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는 §. 10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는데, 1. 창조자로서 하나님, 2. 영원한 아버지로 구성했다.

1. 창조자로서 하나님에서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자가 될 수 없음을 명시했다. 서철원은 The Creation-mediatorship of Jesus Christ: A Study in the Relation of the Incarnation and the Creation(Radopi, 1982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중보자임을 논증했다. 칼 바르트의 창조 이해가 정통 신학의 회복 계열(restitution theology, Irenaeus, Kuyper, Bavinck, Berkouwer, Van Ruler)이 아닌 앙양 계열(elevation theology, Auns Scotus, Karl Barth, H. Berkhof, Karl Ranher)로 분류했다. 바르트는 예수가 기원자, 창조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내용으로 “창조자로서 하나님”을 구성했다. 그런 방식에서 삼위일체론(Trinitätslehre)을 이해하도록 유도했다(KD I/1., 410, GG 502, CD, 390). 참고로 우리는 ‘삼위일체’가 ‘론(lehre)’이 아니라, ‘교리(Dogma)’임을 밝힌다. 바르트는 ‘론’을 학문적 수준과 훈련으로 평가했다. ‘교리’는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이다.

바르트는 “2. 영원한 아버지” 첫 부분에서(KD I/1., 411, GG 502, CD, 390) 가능성으로 시작한다. 결정적인 명제(der entscheidende Satz)는 “누가 하나님 아버지인가?(Wer ist Gott der Vater?)”라고 시작한다. 바르트는 삼일성 신(des dreieinigen Gott/triune God ※ 박순경 번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번역해서 이해에 혼선을 준다)에 대한 지식 요소가 상승하게 되는데, 그 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일 수 있다는 것이다(Gott kann als Vater Jesu Christi darum unser Vater sein).

그것이 신(神)이 스스로 자기를 계시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인식했다는 바르트의 전제이다(KD I/1., 411, GG 503, CD, 390). 신이 아버지가 되는 것은 존재양식(Seinsweise)인데, 예수가 자기를 계시한 계시자와 마주섬으로 드러난 것이다. 바르트는 성서의 증언이 아버지(계시자)의 계시 내용(Inhalt der Offenbarung des Vaters)이 나사렛 예수라고 받는 것은 문자대로 받는 것이라고 제언했다. 바르트는 그 과정을 내용과 형식(Inhalt und Form)으로 구분했고, 내용을 신적-필연성(göttlich-notwendig)으로 형식은 인간적-우연성(menschlich-zufällig)으로 분류했다. 내용은 형식에 메이지 않고 자유롭지만, 형식에서 내용은 반드시 예수를 통해서 알려진다고 했다(KD I/1., 411, GG 503, CD, 390).

바르트에게 내용은 아버지이고, 형식은 나사렛 예수가 된다. 비록 바르트에게 배타성이 있지만, 아버지와 아들을 존재양식, 계시 관계(계시자와 계시내용)로 보는 것은 정통신학이 아버지와 아들을 동일실체(homoousios)로 보는 것과 전혀 다르다. 바르트의 견해는 아리우스가 주장한 유사실체(homoiousios)보다 더 과격하게 바른 믿음에서 이탈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르트는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면서,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은 내용의 방향을 제시했고, 다만 형식은 예수로 제한하면서 배타성이 있다고 제시하기도 한다. 바르트의 개념이 어떤 면에서 매혹적인 설득이 있다. 그것은 신은 무한한 내용을 인간에게 주고, 인간 예수는 형식으로 아버지를 알도록 인도하는 유일자로 주장하기 때문이다.

바르트 신학의 특징은 계시가 한 계시(the one revelation)라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단일 계획(God's single plan)이라고 했다. 정통신학, 칼빈신학에서는 무한한 하나님의 창조 계시를 인정하지만, 그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죄사함, 성령의 내주가 선행되어야 한다(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구분함). 신학에서 죄의 위치가 매우 중요한데, 바르트에게 죄는 신학 진행에서 중요한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아담의 실존성에 대한 논의까지 확장된다(참고. 『아담의 역사성 논쟁』,김광남 역(서울:새물결플러스, 2015).

필자는 바르트가 “예수가 증언한 아버지”를 새로운 “교회의 종교”의 목표로 제언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그렇게 계획한 신의 단일 계시를 억압할 어떤 인간의 사상이나 단체가 없다고 규정한다. 그래서 마치 신의 자유와 영원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 계시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것이고, 한 좌표의 기능으로 전락시켰다. 즉 바르트 신학에서 예수는 인도자나 교사의 역할도 아닌 단순 좌표 기능을 한 것이다. 자유주의에서 예수는 탁월한 종교지도자, 탁월한 윤리 교사 등으로 그리려고 했다. 그런데 바르트는 예수를 유일한 좌표(배타성)로 주장하면서, 신의 영원성과 자유를 강조한다. 결국 신에 대해서 가능성을 개방하면서, 모든 인간에게 가능성을 개방한다.

바르트는 신(神)을 존재 자체(esse a se) 혹은 가장 완전한 존재(ens perfectissimum)라고 규정한다. 데카르트는 ens perfectissimum를 형이상학 체계에서 신의 성격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악을 선의 결핍이라고 유도하면서 미로(Cartisian circle)에 집어 넣어버렸다. 바르트는 철학자가 규정한 것과 창조자 아버지와 동일한 것으로 평가했다(KD I/1., 412, GG 504, CD, 391). 그리고 ens perfectissimum 예수의 발표와 관계없다고 제시했다(hat mit oder ohne aufgeklebten Vaternamen mit der Botschaft Jesu von Gott dem Vater nichts zu tun). 즉 아버지가 예수에게 메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예수에게 배타성을 주면서 우상적이라고(Abgott) 제시하고 있고, 그 배타성에 메이지 않는 창조자 아버지를 제시한 것이다.

“예수라는 한 인간에서 우연하게 아버지가 계시된 것은 신의 자유롭고 독특한 계시이다. 그러나 신은 결코 그 배타적인 계시에 메이지 않는다. 그 신이 창조자인데, 아버지와 같다.”가 §9.2 영원한 아버지 부분 중 약 두 페이지(GG 502-504)의 요약이다. 바르트의 기조는 성경적 증언인 예수의 배타성은 우상이라는 것이다(von jener in den bilischen Zeugnissen gesporochenen Exklusive her, ein Abgott). 바르트는 자기 신 규범을 플라톤 순수 신 개념까지 포함하는 절대적 수준으로 주장했다. 바르트 교회의 신관은 기독교 전통적 삼위일체를 우상적으로 폐기시키고 철학적 신 개념까지 포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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