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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태】교리와 삶의 문제(A problem of the Doctrine and the Life)

교리와 삶의 문제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교리는 한 종교를 이루는 체계이고, 삶은 각 개인의 삶이고, 종교를 포함하고 있는 세상이다. “교리와 삶을 일치한다는 것”(An identification of the doctrine and the life)은 자기 종교로 차이점을 없앤다는 매우 파격적인 주장이다. “교리와 삶을 분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It is not that to separate the doctrine and the life)”은 종교인에게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연하게 반영된다. 종교인은 절대로 자기 교리와 분리되지 않는다. 간혹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절대 그럴 수 없다. 사람은 절대로 자기 사고 체계(세계관)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표현은 “바른 교리에 근거한 합당한 삶(A just life of the Foundation of the good Doctrine)”이 될 것이다.

바른 교리(good doctrine)은 무엇일까? 칼빈은 천상적 교리(heavenly doctrine)라고 사용했다. 복음은 바른 교리이다. 칼빈은 복음을 천상의 소리(a word of heaven)라고 본 것이다. 땅의 사람이 어떻게 하늘의 소리를 말할 수 있을까? 하늘시민권이 있는 사람(빌 3:20)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늘 시민권자에게 어떠한 삶이 되어야 할지 자문하는 방식으로 권면했다. 그것은 또한 이 땅에서는 명시적인 형태의 가르침(규범)이 선(善)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할 것이다.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한영대)

교리와 삶의 문제를 쉽게 주장하는 것처럼 들릴 때는 불편함이 있다. 교리도 모르고 삶도 모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교리는 특별 은혜 영역이고, 삶은 일반 은혜 영역이다. 교리를 삶으로 옮길 때에는 그 중간 변환 장치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해석(interpretation)이라고 말한다. 해석을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이해할 대상(텍스트 혹은 상황, text or context), 이해하는 대상(자기 체계, self-knowledge system), 적용하는 대상(상황, context)이다. 해석할 때 자기 자신 이해가 않으면, 결코 정당한 사고가 불가능하고, 인격적인 전달도 불가능하다.

교리와 삶의 문제에서 자기 자신을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앤서니 티슬턴은 <기독교 교리와 해석학>에서 장로파, 메노파, 감리교 등 다양한 교리 의식에서 어떻게 해석을 세울 것인가를 인지했다. 그러나 장로파 안에서도 모든 개인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즉 장로파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자기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해석은 어떤 의미가 없게 된다.

교리와 자신과의 끊임없는 갈등 과정이 삶에 표현되고, 그 과정에서 속에서 해석이 발생하는 것이다. 어떤 해석에서 그 갈등 과정이 보이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다.

“교리와 삶이 일치되어야 한다”거나 “교리와 삶이 분리되지 않아야 된다”고 말하지 말자. 교리와 삶은 일치되거나 분리될 수 없다. 교리를 이해할 수 있는지 묻고, 그 이해하는 내용을 말해보라고 말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 이해한 내용과 삶의 모습을 보면 바로 그 사람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붙들고 있는 교리가 무엇이고, 그 교리와 갈등한 흔적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리고 그 흔적이 삶에 어떻게 나타났는가? 자기 믿음의 주를 고백할 능력과 자기 자신을 표현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 위에서 텍스트를 해석하고, 삶의 정황을 해석하고 있는가?

스푸라울은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말씀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을 진리로 믿습니다. 그 복음을 듣는 우리 모두의 귀와, 믿는 심장에 복 주시기 원합니다”(He calls us not just to believe His Word is true, but to believe the truth of His Word. May He bless us all with ears to hear, and hearts that believe)라고 말했다. 우리 이해 훈련은 결국 믿음 훈련이다. 믿음의 주를 붙드는 것이 교리의 결과이다. 사도 바울은 뒤에 것을 잊어 버리고 푯대를 향해서 나간다고 선언했다(빌 3:14). 주를 붙드는 삶이 나타나는 것은 겸손, 온유, 인내, 담력이다(갈 5:22, 고전 13장, 살전 5:16-22).

고경태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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