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3권』, 박태현 역(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1), 92쪽으로 표기함.

로마서 7장 7-25절은 상반된 성경 해석이 나오는 대표적인 부분이다(92쪽). 바울 이해에서 상반된 견해가 있다. 바빙크는 펠라기우스파가 이 본문을 근거로 호소했다고 제시했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다른 견해를 제시했고, 로마 교회와 개신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추종하는 연구자들은 “중생한 뒤의 바울 상태”로 이해하고 있다고 제시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이 본문을 “회심 전의 바울 상태”로 보는 연구자들이 많다. 그들은 당연히 펠라기우스를 따르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지만, 회심 전의 바울 상태로 보고 있다. 바빙크는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을 델리취, 필립피, 루트하르트, 하를레스, 토마시우스, 움브라이트, 콜부르게 등을 제시했다(93쪽). (※ conversion에 대해서 회심과 개종으로 번역하고 있다. repentance와 다른 어휘이다. ※ 성경본문을 해석할 때 두 가지 상반된 견해를 모두 취하는 방식은 좋지 않다.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거부하는 것이고, 거부할 때 정죄하는 방식이 아니라 불가피한 상황임을 인지해야 한다. 그러나 결단의 때에는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7-25절에서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율법에서 해방되었지만, 율법 자체는 죄악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93쪽). 바빙크는 먼저 율법에 대해서 제시했다. 신자여도 율법은 육에 있기 때문에 반대이다. 그러나 속사람은 율법을 동의하는 상태로 바울이 이해했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신자가 율법에서 해방되었지만 율법을 동의하는 상태를 제시했다. 거듭나지 못한 자는 율법을 동의하지 않지만, 거듭난 신자는 율법을 동의하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 7장 14절에서 “현재형”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거듭난 상태에서 율법을 사랑하고 동의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지만, 바울은 율법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을 알았다(93쪽).

바울은 회심 전의 율법으로 사람을 죽이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거듭난 뒤로 바울은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며 인정하며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법을 준수했다(94쪽).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이 결코 옳지 않다. 종교를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더 이상 거룩하지 않다. 인류는 20세기까지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진리를 위해서 사람을 미워하고 헤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결코 진리가 아니다.

그런데 중생자인 바울은 자신이 여전히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린 자”(롬 7:14)라고 고백했다. 자신 죄의 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롬 7:23). 그의 육신이 죄의 법을 섬기기 때문에 곤고할 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며,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겼다(롬 7:25). 이러한 상태는 로마서 8장에서 자세하게 제시한다. 그러한 일이 바울의 힘이 아닌 성령을 따라 일어나게 된다(94-95쪽).

바빙크는 로마서 7장 7-25절을 중생 전으로 해석할 때 발생하는 문제를, 중생이 필요하지 않음, 조력적 은혜가 됨, 죄와 은혜, 칭의와 성화, 믿음과 회개에 관한 성경 전체 가르침이 전복될 것이라고 제시했다(95쪽). 로마서 7장 7-25절은 인간 본성의 전적 부패에 대한 강력한 증거로 주장했다. 거듭나지 못한 자는 죄의 종으로 육체를 따라서 하나님과 원수로 산다(롬 8:7).

그런데 죄의 종으로 육체로 사는 사람은 자기 주인을 하나님, 신(神)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의의 종도 동일하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종교에서 정당성은 행위나 공덕이 아니라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고경태).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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