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종교개혁운동 시리즈 - 제2장 두 종류의 의(義)

제2장 두 종류의 의(義)

지금까지 사람들은 주로 한 종류의 의(義) 즉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해서만 알고 이야기 해왔다. 그러나 성경은 한 종류의 의가 아니라 두 종류의 의 즉 ‘믿음으로 얻는 의’(이신칭의: 以信稱義)와 ‘행함으로 얻는 의’(이행칭의: 以行稱義)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두 종류의 의에 대하여 가장 분명하게 말한 것이 야고보서 2:24이다. 야고보서 2:24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라고 말함으로써 두 종류의 의가 있음을 분명히 말한다. 이제 ‘믿음으로 얻는 의’(이신칭의)와 ‘행함으로 얻는 의’(이행칭의)에 대하여 차례로 알아보기로 하자.

1. 믿음으로 얻는 의 (이신칭의: 以信稱義)

‘믿음으로 얻는 의’(이신칭의)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잘 알고 있으므로, 상세하게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얻는 의’를 말하는 중요한 성경구절들을 몇 곳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1) 로마서 3:26-28

로마서 3:20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하고, 3:28에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말한다(빌립보서 3:9 참고). 여기서 바울은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고 말한다(개역개정은 27절에서‘오직 믿음으로’라고 번역했는데,‘오직’을 추가한 것은 헬라어 원문에 없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두 종류의 의(義) 중에 믿음으로 얻는 첫 번째 의를 위해서는 어떠한 율법의 행함도 필요치 않다. 믿음으로 얻는 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는 의다. 갈 3:26은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한다. 마치 갓난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어떤 행위를 통해서 공로를 세우고 나오지 않는 것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어떤 행위를 통해서 공로를 세우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다”고 로마서 3:22는 말한다. 이 말은 믿음으로 얻는 의는 무조건적이라는 말이다. 믿음으로 얻는 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는 의요,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의요, 평생 가져야할 의다.

2) 로마서 4:1-25

로마서 4:1-25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믿음으로 얻는 의에 대하여 말한다.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행위로써 얻은 것이 아니고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에(16절)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2절). 또 9-11절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임을 강조한다. 12b에서“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고 말한 것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함이다. 그런데 12a절에서는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니라“ 고 말한 것은 할례 받은 유대인을 의식한 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할례 받은 유대인의 조상일 뿐만 아니라,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의 조상도 됨을 강조한다(16절). 13절에서 바울이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고 말한 것도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방인을 의식하고 한 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모든 사람의 조상”(16절), “많은 민족의 조상”(17-18절)이 되었다. 바울이 여기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강조한 것은 율법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받은 유대인보다는 율법도 없고 할례도 받지 않은 이방인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방인의 사도로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 외에도 바울은 로마서 5: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9:30(“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로마서 10:6(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등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사실에 대하여 강조하여 말한다.

 

3) 갈라디아서 2:16

갈라디아서 2:16에서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말한다.

한글개역개정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고 ‘오직’을 넣어서 번역한 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원문인 헬라어 성경에는 ‘오직’이라는 말이 없다. 세계의 다른 번역들도 ‘오직’이라는 말을 넣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고 번역했다. 우리 한글번역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번역이다.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16절 끝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말한다. 또 갈 3:11에서도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라고 말한다. 아래에서 두 종류의 행함에 대하여 살펴보겠지만, 바울은 여기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때에는 행함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때에는 어떤 행위도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갈라디아서 3:26). 이는 우리가 어머니에게서 아이로 태어날 때 어떤 행함을 하고, 어떤 공로를 세우고 태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다음에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서는 행함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래 “3.두 종류의 행함”에서 상론할 것이다.

 

2. 행함으로 얻는 의 (이행칭의 以行稱義)

성경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게 된다고 말한다. 행함으로 얻는 의에 대하여 말하는 성구들을 차례로 알아보기로 하자.

1) 야고보서 2:14-26

야고보는 야고보서 2:14-26에서 행함 없는 믿음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고(14절), 행함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17절) 말한 다음, 21-23절에서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2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어서 야고보는 22절에서 “그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그의 행함으로 그의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 믿음 없이 행함이 나올 수 없다. 그리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 행함 없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고 죽은 믿음이다. 이어서 야고보는 24절에서 다음과 같이 중요한 결론을 내린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성경 가운데서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장 분명하게 말한 성경구절이 바로 24절이다. 여기에서 야고보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야고보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의 이 말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루터의 주장과는 정면으로 대립한다. 누구의 말이 옳은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루터의 말이 옳은가, 아니면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는 야고보의 말이 옳은가? 아래에서 논의할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다른 성경구절들을 살펴보면 그 답이 저절로 나올 것이다. 24절에 이어서 야고보는 25절에서 개생 라합을 예로 들어 이렇게 말한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준 행함으로(수 2:1-24)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야고보는 해석한다. 이어서 야고보는 26절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2:17의 말을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반복한다. 죽은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행함없는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마태복음 7:21; 25:31-46의 예수님의 말씀과 정확히 일치한다.

2) 5:17-48
예수님은 5:20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의(義)는 무슨 의(義)인가? 믿음으로 얻는 의인가, 아니면 행함으로 얻는 의인가? 의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20절 전후(17-46절)에서 예수님은 믿음에 대하여서는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 대신 행함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20절에서 말씀하시는 의는‘행함으로 얻는 의’(이행칭의[以行稱義])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는 행함으로 얻는 의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 의인가? 예수님이 20절에서 말씀하시는 의는“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이다. 예수님은 20절 이하 21-48에서 6가지 대립명제(antithesis)를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6가지 대립명제는 모두 행함에 관한 것이다.

6가지 대립명제에서 예수님이 부정하신 6가지 율법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지키는 율법들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1) 살인하지 말라(21절), 2) 간음하지 말라(27절), 3) 이혼할 때 이혼 증서를 주라(31절), 4) 맹세한 것을 지키라(33절), 5)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38절), 6) 원수를 미워하라(43절)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더 나은 의가 있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더 나은 의란 1) 노하지 않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고 욕하지 않고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지 않고(22절), 2) 마음으로 음욕을 품지 않고(28절), 3)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지 않으며(32절), 4) 맹세하지 않고(34절), 5)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고,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면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으며(39-42절), 6)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해야(44절) 얻어지는 의다. 이런 행함이야말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행함을 능가하는 행함이요 더 나은 의이다. 20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행함을 능가하는 ‘행함으로 얻어지는 의’다.

3) 마태복음 12:36-37

마태복음 12:36-37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dikaiōthese)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다.

37절에서 예수님은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다. 말은 행함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 즉 행함으로 의롭다함(이행칭의)을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말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도 한다(야고보서 3:2-14). 이런 의미에서 말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씀은 옳은 말씀이다. 말은 마음 속에 쌓인 것들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다(마태복음 12:34-35). 이런 의미에서 말은 그 사람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말로 정죄를 받는다는 주님의 말씀은 옳은 말씀이다.

4) 마태복음 25:31-46

마태복음 25:31-46의 최후심판비유에서 심판주는 인자(31절), 임금(34,40,45절), 주(Kyrios 37,44절)로 다양하게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인자(마 12:40; 20:28), 임금(누가복음 19:38, 계시록 17:14; 19:16), 주(마태복음 7:21; 8:2; 누가복음 11:39)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심판주이신 주님께서 오른 편에 있는 양과 같은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부른다. 주님께서 양과 같은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부르고(37,46절) 염소와 같은 사람들을 ‘저주받은 자들’(41절)이라고 부르는 근거는 무엇인가? 믿음인가 행함인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양과 같은 사람들이나 염소와 같은 사람들 모두 심판주를‘주여’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양자 모두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의 차이는 없다. 여기에서 양자의 차이는 믿음에 있지 않고 행함의 여부에 있다. 믿음이 있음과 동시에 행함이 있는(35-36절) 양과 같은 사람들은 행함으로 ‘의인’이 되었고, 염소와 같은 사람들은 믿음이 있지만 행함이 없기 때문에(42-43절)‘의인’이 될 수 없었다. 여기에서 의인이 될 수 있는 조건은 행함이다. 양과 같은 사람들은 행함으로 의롭다함(이행칭의)을 받은 것이다.

양과 같은 사람들은“내가(주님)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본”사람들이다(35-36절). 그러나 염소와 같은 사람들은“내가(주님)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한”사람들이다(42-43절). 이 행함의 차이 때문에, 주님은 선을 행한 양과 같은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부른다. 선을 행하지 않은 염소와 같은 사람들을 ‘저주받은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선을 행하지 않은 염소와 같은 사람들은 ‘저주받은 사람들’로서 영벌에 들어가고(46절), 선을 행한 양과 같은 사람들은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로서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고(34절) 영생에 들어간다(46절).

5) 로마서 8:1-4

바울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라는 로마서 3:28(갈 2:16)의 말씀처럼 믿음을 강조한 사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루터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구원 얻는다”고 말했다. 지난 500여년 동안 개신교인들은 루터의 이 말에 근거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말을 믿고 따르고 있다. 루터의 영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바울 서신에서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바울서신에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이행칭의의 말씀이 있다. 그 말씀이 바로 4절이다. 4절은 이렇게 말한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개정개역이 “율법의 요구”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dikaiōma tou nomou이다. dikaiōma는 롬 3:28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다”는 동사 dikaiousthai의 어근과 같은 어근인 dikaioō에서 나온 명사형이다. dikaioō는“의롭게 하다”는 말인데, dikaiousthai는 dikaioō의 동사형이고, dikaiōma는 dikaioō의 명사형으로서 ‘의’(義), ‘의로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NIV는 dikaiōma tou nomou를 the righteous requirements of the law(율법의 정당한 요구)라고 번역했으나, KJV은 the righteousness of the law(율법의 의)라고 번역했다. KJV의 번역이 헬라어본문의 의미를 더 잘 반영한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dikaiōma는 로마서 1:32; 2:26; 5:18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특히 5:18에서 사용된 dikaiōmatos(dikaiōma의 속격)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행동을 포현할 때 사용되고 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 (dikaiōmatos)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8)

소유격인 dikaiōmatos의 주격 명사는 dikaiōma이다. dikaiōma는 5:18에서‘의’(義)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KJV, NIV, NRSV 등도 이를 the righteousness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런 번역들을 따라서 8:4를 번역하면“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의’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번역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우리에게 ‘율법의 의’가 이루어진다”(the righteousness of the law might be fulfilled in us)는 말은“우리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율법의 의는 율법을 행할 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롬 2:13).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에 대한 말만 한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행칭의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로마서 8:4에서 말하는 바울의 이행칭의는 앞에서 말한 야고보서 2:24에서의 이행칭의와, 예수님이 마태복음 5:20; 마태복음 25:34-37에서 말씀하신 이행칭의와 같은 내용의 이행칭의이다. 로마서 8:3에서 바울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고 말한다. 우리 육신은 연약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으나, 예수를 믿고 의롭다함을 받고(이신칭의), 성령을 받으면 “율법의 의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고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고,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바울은 로마서 2:13에서“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아래와 같이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KJV: but the doers of the law shall be justified. NIV: it is those who obey the law who will be declared righteous: dikaiōthēsontai).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헬라어 동사 dikaiōthēsontai의 원형은 dikaioō요 그 명사형은 dikaiōma이다. 8:4의‘율법의 의’에서 사용된 dikaiōma와 같은 단어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8:4에서 말하는“율법의 의”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이행칭의)는 말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단계에서는 아직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율법을 행할 수 없다. 그래서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롬 3:28).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다음에는 성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율법을 행할 수 있고,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롬 8:4).

그렇다면 8:4에서 말하는 행함은 어떤 행함을 말하는가? 8:5-13은 육신(sarks)을 따르는 삶이 어떤 것이며(5-8절) 성령(pneuma)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가(9-13절)를 보여준다. 육신을 따르는 삶은 죽음이고, 성령을 따르는 삶은 영생이다(13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므로”(6절),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 된다”(12-13절). 여기서 말하는 육신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갈 5:19-21에서 자세하게 말하고 있고, 그 외 바울서신 여러 곳에서도 이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린도전서 3:3; 6:8-10; 에베소서 5:3-5; 골로새서 3:5-9). 또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 5:22-23에서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고, 고린도전서 13:4-7에서도 성령의 최대은사인 15가지 사랑에 대하여 말한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말하는 육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생각을 따라서 살면 율법의 의를 이룰 수 있다. 이것이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이행칭의의 의(義)이다.

6) 로마서 13:8-10

로마서 13:8-10에서 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하고(갈라디아서 5:14 참고),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는 십계명과 “그 외에 다른 모든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고 말한 다음,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신명기 6:25에서는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로마서 2:13에서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한다. 이 두 말씀은 “사람이 율법을 행하면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씀이다.

이 두 말씀의 의미를 로마서 13:8-10에 적용해 본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8b절의“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plēroō)”에서“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말은 “율법을 다 지켜 행했다”는 말이다. “율법을 지켜 행한 사람은 의롭다함을 얻기 때문에”(신명기 6:25; 로마서 2:13),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지켜 행한 사람이므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또 10b의“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plēroō)”라는 말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은 “사랑은 율법을 지켜 행했다”는 말이요, “율법을 지켜 행한 사람은 의롭다함을 얻으므로”(신명기 6:25; 로마서 2:13) “사랑하는 사람 즉 율법을 지켜 행한 사람”은 “의롭다함을 얻는다” 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롬 13:8-10에서 “사랑을 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은 행함이요 율법을 지켜 완성한 것이므로, 바울은 여기에서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이행칭의의 신학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바울은 8-9절에서 예수님의 두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하나는“서로 사랑하라”는 요한복음13:34; 15:12의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십계명의 둘째 부분과 이웃사랑을 말씀한 마 19:18-19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9:16-19에서 십계명의 둘째 부분과 이웃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바울이 로마서 13:8-9에서 예수님의 이 두 말씀을 인용한 것은, 기독교인이“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과, 십계명의 둘째 부분을 포함한“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과 율법을 지켜서,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아야(이행칭의)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하려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요약해서 말한다면 바울은 로마서 13:8-10에서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행칭의의 진리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

7) 신명기 6:25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25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명령’이란 출애굽 이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모든 명령들을 의미한다. 이 모든 명령을 지키면 그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로움(tsedaqah)이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킴으로(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은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이행칭의)는 의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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