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환대를 본받아 환대하는 공동체인 교회

 

최종인 목사, 평화교회담임, 성결대, 중앙대석사, 서울신대박사, 미국 United Thological Seminary 선교학 박사, 공군군목, 성결대학교, 서울신학대학교 외래교수

현대 교회 안에서 공동체를 발견하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외롭고 쓸쓸하고, 힘들어 위로받고자 찾아왔건만 교회 안에서 도리어 상처를 받는다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세상에서 환대를 받는 곳을 환호합니다. 테일러 클라크(Taylor Clark)는 스타벅스의 성공비결은 커피가 아니라 “커피 하우스라는 장소의 매력”이라고 했습니다. 스타벅스는 커피란 사회적 접착제를 가지고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제3의 장소를 만든 것입니다. 결국 스타벅스는 교회가 차지해야 할 환대의 자리를 대신하는 셈입니다. 아쉽지만, 교회는 환대의 자리를 다시 찾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환대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1. 위협받는 교회 공동체

오늘날의 교회는 공동체성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성도들 사이에 만연하는 개인주의 때문입니다. 교제가 상실된 채 유기적 생명력을 잃은 비인격적 조직체로 굳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주의가 위험한 것은 교회 분열의 단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직분은 본래 하나님을 위해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일종의 특권층처럼 형성되어 남은 성도들을 소외시키는 구조를 만들고, 비민주적 풍토를 조성해 성도들을 실망하게 하고, 교회를 떠나게 하는 원인중 하나가 되게 합니다.

직분뿐 아니라 기능 중심적 제도 역시 교회의 공동체성을 헤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가대에서나 주일학교 부서에서, 각 위원회에서 전문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을 봅니다. 기능 위주로 사람을 세우고 높이는 분위기가 교회 안에 팽배할 때 은사가 약한 성도들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지나친 친교중심주의도 공동체성을 흔들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다양한 계층들이 섞여있고, 다들 한 가족처럼 여기고 존중해 주어야 할 터인데, 개척교회를 지나 중형화 된 교회들을 보면 자기들끼리 만나고 먹고 교제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누구와도 친하셨고, 교제하셨으며 다양한 사람들과 식탁을 나누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인들은 일부와 친하고, 일부와 교제하며, 일부와만 식탁에 앉습니다. 공동체의 일부만이 탁월한 교회는 바른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구성원 간의 지나친 불균형은 교만과 질시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오히려 조금 틀리고 부족함이 있어도 여유가 있는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실천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2. 환대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

인간이 공존(共存)하고 있다고 모두 건강한 사회가 아니고 진정 화해가 진행되고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건 문제와 상처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끼리 용서하고 껴안아주는 화해가 있는 사회, 즉 깨어진 관계의 회복력이 있고 사회구성원이 지속적으로 관계적이고 외적인 행동으로 화해의 증거를 보여줄 수 있는 사회는 환대(hospitality)가 실천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 공동체 역시 ‘환대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환대란 무엇입니까? 환대 혹은 환영이란, 반갑게 또는 기쁘게 선의를 갖고 손님을 맞아 대접하며 인자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집에 거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포악하고 피폐한 사회에서 낯선 자들 즉 나그네와 이방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와 타락한 세상을 환대하시는 분입니다. 동시에 교회 역시 가난하고 슬퍼하거나 고통 받는 사람들을 환대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환대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첫 메시지는 가난하고 포로된 자, 병들고 고통당하며, 압제당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환대, 곧 은혜의 해를 전파하시는 메시지였습니다(눅 4:18-19).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환대의 패러다임과 모델이 되십니다.

첫째, 예수님 자신이 환대 받는 자 이셨습니다. 그의 삶 전체가 환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공생애 사역 기간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환대를 받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 자신이 환대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뿐 아니라 죄인 취급을 받는 이들이나, 사람들에게 쫓겨나 변방에 사는 나환자들이나 이방인들도 환대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주로 환대의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 사랑의 영성을 환대의 영성으로 바꾸어 설명하셨습니다.

3. 환대의 종류

환대는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때로 이기적인 이유에서 환대하기도 하고, 이득을 얻고자 하는 경영 영업적 측면에서 환대하기도 합니다. 종교인들의 환대도 늘 종교적 이유에만 있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계산하고 측정하여 환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첫째, 상호적 환대가 있습니다. 상대와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환대입니다. 상호적 환대는 공유되는 부분이 있을 때 극대화됩니다. 예를 들어 교단에서 만나는 인사들의 경우 동향 사람들끼리 환대하는 것을 봅니다. 외부에서 교회 성도를 만나면 교회에서 만날 때보다 더욱 반가워서 환대 행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이 상호적 환대입니다.

둘째, 자기애적 환대가 있습니다. 자기애적 환대는 자기 자신의 내면적 상태에서 환대의 조건을 찾는 것입니다. 주체가 객체에게 베푸는 행위가 자기애적 환대입니다. 이런 경우 주체가 환대를 결정합니다. 객체는 결정권이 없습니다. 환대를 베푸는 자의 우월성이 강조됩니다. 환대를 받는 자에 비해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환대를 베풀면서 상대가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에 만족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셋째, 무조건적 환대가 있습니다. 무조건적 환대는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한 책임의 자세입니다. 무조건적 환대는 보상이나 타인의 환대를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조건적 환대는 자기애적 환대같이 자존감 증진 또는 자기실현 획득을 의도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죄인들이나 소외된 자들을 환대하셨을 때에 그들로부터 무엇을 기대하셨을까요? 전혀 기대하지 않고 무조건 사랑으로 환대하셨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바로 이와 같은 무조건적 환대를 실천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4. 환대의 방법

오늘날의 교회들은 어떻게 환대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공간을 제공하고 식탁을 베푼다고 환대라 할 수 있을까요? 평화교회(예성, 최종인 목사 시무)에서는 주중에 몇 차례 식탁공동체를 베풀고 있습니다. 화요일에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식탁을 제공합니다. 수요일 점심에도 기도회에 참여하는 성도들과, 혹은 병원 신우회원들과 식탁을 나눕니다. 목요일에는 기도사역자들이 모여 식탁을 함께 합니다. 금요일에도 구역식구들, 기관 식구들이 모여 식사합니다. 주말에도 누군가의 호의와 헌신으로 교역자, 사무실 가족들, 기관모임에 참여한 이들이 모여 식사합니다. 중간에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고, 전혀 금전적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초청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환대공동체라 할 수 있을까요?

첫째, ‘알아주는 것’입니다. 실은 우리의 정체성은 누군가가 나를 ‘알아줌’(recognition)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식탁에서부터 ‘알아줄 때 우리는 반갑고 환대받는 느낌을 크게 느끼게 됩니다. 회의나 모임, 결혼식과 잔치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누군가가 나를 ’알아줄 때‘ 나의 정체성이 결정지어지거나 기존의 정체성에 도전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된 상황에서 누군가 나를 알아줄 때 나의 존재감을 느끼고 기분이 좋아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따라서 알아줌은 매우 중요합니다.

둘째 환대는 ‘즐겁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환대를 베풀 때 즐거움으로 하여야 합니다. 로마서에서는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롬 12:8). 즐거움은 내적 평안을 말합니다. 마음이 편하여야 합니다. 고통과 부담이 항상 내적 평안과 반비례하지 않습니다. 부담감 속에서도 내적 평안이 있을 수 있습니다. 조건적 환대는 조건이 부합되지 않을 때 마음의 평안이 없고 즐거움이 사라집니다. 불안하여지거나 고통을 제거할 수 없으면 조건적 환대는 쉽게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환대를 베푸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고, 상대의 불쾌한 반응은 환대의 마음을 꺾기도 합니다. 그럴지라도 교회가 환대 공동체로 모습을 갖기 원한다면 적어도 환대는 즐거움으로 하여야 합니다. 교회의 환대는 교회안의 공동체를 위해서, 때로는 교회 밖의 타인을 위한 적극적이고 즐거운 책임이어야 합니다.

셋째, 교회의 환대는 ‘질문하기’를 요청합니다. 타자에 대한 관심의 표현은 질문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환대를 받는 자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환대를 시작하기에 앞서 질문은 중요합니다. 질문은 관심의 표현이고 새로운 이야기세상을 열수 있는 관문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상대를 환대할 때 적절한 질문, 즉 창조적이고 환대적인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환대를 베풀 때 환대를 받는 자를 위한 환대임을 숙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환대를 받는 자의 상황을 이해하였을 때 더욱 적절한 환대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교회의 환대는 ‘식탁에서 함께 먹기’입니다. 레너드 스윗은 그의 책에서 식탁을 재미있게 표현했습니다. “구약을 정리하면, ‘그들은 우리를 죽이려고 했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같이 먹자!’ 신약을 정리하면, ‘사랑한다, 용서한다, 같이 먹자!’ 장 르클레는 복음에 대한 최고의 정의를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나쁜 사람들과 좋은 음식을 먹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지 않았는가”라고 했습니다.

실로 예수님이 태어나 누이신 곳은 동물이 먹이를 먹는 구유였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과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음식을 드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디에 있든지 ‘식탁의 사람’인 것입니다. 초대교회 역시 주를 믿는 자들은 떡을 떼며 교제했습니다. 환대는 교회 역사에서 가장 많은 교회의 사역 중 하나였습니다. 현대교회는 환대의 식탁을 회복함으로 환대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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