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시대에서 밀려나는 한국교회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가까이 다가오는 통일 노래

조국의 현실과 미래의 운명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북쪽에서 기울어지기 시작한 가마솥의 환상을 보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피를 토하면서 민족적인 회개를 촉구했지만 동역자들의 비웃음과 권력자들의 폭력, 그리고 무지한 군중의 함성에 묻혀 하나님의 참 종이 거짓선지자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한국이 근세기에 겪은 민족적 수난은 수 세기가 흘러도 잊지 못할 것이다. 열강의 눈치를 보며 외줄을 타듯 하던 곡예의 정치는 일본제국주의의 침탈로 인해 36년간 고초를 겪어야 했고, 이념의 충돌로 야기된 동족간의 전쟁은 분단된 조국의 아픔을 반세기 이상이나 겪도록 했다.

통일의 노래 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졌고 모두가 살아생전에 영광된 민족의 새 아침을 맞을 것이라는 부푼 꿈에 젖어들 있다. 참으로 그렇게 되기를 희구한다. 과연 통일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전쟁이 없는 평화통일, 군사적인 통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은총의 통일이 주어지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70년 만에 고레스에 의해 유다민족이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벗어나 조국으로 귀환했듯이, 70년 소비에트 공화국이 고르비(고르바초프의 애칭)에 의해 무너져 내렸듯이, 반세기에 이른 분단의 아픔이 하나님이 보내신 누군가에 의해 치유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한국교회는 통일의 밑거름인가 걸림돌인가

하나님에 의한 통일은 한국교회가 한국역사에서 제 자리를 잡고 제 역할을 감당했을 때 찾아오는 자연적인 열매라 믿는다. 그러나 안타까운 현실이 있다. 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통일을 설교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한국교회는 통일의 밑거름이 되기는커녕 통일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는지! 한국교회의 오만함으로 인해 형성된 먹구름이 공중을 뒤덮어 통일의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했고, 메아리만 울리는 공허한 외침처럼 구체적인 삶이 거세된 구태의연한 제의적 설교로 인해 통일의 몸체가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 새벽이면 은은히 들려오던 교회당 종소리가 사라졌다. 새벽의 밤공기를 가르고 지친 영혼을 어루만지며 일깨우던 그 종소리가 이웃을 괴롭히는 불면의 원흉이 되어 법적 제재를 받게 된 것이란다. 이른 새벽 두부장수의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어두웠던 저 시대에 새벽을 깨우던 교회의 차임벨이 우리의 기억 저 건너편으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아직도 산사의 종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것은 어쩌면 나라와 민족에 대한 한국교회의 영향력이 스러져 갔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상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국교회가 민중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역사의 상처를 쓰다듬고 사회의 소금 역할을 제대로 했던들 설사 새벽종소리로 잠을 설치게 되었을망정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손에서 하나 된 두 막대기

두 막대기가 한 손에서 하나의 막대기로 합해질 수만 있다면, 스가랴가 보았던 환상처럼 은총과 연락의 두 막대기가 전능자의 손에서 하나일수만 있다면 이 몸뚱이를 북으로 만들어 신명나게 두들겨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꿈꿔온 통일의 길이 우리가 원치 않고 생각지도 않던 방도로 진행될 것이면 그것도 과연 하나님의 축복이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지? 최악의 시나리오는 전쟁에 의한 강한 쪽으로의 병합이 될 것이다. 남북 어느 쪽이 되건 이념이 통일되고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값비싼 희생의 시기가 이어질 것이다.

다음으로는 강대국의 개입에 의한 정치적 흥정 식 통일일 것이다. 민족 내부의 합의에 의한 기적적인 통일도 생각할 수 있다. 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업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여러 갈래의 가능성과 함께 다양한 변수가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배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부족한 종이 우려하기로는 하나님의 섭리에 중요 역할을 담당해야 할 한국교회의 기능적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현금 한국교회의 모습은 하나님의 심판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느낌마저 준다. 비관적인 안목이 지나친 나만의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변질된 황금송아지를 깨뜨리는 한국교회

한국교회는 하나의 지체로서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서야 한다. 자체적인 정결을 위해 스스로의 환부에 메스를 가하는 자정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으니 한반도는 절대 안전할 것이라는 거짓 예언들을 금해야 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고 바알처럼 섬기면서 밤낮을 부르짖어본들 하나님이 응답하실 리 없다. 한국교회는 그 자신의 변질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마저 흐리게 만들었다. 무지한 군중들에 의해 한 순간 황금송아지로 변질되어야 했던 거룩하신 야훼처럼 한국교회의 하나님은 번영신학과 성공목회의 이중 칠로 두텁게 도금이 되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듯 신실한 주님의 종들이 이제는 골방을 벗어나와 광야의 군중들과 마주쳐야 한다. 그들의 손과 마음에 묻힌 황금 부스러기들을 털어내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대제사장 아론을 질책했던 모세처럼 거룩한 종들을 깨우치는 동역자가 나와야 한다. 그래서 40일 기도 후에 전수받은 돌비를 깨뜨렸던 모세처럼 영광의 말씀에 도끼질을 해야 한다. 또 다시 산에 올라야 할망정 더럽힌 하나님의 거룩함을 분노해야 하고 질기디 질긴 악의 축을 제거해야 한다.

 

골리앗으로 변해 버린 한국교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임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멸망을 당했다. 하나님께서 참 감람나무도 아끼지 않으셨다면 하물며 돌 감람나무이겠는가? 한국교회는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자기최면에서 깨어나야 한다. 제2의 이스라엘 운운하는 나르시시즘의 미몽을 벗어나야 한다. 순수함을 잃어버린 교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 수 없다. 하나님의 법궤와 다곤의 신상은 함께 할 수 없다. 골리앗을 무너뜨린 어제의 다윗이 오늘에는 골리앗이 되어가고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다윗의 몸에 걸친 사울의 갑옷 무게로 인해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외형적 화려함과는 달리 내부의 연약함과 창질의 썩어짐 같은 부패로 인해 한국교회는 이가봇이 되었다.

하나님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말 것을 명했지만 이 민족은 이미 기울기를 시작했고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그 경사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져 가는 한국을 세계의 열방들은 구경하고 있다. 한국의 좌경화 현상은 두 정권을 이어오면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소위 촛불로 탄생한 이 정권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이미 국내의 대형교회들에는 열성적인 신자를 가장한 좌익 성향의 청장년층이 포진되어 있다. 한국교회를 까부수기 위해 북측에서 하달된 지침사항에 의해 50대(大) 교회 목회자들의 비리를 이미 캐내거나 캐고 있다는 지난 이야기는 그저 괴담이기를 바란다.

 

능력의 지팡이인가? 무른 황금지팡이인가?

한국은 이미 사상전쟁에서 북한에 밀리고 있다. 북한 관련의 문서들에서는 단순한 구호만이 아니라 체제를 위해 목숨 버릴 각오로 똘똘 뭉친 이들이 부지기수다. 순교를 기도로 부르짖고 찬송으로 외치는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과연 순교의 의지가 있을까? 지금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휴전선 155마일의 길 따라 자신의 한 몸을 가지런히 눕혀야 한다면, 그리고 그 가슴 위로 최신형 러시아제 전차가 굴러가게 된다면, 그래도 민족 사랑의 일념으로 목숨을 내던질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있을 것인가?

한국인들의 정신적 강도(强度)는 이미 무를 대로 물러 있다. 역동적인 힘이 교회를 떠받쳐주지 못하고 있다. 모세의 손에 들렸던 능력의 지팡이 대신 바로의 황금 지팡이가 들려졌다. 지도자들의 손에는 모두 잘 장식된 지팡이들이 들려 있지만 아론의 지팡이처럼 잎이 난 지팡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의 한국교회는 밖으로만 퍼져나가려는 원심작용에 밀려 구심력을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dynamite와도 같은 폭발력은 커졌지만 dynamic한 응집력이 줄어들어 내외의 강도가 다르고 질과 양이 정비례하지 못하는 이상 구조가 형성되었다. 영광의 역사를 회상하기가 내일의 비전을 그리는 것보다 마음 편하게 느껴졌다. 한국 민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감당해야 할 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잘못을 잘못이라 말하지 못하는 한국교회

참으로 한국교회의 구심점이 없다. 헛소리가 외쳐져도 무관심이고 바른 소리를 외쳐도 무관심이다. 오래 전 C목사는 동국대대학원 특강에서 친정집 방문 운운하며 불교 나름의 구원이 있음을 말해 박수 받았다. 조국 교회의 보수층을 대변한다던 그의 말이었다. 그럴 만한 분위기였다 할지라도 할 말은 가려야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와서는 안 될 말이었다. 그가 지닌 말 한 마디의 무게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러했다. 가톨릭도 마찬가지다. 십 수 년 전 탄핵 이후 개최된 어느 정당의 만찬석장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한국의 예수라 부추긴 인물은 당시 민주화 운동 기념 사업회 이사장으로 있던 함세웅 신부였다.

여순 반란은 민중 항쟁이요 이승만은 미국의 괴뢰였다며 망언을 쏟아내도 방송은 도올에게 자주 구애를 보낸다. 구약폐기론을 주장하고 요한의 신성한 복음을 마구잡이식으로 해체 조각해도 자칭 기독교인이라 칭하는 그는 버젓이 언론과 대중 사이를 활보한다. 신성모독도 이쯤 되면 도를 지나쳤다 할 것이다. 이 모든 해프닝을 바라볼 때 민족의 정기가 빛을 잃었다고 탄식할 수밖에 없다. 골짜기로 흐르던 물 같던 그 세력이 이제는 강물이 되고 바닷물에 섞여 국토의 삼면을 에워싼 동해와 남해와 서해의 물길처럼 이 민족의 정기를 가둬버리고 있다.

 

풍전등화의 남북관계

탈북 사태로 불거지기 시작한 남북한의 첨예한 대립과 정치 흥정은 벼랑 끝에 매달린 외줄을 타는 것처럼 곡예의 연속이었다. 북측은 노회함을 버리지 않았고 남측은 로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당하는 것은 늘 남측이었다. 경제 지원을 비롯한 각종 특혜가 주어졌지만 늘 돌아오는 것은 배신으로 인한 탄식과 깊은 한숨이었다. 그렇게 개성공단이 문을 닫았고 많은 기업인들이 타격을 입었고 실제적으로 한국민 전체의 혈세가 낭비되었다. 관계 기업인들의 타들어가는 속은 북한 지도자의 마음먹기에 따라 희비가 갈리니 이런 불합리가 어디 있겠는가!

2018년 따스한 봄날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판문점 회담 과정과 연이은 선언문은 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한반도에 새봄이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게 했다. 북중, 한미, 그리고 북미 회담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두 번에 걸친 회담에 기대를 걸었지만 내실이 없어 빈 깡통의 울림만 컸기에 모두의 기대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볼품없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온순함 모습을 보이다가 으름장을 놓을 때면 남쪽의 일부 정치인들은 놀란 표정이고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도 약간은 눈치를 본다. 그래서 여전히 조국은 풍전등화의 상황이다. 기대와 우려, 평화와 전쟁의 양쪽 끈을 붙들고 가슴 조려하는 민초들은 무색의 미래만을 응시할 뿐이다.

 

북한 사태 너머에 있는 중국의 야욕

앞으로 북한 사태는 많은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중국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래 전부터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작업을 지속해 왔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만만디로 보이지만 대단히 빠른 속력으로 질주하면서 세계의 으뜸이 되고자 경주해왔다. 중국의 상대는 현재 미국밖에 없다. 수천 년을 내려온 중화사상이 현실화되기까지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뻗어나갈 것이다. 미중 간의 무역 분쟁을 고비로 갈등이 심화되고 세계에 대한 실질적인 장악력을 돈의 위력으로 뻗쳐가는 중국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중국의 목표는 미국과의 대등이 아니다. 미국을 넘어서는 월등에 있다. 중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강한 나라다. 동북공정을 공개적으로 시도하면서 역사를 왜곡하지만 한국정부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해왔다. 그들의 사전, 사후 작업이 너무나 철저하고 완벽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중국의 것에 비하면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하다. 발해의 역사는 아예 발굴과 더불어 중국 지방정권의 하나였음을 치밀하게 조작해도 한국정부는 꿀 먹은 벙어리고 울분을 감추지 못한 식자층은 벙어리 냉가슴만 앓을 뿐이다. 그토록 오랜 동안 중국을 대국으로 섬겨왔던 역사의 잔재 때문인지 한국인은 중국의 우격다짐에 묵묵부답이다. 고구려의 옛 영토를 확인하고 발해의 전성기를 표준삼아 대한민국의 지도를 새로 그리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학술적인 연구와 토론에 끝날 것이 아니라 이 민족의 중추적인 미래 사업으로 설정하여 영토회복 운동을 강렬하고도 부단히 전개해 나가야 한다. 광개토대왕을 두 번 죽이는 일이 없도록 우리 후손들이 일어나야 한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