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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산책】 사익과 공익이 충돌할 때, 키케로의 『의무론』이상욱 목사의 인문학 산책 (15)
  • 이상욱 목사
  • 승인 2019.03.19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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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욱 목사│목민교회(인천) 담임, 호서대학교( Ph.D),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아들에게 쓴 편지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인쇄됐고 비스마르크가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학생은 꼭 읽으라고 권유했다는 책이 있다. 바로 로마의 ‘국부’로 추앙받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기원전 106~43년)가 스토아 윤리를 바탕으로 쓴 『의무론』이다. 키케로의 『의무론』이 후세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는 근대 프랑스 계몽주의의 대표자인 볼테르의 다음과 같은 평가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아무도 이보다 더 현명하고 더 진실하며 더 유용한 어떤 것도 쓰지 못할 것이다. 이후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거나 훈시하려는 야심을 가진 어떤 작가가 만약 키케로의 ‘의무론’보다 더 잘 쓰기를 원한다면 그 작가는 허풍선이거나 아니면 그러한 책들 모두가 이 책의 모작이 될 것이다.”

키케로의 의무론, 키케로, 허승일 옮김, 서광사

 

이 책은 키케로가 아테네에 유학 중인 아들이 정치가로 성공하기를 바라면서 서신 교육으로 써서 보낸 것을 모았다. 아들에게 정치가로서 현실적인 실천윤리를 조언해주는 동시에 아들에게 “나는 네가 모든 점에서 나를 능가해주기를 바라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아버지의 깊은 뜻을 전한다. 그런 면에서 『의무론』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전하는 아버지의 부정이기도 하다. 『의무론』은 헬레니즘 사상을 알려주고 고대 문화를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책이다. 키케로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렀다.

 

"내 아들 키케로야, 이제 너는 아버지인 나에게서 큰 선물, 즉 나의 위대한 사상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 선물은 네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것이다. 그러나 그 가치는 네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정신 상태에 달려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이 세 권을 크라팁푸스 선생의 강의록 속에 끼워 넣고 다니면서, 너의 동료 친구인 것처럼 잘 지키면서 항상 기쁜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그러나 여행 도중에 조국이 분명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들이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가 의도했던 대로 지금은 아테네에 갔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너는 내게서 또한 무언가 듣게 되었을 텐데. 그 대신 이 책들을 통해서 내 목소리가 네게 전달되었으니, 너는 네가 시간을 낼 수 있는 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니, 실제로 정성을 들여 많이 읽도록 하여라. 거듭 말하거니와, 그 책들 속에는 도처에서 내 음성이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가 이러한 부류의 지식을 학습하는 데 기쁨을 맛보고 있다는 점을 내가 알게 되면, 그때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네가 해외에 있는 한, 나는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가운데 서신으로 대화를 나누려고 한다. 잘 있거라,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내게는 네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지만, 이러한 나의 충고와 훈계를 깊이 새겨듣고 이를 실천한다면, 네가 더 많은 사랑을 나에게서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그가 사랑하는 아들 한 명에게 전한 사상이기는 하나 후세 모두가 공유할 수 있게 된 키케로의 지혜는 현재 무수한 고민거리가 산적해 있고 원칙이 흔들리는 사회에서 더욱 큰 울림을 가진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회’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이성’이 있어서 인과관계를 알아내,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을 준비한다. 키케로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을 이성으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이성은 사람들이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데 사용된다. 그렇다면 키케로가 봤을 때, 인간이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먹을 것? 의사? 돈? 아니다. 인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공동체, 즉 ‘사회’다. 그러니까 그는 인간의 본성은 이성의 힘을 빌려 공동체의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만든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는 3권으로 구성한 이 책에서 어떤 행동을 하려고 결정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을 세 가지로 나눠 설명한다. 제1권은 도덕적인 선한 것, 즉 명예(名譽, honestum)과 제2권은 유익하거나 편의적인 것, 즉 공리(公利, utilitas), 제3권은 명예와 공리의 상충할 때 어떤 것을 우선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제1, 2권의 내용은 중기 스토아학파의 파나이티우스에게서 따온 것이지만 제3권의 내용은 키케로의 독창적인 것이다.

제1권은 도덕적 선(honestrum), 명예에 관한 것으로 키케로는 해야 할 것과 행하면 안 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도덕적 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도덕적 선이 도출되는 기원으로서 네 가지 기본 덕목인 지(知) 의(義) 용(勇)을 논의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도 지혜를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대학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개념도 동일하다. 지식(知識)은 진리에 대한 통찰과 이해다. 정의(正義)는 인간사회를 유지하며, 각자의 것은 각자에게 나누어 주며, 계약된 것에 대한 신의(信義)이다. 용기(勇氣)는 고귀하며 굽히지 않는 정신의 위대함과 강직함이다. 인내(忍耐)는 행해지고 말해진 모든 것에 절도와 인내가 내재해있는 질서와 온전함으로 정의한다.

그는 지의용인(智義勇忍)에서 “도덕적 선”이 나온다고 말한다. 진리탐구는 이성을 힘을 가진 인간의 고유한 것으로, 지식은 호기심에 관한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말해질 도덕적인 선을 파악하는데 필요한 능력이기도 하다. 예의범절이 뭔지 알고 고귀한 것이 뭔지 알고 이해해야 그것을 지키지 않겠는가?

그리고 제2권은 유익함(utilitas), 공리에 관한 것으로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서 편익을 제공하는 것들에 관해서 다루면서 유익한 것과 유익하지 않은 것, 모두 유익한 것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유익함을 끌어내는 온갖 행위들에 대해서 처세술을 강독하는 것처럼 친절히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있다. 어떤 권력도 다수의 증오를 견딜 수 없다고 말하면서, 공익을 침해하는 참주 정체가 무너지는 필연성을 말하고, 대중들을 선의로써 이끌어나가야 함을 역설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명예를 얻는 방법이나, 존경을 얻는 방법 심지어는 국정 운영자들이 주의해야 할 일들까지도 설명하고 있다.

제3권은 도덕적 선과 유익함이 상충하는 경우에 무엇이 우선해야 하는지 하나하나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가며 설명하는 내용이다. 눈여겨볼 점이다. 유익함을 추구하는 이 모든 행위의 기반이 도덕적인 선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존경을 얻는 방법으로, 말초신경적 쾌락을 이겨내라는 조언과 외부 상황들을 사소하게 생각하고 고귀한 목표를 수행하려는 덕을 가지라는 조언을 해준다. 근데 이 조언은, 존경을 얻기 위한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권모술수적 조언들이 아니다. 목적과 수단이 모두 도덕적인 선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이다. 즉 도덕적인 선을 추구하면 유익함은 저절로 뒤따라오는 것이다. 유익하므로 도덕을 지킨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키케로가 말하길 도덕적인 선은 그 자체로써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다른 이유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에 반기를 든 것이 에피쿠로스 학파다. 그들은 쾌락, 유익함이 선이라고 말했다. 물론 키케로는 이를 비판한다.

키케로가 보기에 도덕 그 자체를 존경하고, 그 자체 때문에 따르지 않는다고 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고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십계명과 같은 의무론적 윤리이다. 키케로의 도덕은 곧 공익이다. 한데 개인의 유익함이나 쾌락이 도덕을 지키는 이유가 된다면, 공익은 더 우선순위가 아닌 게 된다. 즉 공익은 침해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쾌락이 선이고 고통이 악이라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을 받아들이면, 수고와 고통을 감수한 용기의 덕목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키케로는 윤리학의 근본적인 문제를 공동선과 개인의 유익함을 구분하여 매우 현실적인 기반에서 논의하고 있다. 그는 한 개인의 행위의 정당성을 타인, 사회, 국가와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러한 키케로의 태도는 이후의 서양 근대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무엇이 유익한 것인가?

사실 인간은 생을 영위하는 데 물질적인 것, 유익하고 편의적인 것으로부터 많은 유혹을 받는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사람이 곡물이 부족하여 곡식 가격이 폭등하여 기아선상에서 헤매고 있는 로데스 섬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곡물을 가득 싣고 도착한 사실을 보았다고 가정해 보자. 이 상인은 로데스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그대로 말하겠는가. 아니면 침묵한 채로 자신의 곡물을 가능한 한 많이 사서 비싼 값으로 많이 팔겠는가?

이에 대해 키케로는 곡물 상인은 로데스 사람들에게 곡물 선박이 도착했을 알려야 한다고 말한다. 참으로 네가 알고 있는 것이 남에게 알려지는 경우, 남에게 이익이 됨에도 불구하고 너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그것을 알리지 않을 때, 그것은 네가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숨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일종의 숨기는 행위, 사기이며, 이런 행위를 하는 자는 침묵한 것이 아니라 숨겼다는 사실을 누가 알아채지 못하겠는가?

이런 행위를 한 사람은 절대로 정직하지도 않고 순박하지도 않으며, 명예롭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오히려 그런 자는 교활하고 간교하며, 남을 잘 속이고, 사악하고 난폭하며, 사기와 음흉의 세계에서 자란 사람이라 할 것이다. 이 모든, 그리고 다른 많은 나쁜 비난의 수식어가 붙은 명칭을 듣는 행위를 하는 것이 과연 유익한 것이겠는가? 반문한다.

이상사회는 존재하는가?

인류는 이상사회를 꿈꾼다. 구약성서의 이사야 선지자가 본 이상사회는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이사야 11:6 –8).

서양 문화의 두 줄기 커다란 흐름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다. 헬레니즘은 그리스.로마 문화를 일컫는 것이며, 헤브라이즘은 로마제국에서부터 자리 잡기 시작한 기독교 문화를 일컫는 것이다. 그 가운데 헬레니즘 시대란 알렉산더 대왕의 출현에서부터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 시기에는 윤리의 문제가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대표적 윤리 학파인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전성기였다.

서양 고대에는 실제로 우리가 바라는 이상 국가가 실재했다. 그곳에는 경찰이 없었고, 시민은 단도(短刀)를 가지고 다닐 수 없었으며, 장군도, 병사도 도시로 들어오려면 성문에서 무장을 해제해야 했다. 카르타고, 마케도니아, 코린토스를 정복한 장군들은 하나같이 전리품을 국고에 넣거나 도시 장식에 사용하였고, 사기, 수뢰란 말 자체도 없었다.

기원전 2세기 중엽의 로마 공화국이 이러한 이상 국가였다. 이는 전적으로 로마인이 거의 농민 출신으로 검소 질박(質樸)한 생활을 해온 데다가 스토아 금욕주의 윤리 사상을 받아들인 덕분이었다. 키케로(기원전 106-43년)가 『의무론』을 쓴 것도 바로 이 헬레니즘 시기이다. 키케로는 당시 로마는 고통이 최고 악이요, 쾌락이 최고의 선이라는 에피쿠로스의 윤리 사상에 물들어 타락해 가고 있었던 이를 안타까워한 아테네에 유학한 아들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으로 쓴 저술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개인 이익과 사회 이익의 충돌을 종종 경험한다. 공익을 추구하고 개인 이익을 포기하는 헌신적인 태도가 바람직하더라도 실제로 이를 수용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공익을 버리고 개인 이익을 추구하라고 권유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는 전체주의나 극단적인 개인주의는 사회적으로 공동선을 이루기 어렵다. 개인 이익과 공익의 양극단을 배제하고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려면 당위적인 명분뿐만 아니라 실리적 이익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의의 선지자 아모스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24)”라고 말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내가 바라는 것은 정의다. 큰 바다 같은 정의! 내가 바라는 것은 공평이다. 강 같은 공평! 이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것, 내가 바라는 전부다. 예언자는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넘어서 사회 약자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로 여겨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다. 그는 신의 소리를 마음속으로 듣는다.

정의를 추구하는 가치관은 개인적인 유익함보다 사회적 유익함을 강조한다. 인간의 내적 도덕심이 사회적 이익추구와 겹쳐질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은 개인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심적으로 사회적 이로움을 해치는 행위를 옹호하지 않으려고 한다. 인간은 개인 이익의 유용성만 고집할 만큼 몰염치하지 않다. 사회적 이익은 인간이 항상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가 현실 사회에서 좀 더 설득력이 있으려면 사회적 이익추구가 개인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점을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다. 구체적으로 사회지도층의 국가정책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집행되면 사회적 편익이 개인 이익으로 고르게 배분되어 도덕적 선을 추구하려는 의지를 확산시킬 수 있다.

 

 

이상욱 목사  jesuspoin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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