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권력지향이 아니라 존재지향의 삶으로

인간이 권력 지향을 포기하고 존재 지향을 추구한다면 조금은 편안할 수 있다. 투쟁보다는 자기 성숙을 위한 몸부림들이 하나의 거대한 물결을 이루어 건강한 사회 형성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얻기 위한 싸움과 힘겹게 얻은 것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전쟁의 회오리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인간은 존재함으로 세상의 중심에 선다. 많이 가졌던 자들이 일체의 소유를 사회에 환원하고 무소유의 세계로 귀의하는 것은 종교적 개종에 가까운 자기 혁명이다. 소유에 대한 자세는 바울의 말처럼 있는 바를 족하게 여김이다. 무소유란 말처럼 결코 쉬운 삶이 아니다.

경영의 신(神)이라 불린 왕융칭(王永慶)은 30개 계열사에 9만 명의 임직원을 둔 대만 최대 기업 <포모사 그룹>의 창업자였다. 그가 2008년 10월15일 약 90억 불을 사회에 환원하며 남긴 유언이다. “인간이 바라는 재물은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떠날 때 가지고 떠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모으는 재산은 다를지 모르지만 세상과 작별할 때는 모두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 돈은 하늘로부터 잠시 빌린 것일 뿐이다.” 이연걸도, 성룡도, 워렌 버핏도 저커버그도, 빌 게이츠도 소유를 필요한 곳에 돌릴 줄 아는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김장훈이 비슷한 본을 보인다. 그는 나의 작은 영웅이다. 한동안 조국에 불었던 재산 사회 환원 운동은 단비다. 이런 단비가 자주 내렸으면 좋겠다.

권위(權威)-권세(權勢)-권력(權力)

권위의 옷에 칭칭 휘감겨 있는 한 누구도 자신의 소유를 버리지 못한다. 존재에 대한 감격보다 소유에 대한 감상에 젖어 살면 가진 것을 누리는 단순한 삶에서 벗어나 재물의 힘을 과시하려는 본능에 빠지기 쉽다. 재물을 가진 자가 힘을 지닌 자로 변신함에는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 스스로 힘을 사들이거나 힘 있는 자를 금권으로 조종한다. 주변 상황이 그런 변신을 수월하게 만들고 습지에 기생하는 거머리처럼 가진 자 곁에는 늘 그들의 안전망을 숙주 삼아 기생하려는 부류가 모여들게 마련이다. 돈이 권력과 눈이 맞으면 세상은 끓는 가마솥처럼 소용돌이쳐 소란스러움이 그치지 않는다.

권위(authority)는 권세로 표출된다. 권세나 권력은 사전적 의미에서 다소 차이를 보여도 결국은 같은 개념이다. 권세는 늘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권세 있는 자의 결정은 권세가 미약하거나 없는 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솔로몬은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잠 29:2)고 말했다. 악한 권력자가 권세를 휘두르면 일반 서민들은 고통을 당한다. 권력은 얼마든지 남용될 수 있기에 실로 두려운 존재다. 권력이 문제가 아니라 권력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권세 있는 주님의 우주적 권위

한 번도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셨던 주님은 사실 권위의 화신이셨다. 그분의 현존에 악령들도 초긴장상태였다. 주님의 가르침에는 권세가 있었다. 천편일률적으로 가르치는 서기관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 실상이 무언지에 대해 성경을 밝히고 있지 않으나 듣는 자들을 수긍시키고 반박할 수 없는 어떤 파워를 느끼게 했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주님은 체포 당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의 폭력적 대응을 만류하시면서 자신이 당장에라도 하늘에 있는 12군단보다 많은 천사들을 동원시킬 수 있음을 상기시켰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대위임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이렇게 운을 떼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물론 주님께 천지간의 모든 권세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권력을 쥔 자는 늘 칼 끝 위를 걷는 심정으로 생각과 행동에 신중한 파수꾼을 세워야 하고 권위 표출에 극히 조심해야 한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상대의 굴신(屈身)을 이끌어내는 것이 자신에게서 발산되는 힘의 아우라(aura)이지 않도록 권위의 방출을 최대한 억제시켜야 한다. 권위주의는 경외감에서 나오는 두려움(awe)이 아니라 공포심에 뿌리를 둔 두려움(fear)을 상대에게 심어주기 십상이다. 어떤 형태의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도 규모가 크든 작든 영향권 안에 있는 이들에게 억압된 행동을 강요하거나 맹종을 부추기는 것이기에 스스로 감금시켜야 한다.

권위를 상실한 교회의 권위주의

가장 위험한 형태의 권위주의는 탈(脫)권위주의의 가면을 쓴 것이다. 너무도 자주 교회는 사랑의 이름으로 탈(脫)권위를 부르짖었지만 사랑의 미명 하에 불의를 용납하고 교회 안에 세상을 끌어들였다. 교회가 사랑으로 세상을 품지 못하면 결국 세상 품에 교회가 안기는 묘한 꼴이 되어버린다. 역설적이게도 권위가 사라질 때 권위주의가 발동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부여받은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지녔다. 이 권위를 스스로 포기하거나 상실할 때 교회는 권위주의에 사로잡힌다.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권위를 잃어버리게 되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권위주의에 기댄다.

기독교 역사에서 천년의 암흑기로 불리는 중세는 죄와 부패에 대한 어정쩡한 태도로 인해 교회 본연의 권위를 상실한 채 세상 권력에 빌붙어 권위주의의 칼을 휘둘렀지만 세상은 마왕 같은 권력과 그로 인한 공포에 직면해야 했다. 칼을 바로 쓰지 않으면 녹이 쓸고 녹 쓴 칼을 휘둘러보았자 아무 것도 베지 못한다. 교회는 권위를 잃어버려 권위주의의 노예가 되었고 사랑도 공의도 모두 상실해버린 역사의 탕자가 되고 말았다. 루터가 휘두른 개혁의 방망이가 그나마 빈사 상태에 있던 교회에 말씀의 권위를 회복시켜줌으로 교회는 교황권, 교회지상주의의 왜곡된 힘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위대함은 권위행사가 아닌 권위포기

권위주의를 버리려면 태도부터 고쳐야 한다. 사람들은 권위를 통한 힘의 방출 이전에 권위주의적인 태도만 보아도 질색한다. 질식당하면 죽지만 질색하면 권위주의자가 죽임을 당한다. 사람들은 체질적으로 권위주의에 대해서는 알레르기가 강하다. 종교적 권위주의는 특히 더하다. 주님이나 바울이, 모세나 다윗이 보여준 것은 최고의 권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권위를 한 줌의 먼지로 취급했다. 그들의 위대함은 권위 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권위 포기를 통해 이루어졌다.

우리도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실행에서 죄다 넘어진다. 버림당함의 언덕을 구르기 직전에 다시 권위의 찬란한 빛에 이끌려 원래의 곳으로 돌아간다. 포기를 바라지만 버리지 못한다. 집착이고 탐욕이다. 허망한 이기주의다. 사람이 권위의 단단한 껍질을 벗고 사람들을 대하면 한 세계가 열린다. 누구나 시도하여 이룰 수 없는 성공의 경지이기에 권위를 포기하여 새로운 관계를 이룬 사람들의 공동체야말로 용감한 신세계다. 모두를 아우르고 사람을 대함에 차별이 없으며 사랑을 나눔에 격차가 없다. 권위가 권위주의로 타락하면 지옥을 피할 수 없고 권위를 버려 소자와 함께라면 천국이 따로 없다. 거기가 바로 천국이다.

제왕적 대통령과 제왕적 당회장

권위주의는 주위를 얼어붙게 만드는 괴력을 지녔다. 그것은 창조적이 아니라 파괴적인 힘이다. 권위주의적인 태도는 권위주의의 산물이며 이런 태도는 관계를 경직시킨다. 마음이 얼어붙으면 생명의 원천이 다양한 줄기를 통해 뻗쳐나지 못한다. 관계로 이루어진 공동체 내부에 동토가 형성되고 얼음끼리 부딪혀 얼음조각이 되거나 햇빛이 투과되어 얼음 층에 균열이 가듯 기존의 체제에 붕괴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권력과 계급 구조 아래 결성되었던 기존 질서는 혼란기에 접어들고 쉼 없는 투쟁의 연속으로 인해 공동체는 지독한 몸살을 앓는다.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대형교회의 일부 목사들은 교황이 부럽지 않을 정도의 황제적 당회장권을 누리며 살았다. 영적으로는 더욱 곤고하고 가난하고 가련하고 벌거벗은 상태였음을 그들은 쉽게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도 많이 기도하고 많이 설교하고 많은 일을 했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그들이 뿌리를 내린 자신감은 주님이 아니라 자기가 이룩한 왕국이다. 이사야 선지자나 주님의 질책처럼 그들이 주님을 높이지만 입술뿐 마음은 주님에게서 멀고 주님의 길에서도 멀다. 권위주의의 노예다.

하늘 권위에 복종할 때 교회의 참 권위가 살아나

정치 권위와 종교 권위가 야합하면 괴물이 태어난다. 로마 당국과 유대 당국이 합쳐서 메시아를 죽였다. 특정 교단에 권위주의가 달라붙으면 장자 교단이라는 으뜸 의식에 사로잡힌다. 합의를 거친 것도 아니고 스스로의 힘에서 나오는 자신감으로 거침없이 부른다. 반박하는 소리가 있어도 침묵하는 대세를 거스르지 못한다. 교만이 하늘 꼭대기까지 닿았다. 그렇게 따지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장자권은 대단한 것인데 르우벤은 내침 당했다. 하나님은 에서를 버리고 차자인 야곱을 사랑하셨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도 서열을 무시한 호칭이다. 하나님이 그리 만드셨다. 주님은 장자 교단이란 호칭 자체를 혐오하신다. 그러시리라 믿는다.

필자는 장자교단에 속하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 기드온은 자기 집안에서 가장 작은 자였고 다윗도 천덕꾸러기인 말째였다. 권위는 적절한 자에게 돌아간다. 권위는 크고 작은 일을 수행함에 있어 필요하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곽을 수축할 수 있었음도 그가 지닌 세속적 권위와 함께 그가 지닌 영적 권위였다. 세속적 권위는 아닥사스다 왕이 틀어쥐었지만 그 권위를 움직이게 하는 영적 권위는 느헤미야에게 있었다. 하위의 느헤미야이지만 상위의 권위자였다. 주님은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권위만이 아니라 금생과 내생의 모든 권위를 지니셨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권위주의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권위다. 세상의 조소와 비아냥거림으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교회 본연의 아름답고 고귀한 권위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위를 지니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바를 기억하며 사는 것이 권위에 복종함이다. 우리는 하등의 머뭇거림이나 두려움 없이 주님의 권위에 복종하기를 원한다. 세상을 향해 아무 소리 하지 않아도 우리가 하늘의 진정한 권위에 복종하며 살 때 세상은 우리에게서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권위를 보게 될 것이다. 진정한 전도는 말을 뛰어 넘는 삶이다. 복음의 권세 혹은 권위는 입술에 실린 말 이전에 구체적인 삶이어야 한다. 화란의 선교신학자 호켄다이크(J. C. Hoekendijk)가 주장한 ‘삶으로 전하는 복음’도 구원의 무언극(pantomime)으로서의 권세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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