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1) 집중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사물을 뚫어지게 바라본다는 뜻의 한자어는 ‘응시(凝視)’도 있고 ‘응시(鷹視)’도 있다. 전자는 눈이 한곳에 엉켜 붙은 것처럼 그곳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후자는 사냥감을 찾는 매의 눈처럼 탐내어 겨누어 보는 것을 말한다. 마태는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만 바라보게 한다. 매의 눈처럼 겨누어 예수님만 집중하게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이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여인을 바라보지 않는다. 여인의 손에 있는 향유의 가격을 뚫어지게 본다. ‘비싼 값’을 매기고 있다(26:9). 마가는 평가액인 ‘300 데나리온 이상’이라고 말한다(막 14:5). 대략 평균적인 노동자의 1년치 연봉이다. 마태는 금액을 말하지 않고 단순히 ‘많이’에 해당하는 ‘폴뤼스’로 대신한다. 액수에 관심을 두지 않게 하는 포석이다.

 

1.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베다니에서 그 여인은 예수님께 칭찬을 받는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예수님께 ‘좋은 일’이었다. 예수님은 핵공감을 하신다. 여기서 ‘핵’은 실적적인 뜻은 없고 ‘아주 강한’의 의미다. 특별히 의로운 행동이다. 자선보다 사랑의 행동이다. 반면 그 여인을 향해 낭비라고 비난한 제자들은 책망을 받는다. 요한은 유다가 때때로 그 공동 지갑의 돈을 횡령하였다고 기록한다(요 12:5-6). 베다니에서 한 여인은 좋은 일을, 유다는 남의 것을 이용하는 대조를 영화에서 볼 수 있다.

제목도 모르고 아내를 따라 본 조조 영화다. ‘증인’이다. 자살 또는 타살의 기로에서 한 가정부에 의한 타살로 의심되는 증언이 나온다. 증인은 자폐를 가진 이웃집 소녀 임지우(김향기 분)다. 가정부의 변호사 양순호(정우성 분)는 “자폐아는 사람의 표정조차 잘 구분하지 못한다”며 지우를 정신병자로 몰고 증언에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지우는 변호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친구는 늘 웃는 얼굴인데, 나를 이용해요. 엄마는 늘 화난 얼굴인데, 나를 사랑해요. 아저씨는 대체로 웃는 얼굴이에요. 아저씨도 나를 이용할 겁니까?” 우리 스스로에게 묻게 한다. 좋은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인가. 예수님은 자신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여인을 향해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마태는 여인이 예수님께 칭찬을 받을 뿐만 아니라 좋은 소식, 즉 복음이 전파되는 되는 곳에 그 여인이 행한 일도 전하여 질 것이라고 한다.

 

2. 집중과 몰입

마태는 이 여인이 오직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음을 알리고자 집중한다. ‘집중한다’ 것은 무엇인가. 100가지 것에 대해 NO라고 말할 때다. 비로소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다. 몰입은 ‘선택과 집중’과 동의어다. 문제는 ‘그 하나가 무엇인가’다. 마태는 그 하나가 십자가를 눈 앞에 둔 예수님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식사하는 일상적인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식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모습을 생략한다. 식사를 초대한 시몬이 한 때 나병환자였다는 병력만 간단하게 소개할 뿐이다. 예수님을 초대한 주인보다 불청객 같은 한 여인의 등장과 행위에 앵글을 맞춘다. 마태는 여인이 누구인지 소개하지 않는다. 요한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말한다(요 12:1-3). 마태는 여인의 신상을 공개하지 않는다. 무명으로 등장시킨다. 누가는 예수님께 기름 부은 여자를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한다(눅 7:37). 마태는 그녀의 방문 목적에 대해 말을 아낀다. 여인 자신인지 아니면 가족 중에 누군가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는지 또 다른 사유가 있는지 내막을 밝히지 않는다. 예수님을 위대한 랍비로 여기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또는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을 담아 단순하게 한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에 집중한다.

<Christ in the Home of Simon the Pharisee>, Peter Paul Rubens, 1618-1620 / 루벤스는 향유 옥합 사건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심리를 그리고 있다. "당신은 어디에 집중하는가?"

푸빌리우스 시루스라는 로마 시대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한다는 것은 둘 다 안 한다는 뜻이다”. 사실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에 대해 다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몰입은커녕 단 하나에도 집중하지 않는 것이다. 몰입은 하나를 선택해서 그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마태는 여인이 어떻게 예수님께 집중하는 지 조명한다. 머리에 부은 향유는 ‘매우 귀한’ 것이다. 사치스러운 화장품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죽은 자에게 기름을 부을 때도 사용되었다. 마가는 ‘매우 값진’, 요한은 ‘지극히 비싼’이라고 값을 강조하는 것과 다르다(막 14:3; 요 12:3). 가격표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마태는 축약을 통해 향유에 관한 디테일한 설명을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3. 가지치기

‘보는 것은 믿는 것이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보는 것이 왜 믿는 것일까? 보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상품에 상관없이 야한 복장의 미녀가 광고에 등장하면 남성들의 판단력이 흐려져 지갑을 쉽게 연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제자들의 눈에 그 여인이 미녀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 여인의 행동조차 좋게 보이지 않았는가.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이다(히 12:2).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 정성을 다해 사랑을 표현하는 여인의 아름다움이어야 한다. 마가는 제 삼자의 보고 형식에 따른다.

마태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보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가지치기를 한다. 가지치기 할 때의 기본은 ‘괜스레 아까워하지 말고 대범하게 불필요한 가지를 쳐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다. 마태는 향유의 종류에 대한 정보를 숨긴다. 마가와 요한은 ‘순전한 나드’라고 분명하게 밝힌다(막 14:3; 요 12:3). 이 향유는 감송유(spikenard)다. 원산지는 인도이다. 나드에서 채취한 점액성 액체이다. 석고병에 담아두었다가 옥합을 깨뜨려서 사용했을 것이다. 마태는 원산지와 용기에 대한 언급을 생략한다. 매우 귀한 향유는 의심할 여지없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였다. 여인의 헌신은 그래서 값지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가야바와 유대의 계획 사이의 대조다.

4. 예수님께 포커스를 맞추다

반성(反省)의 성(省) 자는 두 가지로 훈독을 한다. ‘성’으로 읽으면 살피고 돌아본다는 의미이다. ‘생’으로 읽으면 덜어낸다는 뜻이 된다. 이 둘은 묘하게 맞닿아 있다. 어찌 보면 잘 살피는 일은 잘 덜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 해도 될 것을 갈라내고, 집중해야 할 것에 집중에 불필요한 애드리브는 솎아낸다. 마태는 세리 출신이 아닌가. 누구보다 꼼꼼한 세리의 기질을 살려 향유의 종류, 가격, 용량을 충분히 살필 법도 하다. 이런 분야에 누구보다 오지랖을 넓힐 수 있다. 기자로서 첨삭을 내려놓는다. 마태는 온통 무명의 한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에 집중한다. 아니 기름 부음을 당하는 예수님에게 집중한다. 보통 식사 전에 발보다 머리에 기름을 부은 것은 값비싼 향유를 다루는 일상적인 습관이다. 그 여인이 옥합을 가지고 머리에 부음을 받는 예수님이 중요하다. 그래서 옥합을 깨뜨리는 디테일에 대해서 편집한다.

‘단순하게 살아라’의 저자 로타르 자이베르트에 따르면 삶을 중요한 일과 급한 일을 축으로 4개 범주로 나눈다.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삶을 단순화시키고 불필요한 가지들을 깔끔하게 쳐낸 후에, 중요하지만 그다지 급하진 않은 일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라는 것이다. 마태는 여인의 행동 묘사를 단순화시킨다.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과감하게 가지를 친다. 마가는 ‘그는 힘을 다하여’를 강조한다면 마태는 생략한다. 마태는 그 여인의 정성과 모습을 알고 있었지만 디테일한 묘사를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한 것 같다. 여인의 정성과 노력보다 예수님의 몸에 기름 부음이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에 주의를 집중시키고자 한다. 여인이 예수님께 온통 집중하는 사이에 제자들을 예수님이 아니라 여인의 손에 있는 향유 값에 시선을 모으고 있다.

1970년대 말 한 지방 국립대 입시 문제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의 뜻을 쓰시오’. 그런데 희대의 오답이 있었다고 한다. “정신이 1도라도 비뚤어지면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 제자들이 그랬다. 정신이 비뚤어져 있다. 마태는 예수님은 다음 날이면 십자가에 목 박하실 것에 정신을 모으고 계신다. 여인은 부지중에 예수님의 장례를 예표하는 기름을 붓는 것에 몰입하고 있다. 제자들의 정신이 한참 비뚤어져 있다. 향유 가격을 계산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한 가지 일에 진지하게 접근해서 집중하지 못한다. 이를 두고 미디어 용어로는 ‘쿼터리즘’이라고 한다. 15분 이상 집중하기 힘들다는 의미다. 마태는 오직 여인이 향한 예수님께 집중한다. 누가 헌신하느냐. 얼마나 받쳤느냐는 세간의 관심사이다. 마태는 다르다. 아마도 그 여인도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께 포커스를 맞추었을 것이다. 초점이 흐려지지 않으려는 장치를 여러 곳에서 발견한다. “초점을 맞추기 전까지 햇빛은 아무것도 태우지 못한다.”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벨이 남긴 말이다. 얼마를 했느냐, 누가 했느냐를 겨루던 시대는 지났다. 집중이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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