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욱 목사의 인문학 산책 (17)

아Q정전

이상욱 목사│목민교회(인천) 담임, 호서대학교( Ph.D),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의학도에서 문학도로

“어느 한 양반가에 묶인 노비 일가가 있었다. 그들은 열심히 일했고, 그들을 좋게 본 주인이 노비들을 자유롭게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날 노비들에게 그 마음을 밝혔다. 그러자 노비들이 하는 말은 ‘우릴 내치지 말아주십시오. 주인님’이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실린 내용이다. 노예근성이란 남이 시키는 대로 하거나 주체성 없이 남의 눈치만 보는 성질을 뜻한다. 말 그대로 자유가 주어졌거나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저 자리에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결국 노예 상태에 만족하는 정신 또는 근성을 말한다. 아Q는 노예근성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다. 작가가 『아Q정전』에서 묘사한 주인공 아Q라는 인물은 자신들이 혁명의 주체가 돼야 함에도 봉건적 패배주의에 휩싸여 있는 중국인들을 알레고리화 시킨 존재이다.

중국 바깥에 가장 많이 알려진 중국 현대 작가는 루쉰(魯迅)이다. 마오쩌둥식 루쉰 평가가 절정에 이른 것은 문화대혁명 시기였다. 이때 사회주의 문학의 정전은 소련의 고리키와 중국의 루쉰 둘이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루쉰을 재평가하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루쉰 소설 중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Q정전』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1866~1944)이 『아Q정전』의 프랑스어 번역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문학 지망생이 된 동기는 특별하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 그는 의술의 빈약함을 가슴 아파하며 장차 훌륭한 의사가 되기로 다짐했다. 그 당시는 러·일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전쟁에 관한 영화를 자주 보여 주었다. 어느 날, 그는 영화 속에서 건장한 체격의 중국인 한 사람이 러시아의 첩자 노릇을 했다는 죄명으로 일본인에게 목이 잘려 처형당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그는 몸이 아무리 건강하고 튼튼하다 해도 정신이 병들고 약한 사람은 남들의 구경거리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당장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중국으로 돌아와 버렸다. 몸의 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마음의 병을 고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기의종문(棄醫從文)’의 전설이자 루쉰 문학의 기원, 나아가서는 중국 현대 문학의 기원에 관한 전설적 이야기라 할 이른바 ‘환등기 사건’ 에피소드이다. 그는 자신의 한 저서의 서문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지금은 아주 절박한 시기이다. 작가의 임무는 해로운 사물에 대하여 즉각 반응하거나 항의 투쟁하는, 느낌과 반응의 신경, 공격과 방어의 수족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장편 대작에 마음을 두고 미래의 문화를 위해 설계하는 것도 물론 좋은 일이지만 현재를 위해 항쟁하는 것 역시 현재와 미래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현재를 잃는다면 미래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루쉰은 『아Q정전』을 통해서 공허한 영웅주의와 그것과 표리(表裏)를 이루는 불쌍한 패배주의의 민족적인 현실과 싸움을 시도하고 있다. 즉, 자신의 현실적인 모습을 직시하지 못한 채 항상 자기기만으로 현실을 호도하면서 살아가는 아Q의 이른바 '정신승리법'을, 민족적인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대국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낡은 지식인과 중국민들에게서 발견하고 이를 형상화하여 전쟁을 선포한다. ‘싸움꾼’ 루쉰의 무기는 문학이었다. 그는 『광인일기』로 현대 중국의 혁명적 현실주의 문학의 초석을 놓았고, 『아Q정전』으로 중국문학을 단번에 세계적 수준에 올려놓았다. 작가 루쉰에게 있어 문학은 현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왜 『아Q정전』인가?

『아Q정전』은 신해혁명을 전후한 10여 년간의 중국의 사회와 생활을 거시적인 역사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Q의 행장을 기본적인 작품의 모토로 하여, 거시와 미시, 역사와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한 폭의 생생한 생활의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 주며, 근심과 울분에 가득한 역사의 상황을 전개하고 있다. 소설의 구성은 모두 9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1장 서(序): 제목에 대한 설명이다. Q는 큐라고 읽는데 이 발음은 청나라의 전통적 머리 모양 변발(辮髮)을 뜻하는 영어단어 queue와 발음이 같고, 대문자 Q의 모양이 변발의 모양과 유사하다. 아(阿)는 이름이나 성 앞에 붙여 친근한 호칭으로 사용한다. ‘정전’이라는 말은 전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이야기’ 정도의 의미가 있다.

제2장 승리의 기록은 아Q는 언제부턴지 웨이주앙(未莊)의 토지 묘에 사는 농촌 빈민이다. 그는 자부심이 무척 강한데, 실제 자부심을 가질 아무런 근거도 없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조롱당하고 구타당할 뿐이다. 그것을 그는 정신 승리법으로 이겨낸다.

제3장 속 승리의 기록: 어느 날 아Q는 왕 털보(王鬍)에게 얻어맞고 가짜 양놈(假洋鬼子)에게 매를 맞는데, 자신이 평소에 경멸하던 사람들에게 거꾸로 얻어맞고 만 이 일들은 정신 승리법으로도 이겨내지 못한다. 그러나 아Q는 만만한 젊은 여승을 희롱함으로써 승리의 쾌감을 맛본다.

제4장 연애의 비극: 젊은 여승을 희롱한 뒤 뜻하지 않게 마음이 들뜬 아Q는 짜오 나으리(趙太爺) 댁에서 일을 해주다가 그 집의 하녀 우마(吳媽)게 “나하고 자자”라고 외치며 그녀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 일로 아Q는 매를 맞고, 마을의 청원 경찰[地保]에게 술값을 뜯기고, 짜오. 나으리 댁에 피해 보상을 해준다. 그 바람에 털모자며 솜이불을 저당 잡히고 품삯과 웃옷을 다 뺏긴다.

제5장 생계의 문제: 짜오 나으리 댁 사건 이후, 아Q는 품팔이 일거리가 끊어져 생계에 위협을 받는다. 자기 일거리를 대신 맡은 샤오D(小D)를 때려주려 하지만 싸움은 무승부로 끝나고 만다. 아Q는 암자의 채나 밭에서 무를 훔쳐 먹고 현성(縣城)으로 간다.

제6장 중흥에서 말로까지: 새 옷을 입고 현금을 지니고서 웨이주앙으로 돌아온 아Q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된다. 더구나 현성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팔면서부터 사람들의 총애를 받는다. 그러나 그 물건들이 장물이며 그의 역할이 망보기였고 그가 겁 많은 좀도둑에 불과함이 밝혀지자 다시 멸시당하기 시작한다.

제7장 혁명: 혁명당의 현성 입성으로 나리들이 두려워하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아Q는 혁명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혁명당에 투항할 것을 결심한다. 마음이 들뜬 그는 “반란이다! 반란이다!”라고 외치며 거리를 활보하여 짜오 나으리 등의 사람들을 겁먹게 한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아Q는 짜오 수재(趙秀才)와 가짜 양놈이 “벌써 혁명을 한” 것을 알게 된다.

제8장 혁명 불허: 혁명당의 현성 입성에도 불구하고 웨이주앙은 물론 현성에도 변발 문제 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아Q는 혁명당에 새로 입당한 가짜 양놈에게 자기도 끼어 달라고 부탁하려다 욕만 먹고 쫓겨난다. 그러던 어느 날, 도둑들에게 짜오 나으리 댁이 약탈당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제9장 대단원: 아Q는 짜오 나으리 댁을 약탈한 강도단의 일원으로 간주하여 체포된다. 의사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신문 끝에 총살형이 결정되어 드디어 아Q는 영문도 모르는 채 총살당한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인간

인간은 역사적 존재다.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먼저 나아가는 자들은 그 수레바퀴에 깔려 죽게 된다. 바퀴와 함께 구르지 않고 떨어져 뒤에 남는 자들은 바퀴의 먼지에 휩싸여 질식하게 된다. 이것이 인간이 지내온 고난의 역사며, 앞으로도 이 역사의 수레바퀴는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군상을 끌고 어디론가 굴러갈 것이다. 『아Q 정전』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한 인간, 더군다나 남들에게 우쭐대고 싶어서 하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인간이, 자신의 왜소함과 무기력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걸어갈 수밖에 없는 삶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루쉰은 아Q의 성격을 통해 대부분 인간이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는 `자기 합리화'를 극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고 자신을 `버러지'라 하고서도, 󰡒나는 자신을 스스로 천하게 여길 수 있는 제일인자다󰡓라고 되뇌면서 상대방에 대한 앙심을 씻어 내버린다. 대부분 인간은 아Q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정신적 승리법을 통해 일정 부분 이상 자신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사실 불행이란 인간의 삶에서 필연적인 요소인데 대부분 사람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럴듯한 이유를 외부적 원인으로 돌리거나 다른 사람의 더 큰 불행을 상기해내어 자신의 고통을 축소해 나가는 방법을 쓴다.

그러나 루쉰이 그린 아Q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가해지는 피압박하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자신의 과거를 과장하거나 현실을 냉소적으로 비판하며 자신을 위안해버리는 가련한 존재다. 루쉰은 이러한 존재들의 말로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싶어 했다. 이런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역사의 진로를 근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가진 것도 없이 자존심만 강하고, 미래보다는 옛날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간다. 불행한 일은 늘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대부분 중국인은 자신들이 혁명의 주체가 돼야 함에도 봉건적 패배주의에 휩싸여 있다. 도리어 혁명을 모반이라 하여 금기시하는 미몽에서 깨지 못하고 있음을 직시한다.

 

노예들이 가득한 세상

짜오지아런은 오늘날 중국의 지배 계급을 가리킨다. ‘혈통 좋고, 권력 있고, 돈 있고, 공금을 제멋대로 쓰고, 공유(公有) 자산을 자기들끼리 공유(共有)하고,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는 것’이 짜오지아런의 특징이다. 짜오지아런에게 지배당하는 수많은 사람이 오늘날의 아Q이다.

그런데 이 아Q들 중 많은 사람이 자신도 짜오지아런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이 비유에 따라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이 짜오 씨인 줄로 생각(착각)하는 것이다. ‘짜오씨 아Q’들은 짜오지아런을 지지하고 아Q를 경멸하며, 아Q의 각성을 비난하고 심지어 증오한다. 100년 전의 짜오지아런보다 지금의 짜오지아런이 훨씬 더 교활해졌다. 그리하여, 『아Q정전』에서는 짜오 나으리가 짜오 씨라 자처한 아Q를 욕하면서 “네가 어디가 짜오 씨 자격이 있냐”라고 말했었지만, 오늘날은 각성한 사람들이 ‘짜오 씨 아Q’들을 풍자적으로 비판하면서 “너도 짜오 씨 자격이 있냐”라고 묻게 되었다.

이것이 중국만의 일일까? 오늘날도 빈민층이면서 스스로 중산층이라 착각하는 아Q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스스로 아Q라고 말하면 자신의 일천한 신분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이나 미국도 무엇이 다를 것인가?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도토리 키 재기가 아니겠는가? 최근 필자가 본 한국의 한 판타지 소설에서 판타지 세계의 왕이 현대 한국 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곳은 참 기이한 곳이오. 온 나라가 노예로 가득한 곳이오. 대충 가늠컨대 천에 다섯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노예라 할 수 있소. 대부분 노예는 자신이 노예라는 자각이 없소. 다들 하나같이 자신을 자유민이라 여기고 있지.(실탄, 『리미트리스 드림』에서)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 개

윤동주는 그의 시 “또 다른 고향”에서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거다’라고 했다. 시인은 어둠을 바라보며 짖지 못하는 자신을 '지조 높은 개'를 통해 질책한다. 1941년 일본유학을 위해 '히라누마 도주(平沼東柱)'라고 창씨개명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괴로웠다. 윤동주의 시대뿐 아니라 1970~1980년대도 참 어둡고 엄혹한 세월이었다.

젊은이들은 어둠을 따라 목 핏줄을 세우며 새벽을 노래했고, 사람다운 삶을 어머니만큼 그리워했다. 하지만 그 시절 전부는 아니지만, 교회는 역사 앞에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지 못했다. 교회는 서슬 퍼런 권력을 두려워하기도 했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부러워하기도 하면서 그 권력에 편승했다. 오랜 세월 이어온 교회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다.

"들의 모든 짐승들아 숲 가운데의 모든 짐승들아 와서 먹으라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사 56:9-12)".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영어 성경과 헬라어의 뜻을 보면, "너희는 세상을 비추는 특별한 그 빛이다."라는 뜻이다. 작은 촛불에도 어둠은 물러간다. 이 세상은 아Q와 짜오지아런과 같은 어둠에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회는 어둠의 빛이어야 한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빛이 되지 못하는 파수꾼들을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요,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들'이라고 말한다. 사람을 개 취급하는 것, 그것도 당시 유력한 종교지도자들을 개중에도 '벙어리와 같은 개'로 여기는 것은 집을 지키는 옆집 개보다 못하다는 통렬한 고발이다.

부당한 억압과 통제에 사람들이 모두 분노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현실 인식 능력에 따라 대응 자세도 다르다. 현실 문제를 직시하는 사람은 부당한 압제에 저항할 수 있다. 하지만 삶의 현안에 둔감한 사람은 오히려 자기를 능멸당해 마땅한 사람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우리는 자신을 자유민이라고 여기는 노예, 또 하나의 아Q인지 모른다. 소비 사회의 자발적 노예이며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말에 따르면, 자아가 무한한 착취를 당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줄 모르는, 우리에 대한 부당한 지배를 우리 자신이 정당화해주는, 그런 자해(自害)의 메커니즘 속에 깊숙이 잠겨 있는 어리석고 불쌍한 존재가 아니냐? (『피로 사회』에서)라고 묻는다. 아Q가 우리에게 묻는 것과 동일하다.

현실 인식이 부족한 사람은 역사와 사회발전에도 이롭지 않다. 아Q는 신해혁명이 전개되었을 때도 역사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 아Q처럼 과대망상에 빠져 살아온 사람은 사회가 바뀌어도 공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Q는 공상적 억압자로 군림하는 놀이를 즐기면서 혁명을 개인적인 앙갚음의 기회로 활동한다.

물론 약자의 자기 망상은 약자가 처한 상황을 고려할 때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저항 수단을 빼앗긴 사람은 자기 합리화로 방어하는 게 현실적으로 유용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합리화를 통한 허위적 대응이야말로 자신을 노예 신분으로 추락시키는 위험요소이다. 왜냐하면, 마치 자기가 삶의 지배자가 된 듯 착각하게 만들어 현실을 직시하기 어려워지고 굴종의 관계는 더 굳어지기 때문이다. 근대적 인간이라면 일상생활을 넘어 사회 공간에서 비판적인 성찰 능력을 지닐 때 노예근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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