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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를 알 수 없는 인간” 그리고 “창조주를 알 수 없는 인간” 인식과 겸손

“장님 코끼리 만지기”는 제한적인 지식이 전체 지식을 망친다는 중요한 문장이다. 일부 지식으로 전체 지식을 훼손할 수 있다. 거짓말 중에서 심각한 거짓말은 “악마적 편집”이다. 악마적 편집은 거짓이 아니라 사실을 왜곡되게 보이도록 하는 기술이다. 균형감을 상실한 부분 지식으로 전체를 미화시킬 수 있는 "악의적인 사실"이 된다. 이러한 오류는 일상에서 규범화되어 있다. “성급한 일반화 오류(hasty generalization)”라고 한다. 제한적인 인간은 완전한 지식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수 많은 판단착오를 일으키며 인생을 살아야 한다. 악마적 편집,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황금률(黃金律, the golden rule)인 역지사지(易地思之)  능력이다. 주장은 할 수 있지만(공자, 부처, 칸트 등등) 누구도 완성하지 못한 상태이다.

톰 라이트는 “퍼즐 맞추기(jigsaw puzzle of theological propositions)” 비유를 통해서, 기존 신학이 억지로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추고 있다고 비판했다(칭의를 말하다/Justification - God's Plan & Paul's Vision). 그런데 퍼즐 맞추기가 오류를 알려면, 퍼즐 전체 그림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누구도 전체 퍼즐을 본 사람은 없다. 톰 라이트가 비판한 사람도 당연하게 완전한 지식이 없고, 당연히 라이트도 완전한 지식이 있을 수 없다. 톰 라이트 그 중 한 사람이기 때문에 퍼즐 그림의 오류를 판단할 자격이 없다. 결국 톰 라이트는 자기 기준에 의해서 판단한 것이지, 전체 지식에 근거한 것에서 판단한 것이 아니다.

 

학문에서 판단하는 준거를 제시하면, 그 준거에 의해서 판단할 수 있다. 그 준거를 밝히는 것이 판단에서 주요한 근거이다. 준거를 밝히지 않으면 절대로 판단할 수 없고, 독자가 주관적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학생(학자)는 자기주장을 밝힐 때에 준거를 밝히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 준거 안에서만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 준거를 존중하면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교류를 할 수 있다. 그 준거를 모를 때에는 임의적 준거를 세우면서 교제할 수 밖에 없다. 필자는 “선한 임의적 준거”를 세우라고 제시한다. 그리고 혹여 준거를 확인했다할지라도 항상 임의적 수준으로 가변성을 개방하여 진행하라고 제시한다.

그런데 신학은 일반 원리에 의해서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은 계시에 근거한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알려주신 은혜이고 지식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성적 피조물에게 제공하셨다.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은 계시에 근거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 그 때 명확한 원리 중 하나는 “부분 지식이지만 참 지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나 인류 전체 지식을 파악할 수 없다. 할 수 없는 것을 구하는 거나 시도하는 것은 불신앙이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인간은 부분과 부분이 만나 연합을 이루도록 창조되었다. 인간은 지식이나 재능에서 모두 부분적이다. 그 부분들이 연합에서 보다 완전을 이루어 간다. 단독자로 완전할 수 없고, 모두가 모여서도 완전을 이룰 수도 없다. 노아 후손 중 첫 범죄가 모두 모여 하나님의 질서(온 땅에 편만하여 충만함)을 반역하는 바벨을 추구했다. 인류의 기본적 죄인 아담의 죄와 바벨의 죄인 반역을 반복하고 있다. 스스로 완전하거나, 모두 모여 완전을 이루려는 것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부분, 한계에서 만족하고, 모두 연합을 이루며 정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약한데서 강하다는 지식을 계시로 파악했다(고후 12:1-10).

우리는 한 점(지식)에서 전체를 이룬다. 그 한 계기를 말할 수 있으면 양심인이고 지식인이다. 그 한 계기(epoche)를 말할 수 있으면 신앙인이고 신학도이다. 불교는 돈오돈수(頓悟頓修, Subitism/illumination subite)와 돈오점수(頓悟漸修, illumination graduelle)를 놓고 토론을 한다. 닭이 먼저인지 계란이 먼저인지 토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예기치 않은 지식(subita)에서 끊임없는 정진으로 진행한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제시처럼 은혜(extra nos)에 의해서 수납된(imputed) 생소한 의(aliena iustitia)에서 시작하여, 끊임없이 은혜의 삶을 진행한다. 그래서 인간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전체 지식이 아니라, 자기 시작(첫믿음, epoche)을 말할 수 있다(계 2:4-5).

인간 스스로의 지식은 부분이며 교만과 탐욕이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서로를 파괴한다. 계시에 의존한 지식(啓示依存思索)은 부분이지만 겸손과 사랑하기 때문에 완전하고 서로를 완전하게 한다. 악인은 의인에 회중에 들지 못하고, 의인은 악인의 회중에 들지 않아도 슬프지 않다(시 1편).  

고경태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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