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옵소서. 요시야 왕의 개혁과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으로 주의 오심까지 기다림을 세웠습니다. 루터와 칼빈의 개혁으로 주의 말씀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해석할 수 있는 지식과 권능을 주옵소서. 깨닫게 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주옵소서. 그래서 열방이 주 앞에 무릎을 꿇고 주를 경배할 수 있도록 주의 종을 사용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 느헤미야는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제사장들로 북쪽 성벽을 공사했다(1-5절). 양문(the sheep gate), 성벽, 함메아 망대(the tower of Meah), 하나넬 망대(the tower of Hananeel)를 건축했다. 어문(the fish gate)을 건축했다. 羊門, 魚門

서쪽으로 옛문(the old gate), 화덕 망대, 골짜기문(The valley gate), 분문(糞門, the dung gate)은 서쪽 성벽 공사 부분이다(6-13절). 古門, 糞廠門

남쪽으로 분문(糞門)에서 샘문(泉門, the gate of the fountain)을 수축했는데(14-15절), 기드론 골짜기와 힌놈 골짜기 만나는 부분이다.

동쪽은 샘문에서 수문(26절, the water gate), 마문(28절, the horse gate), 동문(the east gate, 29절), 함밉갓문(31절, the gate Miphkad) 그리고 양문(the sheep gate)까지 수축했다(16-32절). 水門, 馬門, 東門, 哈米弗甲門. 동문을 지키는 문지가 있었기 때문에, 동문은 형식적인 검문소와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3. 느헤미야는 양문을 제사장들이 수축하게 했고 성별했다(sanctified 1절). 양문은 성전 제물을 통행시킬 목적으로 수축한 것이 때문에 성별했다고 본다. 그런데 봉헌식을 한 것으로 해석하기 했다. 다른 부분에 나타나지 않는 표현이기도 하다. ‘양문’을 요한복음에서는 ‘양의문’으로 번역했다. <참고. 이덕일 박사는 ‘혈의누’에 대해서 ‘~의’를 일본식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혈루(血淚)’가 우리 표현이라는 것이다.> ‘양문’도 ‘양의문’은 동의어이지만, ‘양문’이 좀 더 우리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양문’으로 목자께서 들어오시는 곳이다(막 11:9~10). 복음서에서 양문으로 들어오는 예수를 말하지 않는데,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벳바게, 감람원으로 기드론 골짜기를 넘어 양문으로 입성한 것으로 재현하고 있다.

3.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제사장이 많이 동원된 것이 특징이다. 제사장은 율법을 보존하는 일과 성전을 보존하는 일을 한다. 구약에서 제사장이 율법을 바로 가르치지 않자 선지자를 세웠다. 그리고 성전을 보호하는 일을 해야 한다. 교회 사역자에게도 동일하다. 복음(진리)을 보존하고 전파하는 일과 함께, 예배당을 건축하고 관리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중세 교회는 예배당 관리는 관리인에게 사제들은 미사 행위를 했고, 현대 교회는 복음을 버리고 알지 못하는 소리를 지껄이며 교회당 관리는 하지 않고 신축이나 매입에만 관심이 있다. 우리나라에 버려지고 있는 교회당이 얼마나 많은가? 서구에서 이슬람과 술집에 넘겨진 교회당을 웃을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이단에 넘겨지는 교회당이 많다. 교회당에서 음식점을 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4. 성벽 재건은 모든 예루살렘 거민이 동원되었다. 하나님 자녀의 특징은 화평케하는 자이다. 화평케하는 것은 화합과 협력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스도인이 힘을 합해서 할 일이 무엇일까?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주를 예배할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이다.

5.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이 건축되는 모습을 보여주시니 고맙습니다. 주의 자녀들의 배반과 불충으로 주의 성산을 잃어버렸지만 회복하여 주셔서, 주께서 오심을 예비하십니다. 그 회복된 예루살렘에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새백성이 되었으니, 그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게 하옵소서. 주를 섬겼던 예배당이 소멸되고, 관광지로, 술집, 음식점으로, 모스크, 이단집회소로 사용됩니다. 그럼에도 주의 영광은 온 땅에 가득하지만, 주를 섬기는 예배당이 온전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느헤미야강해】 1장.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상황을 들은 후에~~

느헤미야는 TaNaKh에서는 에스라와 한 권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70인역에서 1에스라로(2에스라, 3에스라는 외경) 했는데, 제롬이 둘로 나누었다. 우리는 그 전래를 따르고 있다. 그것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저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느헤미야에는 1인칭 화법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1인칭은 느헤미야를 지목하고 있다. 에스라는 에스라가 기록했다면, 느헤미야는 느헤미야가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두 권으로 구분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이다. 그럼에도 겹치는 내용이 많기 때문에 중복 해설이 있다. 성경에서 중복되는 부분은 다윗의 일생(사무엘기, 열왕기, 역대기), 복음서 4권, 그리고 에스라와 느헤미야이다.

그리고 에스라와 느헤미야 이전에 에스더가 연대기적으로 위치한다. 그런데 역사서로 구분하여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로 배치했고, 타낙(TaNaKh)에서는 성문서-에스더는 5 두루마리에 에스더, 기타 문서에 에스라-느헤미야로 배치했다. 느헤미야는 하가랴의 아들로 아닥사스다 왕의 술관원이었다(느 1:11).

느헤미야 서를 공동체 회복과 지도력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많다. 그러나 에스라-느헤미야는 스룹바벨 성전 건축과 성벽 건축, 율법 회복이 중점이다. 그것은 유대 예루살렘의 회복을 목표한 것이라기보다, 메시아 오심을 예비하는 것이다. 메시아께서 구원을 열방에 펼치는 일을 남은자에게 부과시켰다. 남은자가 그 직무를 충성되게 감당해야 하는데, 그 남은자들이 자기 직무를 포기하고 메시아를 죽이는 일에 적극 주도했다.

1. BC 538년 고레스 칙령으로 1차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지도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 그 때 다니엘은 귀환 대열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도 참여하지 못하거나 안 한 경우가 있었던 같다. 약 80년이 지난 뒤에도 귀환 정책으로 귀환한 숫자가 있었다(약 1,775명). 80년 기간에 바사는 그리스와 전쟁에 패함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BC 458년 유대인들은 에스라를 지도로 2차로 귀환했다. 에스라나 느헤미야는 1차 귀환 이후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바사에서 술관원으로 있었지만 예루살렘에 소식에 민감한 상태였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특이한가?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고 제시했다(히 11장).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 공주의 아들자리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고난의 자리에 들어갔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세상이 줄 수 없는 감동과 기쁨, 하늘 성품이다(요일 5:4-5).

<본 글과 관계없음 그림임>

2. 느헤미야 서의 기록은 느헤미야가 기록했다(느 1:1).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20년(에스라 귀환 13년 후)에 술관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느헤미야는 수산궁(바사의 겨울궁전/여름궁전 악메다 궁-스 6:2)의 술관원이 아닌 예루살렘 소식을 기대하는 유대인으로 자기를 소개한다. 느헤미야도 다니엘처럼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민족을 보냈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책임지는 기능이 있다. 다니엘이 게시한 것을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선봉대, 에스라는 중간, 느헤미야는 최종정리 역할로 볼 수 있다.

3. 느헤미야의 형제 하나니와 두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수산에 방문했을 때에, 예루살렘 형편을 물었다(2절). 하나니는 예루살렘의 치안이 불안한 상태를 보고했다. 치안이 어려운 이유는 성과 성문이 훼파되었기 때문이다(3절).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비참한 소식을 듣고 울고 수일 동안을 슬퍼하며, 하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다(4절). 울고, 슬퍼하고, 금식하고, 기도하고를 순차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동일한 수준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괴로운 일을 만나면 기도하고, 기쁜 일이 있으면 찬송하면 된다(약 5:13).

4.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페르시아 종교,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배화교(拜火敎)의 선신(善神)의 이름인데, BC 650년 경에 태어난 찌라투스트라(Zarathustra)가 주도적인 위인이다. 느헤미야가 “하늘의 하나님(the God of heaven)”이라는 어휘에서 둘을 연관시키는 이해가 있다. 전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때보다 더 혼합적인 세상에서 바른 믿음이 존재할 수 없다. 느헤미야는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예레미야, 다니엘이 계시한 가르침을 준수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부른다(5절).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여호와라고 부르지 않고,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열방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5. 느헤미야는 언약에 근거해서 여호와께 기도했다. 주의 언약은 죄를 자복하는데, 죄의 결과는 흩어짐을 당하는 것이다(8절). 그러나 거기에서 계명을 지키면 하늘 끝에 있을 지라도 거기서 택한 곳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약속이다(9절). 느헤미야는 땅끝까지(in the uttermost parts of heaven) 이르렀을지라도 다시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주장했다. [※ 개역개정에서는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라고 번역했는데, 하늘이 아닌 땅에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언약자손인 유대인을 땅끝에서 불러오겠다는 것은 성령께서 주의 사역자를 땅끝까지 보내여 열방에서 택자를 이루신 것으로 성취한다(마 28:16-20, 행 1:8).

6. 느헤미야의 기도는 결국 느헤미야를 예루살렘으로 인도했다. 느헤미야가 기도할 때는 수산궁에서 왕의 술관원(cupbearer to the king)이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 사명을 깨닫는 것이 무엇일까? 느헤미야가 술관원으로 재직하면서 바사에 있는 유대인들을 돌보는 것이 매우 긴요한 일이다. 다니엘이 바사의 관리로 체계적인 귀환 정책을 진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왕의 술관원 자리를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야 한다는 거룩한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느헤미야의 모습에서 바사 총독의 위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7.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사람이 사명을 깨닫고 사명을 주신 그곳에서 살게 하옵소서. 그곳이 어디일지라도 주께서 명령하신 곳에 서게 하옵소서. 어디서나 추수할 일군을 찾지만 일군이 없는 시대입니다. 주께서 쓰실만한 거룩한하고 합당한 그릇으로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하옵소서. 주의 사역은 주께서 결정하고 인도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주관하는 것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주의 사람으로 인도하시는 방편을 인정하며, 겸손하게 주의 인도를 사모하나이다. 주의 복음을 전하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가득하도록 주의 종을 사용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느헤미야 2장. 느헤미야. 예루살렘 총독으로 파견됨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칙령으로 예루살렘 총독으로 파견된다. 그리고 모든 도움을 얻을 수 있는 황제의 칙령을 갖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 예루살렘을 안정하게 하려는 느헤미야를 산발랏과 도비야는 기뻐하지 않았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밤에 암행순찰을 하니 참상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암몬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 게셈으로 동맹하며 예루살렘을 복구하는 것을 저지했다.

1.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20년 기슬르월에 예루살렘의 황폐한 소식을 듣고 애통, 기도로 여정을 보냈다. 아닥사스다 왕 20년 니산월에 왕 앞에 나갈 때 였다. 니산월(3-4월 정도, 아빕월-가나안력), 기슬르월은 유대력(음력)으로 9월이고, 태양력으로 11-12월이다. 느헤미야는 약 3 개월을 슬퍼하며 애통하며 기도했다. 그의 애절함이 안색을 변한 것을 왕에게 숨길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2. 정상적인 업무를 진행할 때 안색이 변한 왕에게 느헤미야가 원인을 물었다. 술관원의 안색은 반역 모의와 관계될 수 있기 때문에 작은 일이 아니다. 왕 앞에서는 임의로 웃거나 안색을 변할 수 없다. 왕의 친근한 지적에도 느헤미야는 크게 두려워하였다(2절). 느헤미야는 바로 안색이 변한 이유를 밝혔다. 그것은 고향 성인 예루살렘의 황폐한 소식을 듣고 수 개월 동안 근심한 결과라고 밝혔다(3절). 그 말을 들은 느헤미야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질문했다(4절). 이 때 느헤미야는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4절) 왕에게 원하는 것을 아뢰었다(5절). 느헤미야는 왕이나 누구에게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종 결정을 앞둔 상황에서 그 간절함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경건, 휴지(休止, break time)를 가졌다. (참고. 스포츠(배구, 농구)에서 휴지(작전 타임, time out)은 게임이 풀리지 않을 때 하는데, 느헤미야는 자기에게 드라마틱한 전개가 진행하는 과정에서 휴지를 가진 것이다)

3. 느헤미야는 왕에게 유다 땅,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성읍(예루살렘)으로 보내어 성을 건축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5절). 느헤미야는 왕후가 옆에 있었다고 제시해서, 매우 중요한 자리임을 제시했다(6절). 혹자는 사석(私席)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왕후가 대동한 대형 회집에서 느헤미야의 안색이 좋지 않기 때문에 놀랄 일이었다는 이해를 제언한다. 그래서 느헤미야에 대한 인준은 바사 제국의 공인된 칙령이 된다. 왕은 느헤미야에게 기한을 정하도록 했고(6절, 느 5:14 12년), 느헤미야는 왕에게 자유 통행권과 물자 징집권, 병력 이동권을 요구했다(7-9절). 왕이 느헤미야의 모든 조건을 허락했다.

4. 의인과 악인이 결코 함께 웃을 수 없다(시편 1편). 의인과 악인이 함께 웃을 수 없고, 인간으로 함께 웃고 울 수는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악인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인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세상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악인이 득세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의인은 괄시(궐세)를 받는다. 악인이 의인을 미워하고 괄시하나 결코 의인을 이길 수 없다. 의인은 악인을 항상 이기는데, 그것은 의인은 악인을 사랑하고 보호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의인을 위해 있고 악인을 위해 있지 않다. 주인으로 세상을 사는 것과 종으로 사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큰 차이다.

5.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했다(11절). 그런데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가는 것과 예루살렘에서 무엇을 할지 구분해서 인도받았다. 사흘 후에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밤에 암행(暗行)했다. 예루살렘 치안 상태는 구조와 의식 모두에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13-16절). 성벽은 훼파되었고, 관리들은 어떻게 성이 운영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느헤미야는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자기 할 일을 결정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을 수축(修築)하는 것이었다(17절).

6. 느헤미야는 방백, 제사장, 귀족들을 모아서 예루살렘 성 건축 계획을 공포했다(17절). 느헤미야는 바사 왕의 칙서 등을 보여주며 설득했고, 그들은 건축에 동의했다(18절). 느헤미야는 그 일을 “선한 일(the good work)”이라고 했다. 선한 일을 진행하려고 할 때 악인이 등장했다. 그들은 산발랏과 도비야(10절)가 게셈을 합세시키며 반기를 들었다. 느헤미야의 행동이 바사 왕을 반역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 자기 법적 정당성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의 선하심을 제시했다(20절). 오히려 그들이 예루살렘에 기업, 권리, 기억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주인이 없는 듯한 예루살렘을 무단으로 점령하여 기득권을 형성시켰다. 느헤미야는 암몬 사람을 ‘종이었던’을 추가시켰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7 족속을 몰아내지 못했고, 모압, 암몬, 에돔에서 구별되지 못했다. 거룩하지 못하면 그 값은 가시로 돌아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욕심에 이끌리어 시험을 받는 것이다(약 1:12-18). 그럼에도 하늘의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믿고 묵묵히 순종하면서 나가는 것이 주의 자녀의 생이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하늘의 하나님께 모든 것을 위탁하며 자기정당성을 주장하지 않았다. 참고로 사도 바울은 자기 로마 시민권을 기회가 되면 활용하여 복음 전도를 진행했다.

7.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사역자의 가슴을 뜨겁게 하시고, 주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할 수 있도록 결단과 지식과 지혜를 주옵소서. 그래서 주의 일을 진행할 수 있도록 복을 주십시오. 주의 일을 진행할 때에 시험과 훼방이 있음을 성경 그리고 현장에서 봅니다. 그 때 오직 주님만 바라보면서 주의 일을 진행하며 성취할 수 있도록 복을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경태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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