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계 프랑스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는 탈무드에 나오는 “용서”에 대한 주석에서 “우리는 많은 독일인들을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용서하기가 어려운 몇몇 독일인들이 있다. 하이데거를 용서하기는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레비나스는 1906년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에서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1923년 17세의 나이로 프랑스로 건너가 쉬트라스부르그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28-29년에는 독일의 프라이부르그 대학에서 후설과 하이데거에게서 배웠습니다. 그 후 여러 해에 걸쳐 그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사상을 프랑스에 소개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의 철학자로서의 활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작되었는데, 그의 철학적 경향은 전쟁동안 그가 겪은 경험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정에서 희생되었습니다. 그 자신은 프랑스 군인으로 전쟁에 참가하던 중 독일 군에게 포로가 되어 독일에서 강제노동을 했으며, 그의 부인과 딸은 그가 포로에서 돌아올 때까지 프랑스의 한 수도원에서 지냈습니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그는 하이데거가 나치즘에 협력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때까지의 하이데거에 대한 존경과 열렬한 지지를 철회하고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겪은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히틀러와 나치즘에 의해 유대인으로서 입은 피해 등이 그의 철학에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그의 철학의 뿌리는 히브리적 사유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철학적 인간 이해를 살펴보면 그의 사유의 근저에 히브리적 사유가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히브리적 사유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유일신 사상이 그의  하이데거 비판에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제공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이데거의 나치 협력에 대한 비판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하이데거에 대한 부정적 비판이 집요한데,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는 후설이나 하이데거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프랑스인들의 반독 감정과 프랑스 철학자들의 학문적 자존심이 하이데거 비판에 일종의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천재적인 철학자가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와 나치즘에 협력한 것을 두고 몇몇 철학자들은 정치권력에 학자의 양심을 판 것으로 현대 우파를 지지하는 학자들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학자들은 “하이데거의 나치 행각은 그의 철학의 기본 틀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므로 하이데거의 나치 행각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히틀러의 나치 협력에 대한 비판을 좌나 우의 문제와 연관 짓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한 지식인의 사상과 철학을 그의 행위와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여 취급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율배반이라는 용어는 한 사람의 사상과 행위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생겨난 용어입니다. 하이데거는 일개 소시민이 아니고 대 철학자입니다. 그러한 그가 히틀러와 나치즘의 독재를 이용하여 나름의 바른 혁명을 도모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나치 행각이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변명할 수 없는 그의 나치행각이 집요하게 비판을 받아오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하이데거의 번뜩이는 철학적 사유의 깊이가 아무리 탁월해도 미친 독재자에 협력한 그의 나치 행각은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그의 철학적 사유와 통찰이 아무리 천재적이라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히틀러와 나치즘이 인류에게 저지른 만행을 생각할 때 그의 나치 행각은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그의 철학과 행위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그의 철학이 인간에게 긍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비인도적인 독재자에 협력한 그의 행위로 인하여 그는 이율배반적인 인간이 되었고 그의 나치 행각은 나치의 공범자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를 비판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어떤 변명이나 정당성을 주장한다고 해도 그의 철학과 행위가 그를 이율배반적 인간으로 만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를 만큼 그 자신이 어리석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의 번득이는 지성적 사유의 능력으로 그 정도는 충분히 알았을 텐데, 알면서도 나치 행각을 한 것이라면 더욱 비난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어쩌면 철학적 사유의 능력은 탁월하지만 자신의 이율배반에 대한 인식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론적으로 탁월한 학자들 중에 이율배반적인 이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지식수준으로 하이데거를 비판한다는 것은 주제 넘는 태도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가 아무리 탁월해도 그도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비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현대 지식인들 중에는 이율배반에 대한 의식이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천재적인 철학자가 단순하게 나치 행각을 하였다고 볼 수 없고 어떤 원인이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 원인을 무신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신론자가 무신론자 된 것은 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의 존재는 초월적이기 때문에 어차피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합리적 사고로 납득할 수 없기 때문에 믿어야 하는데, 믿지 못하기 때문에 무신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철학자와 믿지 않는 철학자의 인간 이해와 설명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레비나스의 하이데거 비판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무신론자였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가 하나님을 믿었는지 아닌지 논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가 무신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한 개인의 전 생애 중에 감쪽같이 감추어질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의 철학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그 어떤 물음에 대해서도 판단을 유보했다고 한다면 무신론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의 하이데거 비판도 그와 같은 전제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가 하이데거를 비롯한 서구 철학을 비판하는 것은 “절대타자를 절대자아로 환원”(reduction of the Other to the Self)시켜 실재를 파악하는 존재론이라는 것입니다. 타자에 대한 자아의 우위성의 전제를 레비나스는 비판합니다. 타자에 대한 자아의 우위성을 전제하는 서구 철학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예수님의 교훈과도 맞지 않습니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우리가 섬겨야하는 주인(the Master)으로 인식하는 윤리적 관계의 토대 하에서만이 책임감과 의무를 의미하는 진정한 진리가 발생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으며 무엇을 알 수 없을까요? 우리는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하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알 수 있는 것에 대해 알 수 있다고 하고,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성을 비판적으로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성의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바른 이성의 사용과 함께 인간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앎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제대로 알고 행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이성의 사용을 통한 앎의 목표이며 바랄 수 있는 것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우리는 기술문명과 온갖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지식인과 정치 지도자들은 물론 목회자들조차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다음 세대를 책임져야 할 지도자가 참 교육이 무엇인지 모르고, 경제 정책을 시행하는 행정부 책임자들이 경제를 잘 모르고, 나라의 안보를 책임져야 할 통수권자와 군인들이 안보가 무엇이지 모르는 자들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를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지렁이 같은 국민은 철없는 청소년처럼 나라 살림이 거들나건말건 선심 복지 정책만 좋아합니다. 일자리를 늘이겠다는 정책이 일자리를 줄어들게 하고, 에너지 정책, 환경 정책, 교육 정책, 안보 정책 등이 모두 이율배반적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와 국민 다수가 어떤 정책이나 주장의 이율배반에 대한 의식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철학과 신앙의 부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장 3절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시면서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자들이라고 하셨으니까 그들이야 말로 이율배반의 전형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라고 하신 것이 그들의 가르치는 행위의 정당성을 지지해 준 것이라는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말로만 가르치고 행하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가르침을 정당하다고 지지하신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이론이나 사상이나 철학이 바르고 정당하다고 믿는다면 믿는 바를 행해야 합니다. 믿기는 하지만 행하지 않는 것은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이율배반도 심각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이율배반적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율배반적이었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도 이율배반적인 지도자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율배반적 태도는 인간 스스로에게 해악을 끼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악입니다. 교회에서도 하나님 나라에서도 이율배반이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이율배반에 대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개혁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 개인에게 이율배반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용서하면 되지만 공공의 영역에서 이율배반은 절대 용서하면 안 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23:2-7)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 거짓과 폭력을 정당화 하는 목적론 』

마르크스는 전 세계의 억압 받는 프롤레타리아가 어느 순간 대동단결해 전 유럽을 혁명화 할 것이라는 예측과 비전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한 예측과 비전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유럽의 프롤레타리아들은 혁명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대동단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 중 상당수는 서로를 향하여 총을 쏘는 전쟁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자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들이 혁명을 위해 단결하지 못한 것은 서구 문명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서구 문명이 프롤레타리아들의 눈을 가려 자신들의 비참함과 혁명의 절실함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마르크스는 결국 프롤레타리아 혁명(Proletarian revolution)을 위해서 서구 문명을 파괴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노동자를 비롯한 무산계급이 주도하는 혁명세력이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키고 사회주의 체제의 공산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 또는 투쟁을 말합니다. 이를 사회주의 혁명 또는 공산주의 혁명이라고 합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사악한 욕망이 지배하는 낡은 사회구조를 혁명에 의해 개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악한 인간 욕망이 지배하는 낡은 사회구조를 자본주의로 보고, 그 낡은 사회를 일시적인 사회주의로 개조하고 그 후에 완전한 공산주의를 실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전환점이라고 하였습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동작업으로 내놓은 “공산당 선언”,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거론되었습니다. 위 두 저작에서 자본주의라는 취약한 사회를 떠받드는 부르주아들이 만들어 놓은 군대, 종교, 경찰, 국가 등은 사라지고 각 개개인이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어 필요에 의한 생산을 하게 되어있는 사회주의 체제의 사회를 건설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1917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위와 같은 취약한 전후 배경으로 혁명을 이끌면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거라 예상하였고 그 결과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기존의 공산주의와 달리 제국주의론, 국가와 혁명 등등의 부속 이론들이 추가됐는데, 이는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하여도 타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존립이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에 온 세계에 공산주의를 전파하여야 하고, 인민으로 이루어진 군대와 경찰 등 질서를 잡아주는 기관은 존재하여야 하며, 사회주의라는 공산주의의 하부 사상이라는 체제를 과도기적인 기간으로 설정하여 궁극적으로는 국가를 소멸시키고 공산주의 사회를 완벽하게 이루어내겠다는 사상을 창시한 것입니다. 또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근로 대중으로 이루어진 인민위원회라는 정치기구를 설립하고 지원하며 혁명 방법도 직업 혁명가가 지휘하는 다수의 생산 노동자와 농민들로 구성된 혁명 전위대를 두어 정치적 혁명을 일으키는 이론인 전위대 체계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하였습니다.  이 국가는 기존의 국가와 달리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란 속성과 결부하여 타국과 자국을 구분하지 않았고 세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도 또는 지원하는 국가로 성장해나갔습니다. 그들의 방침은  지배계급의 반동 음모를 봉쇄하고 자본주의의 국제적 간섭을 배제하고, 계획경제의 사회주의적 공업화와 집단농업, 인본주의적인 교육, 사상 면에서의 사회개조를 통한 사회 및 문화혁명 등을 통하여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궁극적 목표가 달성되면 그 이념은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보장하고 점차 국가는 소멸하여 인민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인간 개조가 된 사회주의적 사회 자치 세력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1917년 러시아에서 레닌의 지도로 실현되었으며, 그 후 동유럽과 중국, 쿠바, 베트남 등으로 확산해 갔습니다. 그러나 그 혁명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을 거치면서 국제적 비전은 사라지고 독재적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원하고 있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좌파 파시즘의 통치 형태로 이행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정부가 필연적으로 걷게 되는 길입니다. 스탈린의 소련 연방은 경공업과 농업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중공업에 집중하여 식량의 자급이 어렵게 되었고, 공산주의 귀족인 노멘클라투라(Nomenclatura) 현상 때문에 빈부격차가 점점 심화되었으며, 비민주적인 통치의 국가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공산주의 이념이 실현되어 인민이 주인 된다는 꿈은 괴물 같은 독재자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되었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결국 소수의 지배 계급들을 관료주의에 빠뜨렸고, 온 국민은 게으름뱅이가 되게 하여 1985년 이후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한 번 망가진 국가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무신론과 유물론의 바탕 위에 세워진 이론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절대자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인간을 노예화하였다고 기독교를 비판하였습니다. 신은 인간에게 무익할 뿐 아니라 해악만 끼치는 존재라고 하여 부인하였는데, 무신론은 신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해약을 인류에게 끼친다는 사실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신론과 유물론은 인간의 존엄성을 부인하여 인류에게 가공할 위해를 가하고 있습니다. 공산혁명이 최고의 목적이고 인간을 비롯하여 다른 모든 것은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마르크스 공산주의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은 공산혁명을 위한 수단으로 자리매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자 정의나 윤리 같은 것도 무의미 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망하였지만 소위 그 오류를 극복한다는 후속 마르크스주의나 신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그 폐해는 세습되었습니다. 신 마르크스주의가 성립하게 된 배경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역할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주의 등 유사 개념의 마르크스주의가 탄생하였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재해석 및 왜곡된 마르크스주의를 바로잡는 사회철학적 사조와 현상을 신 마르크스주의라고 합니다. 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간소외, 탈인격화, 개인화 등의 문제에 대한 휴머니즘적 요소를 강조하며 인간 중심의 인본적 사상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주관과 객관, 이론과 실천을 통합하여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에 대한 과학적 체계화를 강조하였습니다. 이들은 비판적 관점에서 사회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특징 때문에 사회개혁에 중점을 두는 좌익 운동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오류를 서구 문명 때문이라고 보고 서구 문명을 파괴하는 구체적 작업에 돌입하였습니다.

 

서구 문명이 프롤레타리아의 눈을 멀게 하여 혁명을 이루지 못하게 방해하였다고 한 것은 기독교의 영향력을 제거하려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이들은 서구 문명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모든 가치와 질서를 파괴하는 일을 실천하였습니다. 이들은 서구 문명을 해체하고 폭력적 혁명을 통하여 정신문화를 확산시키며, 비판이론을 통하여 기존의 질서와 제도와 가치를 공격합니다. 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안토니오 그람시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부유한 부르주아나 관료 등 상층계 출신이며, 따라서 이들은 주로 이론적 차원에서 서구 문명을 파괴해야한다는 근거를 제시하고 전파하였습니다. 미국의 경우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에 의해 대학 강단이 점령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마르크스주의나 좌파를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강사는 미국 대학 강단에서 강연을 할 수 없게 되었을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마르크스주의는 경제와 정치 이론인데 신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는 경제학자나 정치학자는 없고 대부분이 예술, 철학, 문학 분야의 비평가들입니다. 그들은 68운동의 지적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였지만 정작 그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젊은 학생들에게 이론적으로 객관적 사실이나 진리라는 것은 억압자의 권력 유지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가르쳤으며 진실이란 피억압자의 주관적 경험이나 인식이라고 설파하였습니다. 서구 문명과 기독교는 인간성을 말살하는 억압자의 도구이기 때문에 파괴해야 할 대상이고 피억압자는 오류가 없고 도덕적으로 우월한 프롤레타리아로서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고 전제합니다. 억압자는 부르주아로서 유대교인, 기독교인, 백인, 남성, 이성애자이고 피억압자는 유색인종, 이슬람, 성소수자, 여성 등입니다. 매사추세츠 칼리지 교수인 노엘 이그나티에프(Noel Ignatiev)는, 백인의 정체성은 억압되어야 하는데, 백인 우월주의를 없애려면 백인을 없애야 한다고 극단적인 주장을 하였습니다. 백인에 대한 배반은 인류에 대한 충성이기 때문에 유색인종들은 단결하여 백인의 종족 번식을 막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은 이론과 논리적으로는 일리가 있는 것 같지만 철학적으로나 사회과학적으로 조금만 심층적으로 분석해보면 그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식인을 자처하는 학자들이 보편 가치와 인간의 존엄성을 부인하고 거짓과 폭력을 정당화 하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은 목적론적 사고 때문입니다. 사회주의 혹은 공산혁명이라는 목적이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은 수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거짓이나 폭력이라도 상관없고 성과 인권이라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소모품으로 취급합니다. 과거에는 보수 우파들에 의한 거짓과 폭력이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문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온통 좌파들에 의한 거짓과 폭력이 심각하게 확산되어 있습니다. 좌파 정부는 정책으로 거짓말을 하고, 언론은 작은 거짓을 확대 보도하고 큰 진실은 보도를 하지 않거나 축소 보도하는 것으로 거짓말을 하고, 지식인들은 검증되지 않은 조잡한 이론으로 거짓말을 하고, 종교인들은 신성에 편승하여 거짓말을 합니다. 지금 한국 정부의 정책 중 소득주도성장 정책, 원전 정책, 안보 정책, 4대강 정책 등이 상당할 정도로 거짓이고, 과거 그들이 그렇게도 비판했던 원칙과 법치와 정의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비틀고 있는 모든 것이 거짓이고 폭력입니다. 미국의 경우, WP는 트럼프가 취임 이후 지금까지 만 번 이상 거짓말을 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거짓말입니다. 그 이유는 트럼프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고 트럼프가 거짓말을 했다고 한 WP는 트럼프보다 수백 배 더 거짓말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트럼프가 사실을 말해도 믿지 않고 거짓말이라고 하는 언론이 트럼프의 거짓말 횟수를 카운트 한 것을 사람들은 잘도 믿는 것 같습니다.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NYT나 CNN 같은 언론은 트럼프보다 수천 배도 넘게 거짓말을 했을 것입니다. 정치인이나 언론이 어느 정도 거짓말 하는 것은 그 속성상 불가피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인이나 언론의 거짓말은 심각한 수준입니다.

 

목적론적 사고를 하는 이들은 목적이 선하면(?) 거짓말과 폭력도 정당화 된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의 거짓말과 폭력에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하여도 일체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일을 성취하여도 거짓말과 폭력은 악하고 나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 이성이 자리할 경우 인간 이성이 설정한 목적이 절대 가치가 되기 때문에 거짓이나 폭력도 정당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거짓은 악이고 악은 폭력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목적보다도 크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거짓이나 폭력을 수단으로 한 목적 성취는 악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목적이 이끄는 삶이 아니라 성령님이 이끄시는 삶이어야 합니다. 거짓과 폭력까지도 수단화 하는 목적론적 사고는 정치 언론 경제 사회 학문 문화 분야 뿐 아니라 기독교 안에서도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 12:9) 

『시스템과 정책들을 작동시키는 에너지

아주 먼 옛날에는 땅을 갈거나 짐을 옮길 때 순전히 사람의 힘에 의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소나 말 같은 짐승을 이용하여 땅을 갈고 짐을 나르게 되었고 현대에는 과학문명이 발전하여 사람이나 우마가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힘보다는 우마가 세고 우마보다는 기계가 더 셉니다. 우마차를 작동시키는 동력은 우마이고 기계나 자동차를 작동시키는 에너지는 전기나 오일입니다. 모든 노동을 사람의 힘에 의존하던 시대에는 제도와 정책을 작동시킬 에너지가 사람의 힘이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는 성실한 노동이 부를 창출한다는 고전적 경제 원리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현대보다는 더욱 확고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짐승이나 기계를 이용하게 되면서부터는 기술과 제도의 운영 방법이 성실한 노동보다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과 제도와 정책들을 개발하는데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노력에 의해 과학과 산업은 더욱 빠르게 진보하고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시대에도 성실한 노동이 부를 창출한다는 고전적 경제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성실한 노동의 개념이 과거처럼 단순하지 않고 다원화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땅을 갈고 무거운 짐을 나르는 등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만이 노동이었지만 지금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는 것도 노동이고 연구실이나 실험실에서 연구하고 실험하는 것도 노동입니다.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하거나 시를 짓거나 글을 쓰는 것도 노동입니다. 이러한 지적 노동이나 정신적 노동이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때는 반드시 사전에 돈을 지불하고 그것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를 조사해보아야 합니다. 그림이나 노래나 시나 글과 같은 정신적 노동의 결과물을 필요로 하는 수요가 있다고 해도 반드시 경제적 이익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을 사람들이 좋아해야 경제적 이익으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직접적인 노동이나 기술이나 운영 방법이나 정신적 노동이나 지적 노동이나 그 외의 인간의 어떤 노력이라도 그것을 작동시키는 에너지는 경제적, 정신적, 심리적 이익을 얻으려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원시 시대나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현대나 모든 시스템과 정책들을 작동시키는 에너지입니다. 그 어떤 시스템이나 정책이나 고상한 목적을 지향하는 일이라도 인간의 욕망이라는 에너지를 활용하지 않고는 작동시킬 수 없습니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자신들의 사상을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그리고 혁명적 민주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은 전투적 유물론의 견지에서 청년헤겔학파와 주관주의적 제 관점에 대해 철저한 비판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들은 헤겔 변증법의 합리적인 요소들은 받아들이면서 그것의 신비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비판하였습니다. 1845년 4월, 마르크스는 청년헤겔학파 중 가장 훌륭하게 평가했던 포이에르바하를 비판하며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을 썼습니다. 그 글은 마르크스 사후에 엥겔스의 「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이라는 책에 실려 세상에 알려졌는데, 그 11번째 테제가 바로 그 유명한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한 것인데, 이 선언은 마르크스가 그의 공산주의 이론 엔진에 시동을 거는 것과 같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언제나 인간 스스로가 발명한 제도와 사상과 철학들이 발생시키는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역부족적 상황에 직면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이론의 명쾌한 사회과학적 설명은 많은 지식인들과 대중을 매료시켰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인간과 역사에 대한 사회과학적 설명과 이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토피아가 눈앞에 다가왔다는 환상적인 꿈을 꾸게 하였습니다. 희랍적 영향으로 서구인들은 이론과 논리와 과학에 길들여져 있어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에 쉽게 설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적어도 19세기 초까지는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 이후에 이성은 종전의 권위를 상실하였고 현대에 와서는 모든 것이 상대화 되고 말았습니다. 이론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실과 가치까지 상대화하고 나아가서는 종교적 신앙의 영역에까지 상대화의 담론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절대 가치와 절대 권위를 해체시킨 현대정신은 인간의 문제에 대한 사회과학적 설명인 공산주의 이론이라는 병의 후유증일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사회과학입니다. 마르크스는 헤겔을 비판했지만 그의 정반합 이론을 공산주의 경제이론에 응용하여 자본주의 이전은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정’이고, 자본주의는 ‘반’이며, 그 보나 나은 것이 ‘합’인 공산주의라고 하였습니다.

전제군주와 자본주의는 함께 할 수 없는데, 볼셰비키 혁명 전 러시아는 전제군주의 횡포와 경제 파탄으로 온 국민이 귀족이나 자본가를 극도로 혐오하고 있던 터라 귀족이나 자본가를 비판하는 공산주의 혁명 이론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선택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듯이 과학에는 정답이 있는데, 러시아 국민들에게 공산주의는 과학적 정답 같았습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에 매료된 이들은 공산주의 혁명이 반드시 성공하고 유토피아가 도래한다는 것을 마치 수확 공식처럼 믿었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1917년에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은 1922년에 소비에트 연방을 탄생시켰습니다. 국내외적으로 전쟁에 시달리고 온갖 복잡한 정치와 국제관계와 사상적 혼란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나름 성공한 공산주의 혁명은 그렇게도 이상적인 이론과 과학적 방법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 이론을 복음처럼 믿고 혁명을 했지만 그 시스템과 정책들은 그들이 기대했던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여러 측면에서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정치 경제 시스템과 정책들을 제대로 작동시킬 동력이 없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한 모든 활동의 동력은 인간으로부터 나옵니다. 

인간 활동의 동력을 세 가지로 분류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 째 인간 활동의 동력은 이기적 욕망입니다. 인간이 이룩한 문명은 거의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라는 동력에 의해서 이룩된 것입니다. 이 이기적 욕망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기적 욕망은 인간의 생존에 필요불가결한 요소입니다. 모든 생명체에게는 생존을 위한 이기적 욕망이 있습니다. 이 이기적 욕망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은총에 속합니다. 씨를 뿌리는 자는 백배의 결실을 기대하고, 소나 양을 기르는 목축업자는 고기와 털과 가죽과 젖을 얻기 위해 수고합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이익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생업을 통해 이익을 기대하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노동이든 자본이든 투자한 만큼의 이익을 기대하는 것을 악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더 많이 노동하는 것과 이익을 위해 서로 경쟁하는 것도 악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공공의 이익보다 사익을 추구합니다.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도 결국 그것이 사익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원리이고 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에너지입니다. 공산주의는 사익을 추구하는 욕망을 악하게 생각하고 통제합니다. 이것은 공산주의 시스템과 정책이 작동하게 하는 에너지원을 처음부터 틀어막아 놓은 것과 같습니다. 좋은 자동차를 만들고 연료 탱크에 연료도 가득 채워두었지만 연료가 공급되는 노즐이 없으면 자동차는 달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에게도 욕망이 있지만 아무리 부지런히 일해도 개인에게 돌아오는 것이 늘어나지 않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려는 욕망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 결과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일하기 싫어하게 되고 그 결과 필연적으로 가난하게 되고 맙니다. 일하기 싫어서 일하지 않으면 이익이 창출되지 않기 때문에 국가가 나누어 줄 빵이 턱없이 부족하게 됩니다. 자원이 아무리 풍부해도 일하기 싫어하면 가난하게 됩니다. 사회주의도 공산주의와 비슷하기 때문에 공산주의처럼 가난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자유 시장 경제를 표방하는 나라지만 지금의 정부 경제 정책은 사회주의 경제나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결국 온 국민을 일하기 싫어하는 국민으로 만들게 될 것이고 그 결과 북한이나 남미의 어느 나라처럼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인간의 사익 추구 욕망을 악하게 보고 억제하는 시스템과 정책은 동력 공급원을 차단하여 경제를 급격히 무너지게 할 것입니다. 정부가 나누어 주는 것을 좋아하는 국민은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국가가 가난하게 되는 것을 느끼지 못하다가 결국 개인까지 가난하게 되고 맙니다.  

두 번 째 인간 활동의 동력은 윤리입니다. 윤리에도 사회 윤리가 있지만 원칙적으로 윤리는 개인적입니다. 윤리란 한 마디로 다른 사람에게 좋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개인은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면서 남을 위하여 살 수도 있지만 집단이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집단은 개인보다 훨씬 더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집단은 이기주의이지만 자본주의는 생산적 이기주의이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비생산적 이기주의입니다. 집단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지만 비생산적 이기주의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 하나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것은 개인은 다른 사람이나 공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도 사회에 이익이 되지만 집단이 개인이나 다른 집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공익을 해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집단이 개인이나 다른 집단에게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은 철저하게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이 최선입니다. 집단은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으로 공공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이상적이고 개인은 자신을 희생하며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하지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개인은 지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타적 개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타적 개인이 많아지면 집단의 이기적 폐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인간 활동의 동력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 이는 기독교인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이 동력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안에서도 작동하는 에너지입니다. 참 기독교인의 모든 활동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에너지입니다. 감사는 자원하므로 실행하는 에너지이고 순종은 희생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실행하는 에너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지양해야 하고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지향해야 하되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약점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의 동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나라에 정치적 부정의나 경제적 실책이 많은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감사와 순종의 에너지를 활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사와 순종은 불완전한 시스템과 정책이라도 이익 창출을 극대화시키는 최고의 에너지입니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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