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연재 신학덕담
『 고난 가운데 은폐된 부활의 여명 』

부활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 내용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을 부활공동체로 인식하였습니다. 신학이 발전한 오늘날에도 교회를 부활공동체로 설명하는 것이 옳고 정당합니다. 부활공동체의 속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특징은 부활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은 종말에 완성될 생명의 완성을 지금 앞당겨 사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선취라고 하는데, 미래에 완성될 생명의 완성을 지금에 적용하여 사는 것으로 이를 종말론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이란 영원한 생명, 즉 부활생명으로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생명은 종말에 완성될 창조와 구속을 지향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창조와 구속을 지향하는 부활생명의 특징이 바로 하나님 나라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 전이나 부활 후나 변함없이 창조와 구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모든 영역과 시간 속에 임하여 역사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지만 교회는 하나님 나라 통치를 따릅니다. 세상이 하나님 나라 통치를 거부해도 하나님 나라는 여전히 작동합니다. 심지어는 악한 자가 준동하고 설쳐도 하나님 나라에 이용될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분별하여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고난과 부활과 구원과 하나님 나라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지만 이론이나 논리로 다 설명할 수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종교적 신앙의 개념뿐 아니라 정치, 경제, 학문, 문화, 예술 등 자연과 문화의 모든 영역을 포괄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구상한 하나님 나라의 인류사적 목표는 완성된 인간성, 도덕성, 이성의 목적을 보편적으로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는 신학이 철학과 손을 맞잡고 만들어 놓은 것으로 역사에 대한 진보적 또는 낙관적 이해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그들이 비록 이론적으로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 실현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세계 내의 인간의 가능성에 두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가 “최고선”의 이상을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여 철학과 신학의 공생(共生)을 위한 전제조건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자 양자 간의 돈독한 연대 관계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목표를 시민계급의 직업윤리를 통해 가시적으로 실현하려고 하였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를 철학과 연대하여 이 땅에 이상적 나라와 문화를 만들어가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낙관적인 자유주의적 이상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 스승들과 결별하게 된 결정적 계기도 제1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칼 바르트는 “그 해(1914년) 8월 초순은 적어도 나에게는 암흑의 날이었다.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이 빌헬름 2세의 전쟁선포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지지성명을 발표했는데, 이 지식인들 중에는 이제까지 내가 숭앙해 왔던 신학스승들의 이름들(하르낙, 제베르크, 헤르만 등)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경악케 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이들의 윤리학과 교의학, 성경해석과 역사관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고, 더욱이 19세기의 신학은 더 이상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점을 절감했다.”고 술회하였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하나님 나라 신학은 결국 독일의 이기주의적 영토 확장을 지지하는 왜곡된 세상 나라의 신학으로 귀착되었습니다.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이론적이고 실천적 실패의 징후였고 필연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허구적 자유의 체계와 그 이데올로기의 내적 모순으로 인하여 붕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학적 자유주의는 그들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에서 도덕과 체험과 역사의식을 강조하기 때문에 정치적 진보좌파의 논리에 편승하거나 휩쓸릴 위험이 높습니다.

부활신앙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합니다. 하지만 부활을 아무리 확신하고 강조한다고 하여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실증적으로 보여줄 수도 없습니다. 부활이나 부활생명을 설명할 수 없고 실증할 수 없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하나님 나라 백성의 부활생명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작동되지만 그 역시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믿는 자들이 비록 아직 부활에 이르지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부활을 믿는 것이 부활생명의 현상입니다. 성경과 개혁신학은 부활생명이나 하나님 나라가 가시적이지 않는 것이 소극적으로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은폐하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믿는 자들은 새 생명 즉 부활생명으로 살아가지만 부활은 아직까지 잠정적이고 종말에 완성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부활생명을 통해서 유한한 모든 인간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부활생명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가시적인 어떤 현상보다 부활생명 자체에 관심을 집중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적극적이고 소극적인 많은 일들과 설교와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등이 하나님과는 별로 상관이 없고 그저 교회 생활에만 집중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철학에서는 존재망각이 문제이고 기독교 신앙에서는 하나님 망각이 문제입니다.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현대인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 부활, 생명, 하나님 나라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소극적으로는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폐 때문이라고 하여도 인간은 결코 핑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부활, 생명, 하나님 나라를 인간이 비록 눈으로 볼 수 없어도 믿고 지향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 능력이 바로 부활생명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설명이 논리적으로는 모순을 일으키지만 전능한 하나님과 새로운 피조물의 경건한 삶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현대화 된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어떤 실적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부활생명의 존재에 대한 깨어 있는 인식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부활생명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고 그 나라를 경험하고 감격하며 찬양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경험은 지속적이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의 언제나 고난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고난 가운데 긴 시간을 보내게 되자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시간이 길어지자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이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 때문에 고난 가운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자신의 백성을 훈련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를 다 알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고난의 현실에 처하게 될 때 인간은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일을 하시고 계시는지 알 수 없어 당황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려움이나 고통의 원인을 명확하게 다 알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고난 가운데서 은폐의 방식으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부활생명과 하나님 자신이 왜 은폐의 방식을 취하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성경 계시를 통해 유추해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우리에게 유익이기 때문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규범과 판단에 따라 저울질 하며 하나님의 응답이 없거나 늦어질 때 용기를 잃고 절망하게 되지만 고난의 때를 지나고 뒤돌아보면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서 함께 하신 흔적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국가의 안보와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때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고 계시는지를 우리는 명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종말론적 시대는 머지않아 여명이 밝아오겠지만 아직은 모든 것이 어둠에 가려져 있는 어두운 새벽과 같습니다. 태양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여명은 어둠에 가려져 있습니다. 은폐의 요인은 인간의 한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숨어계시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은폐하심은 교훈과 훈련과 배려이기도 하지만 또한 징계와 심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숨어 계심이 연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라면 불평이 합당하지 않고 범죄에 대한 징계라면 더더욱 불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와 사역을 인간에게 은폐하신 대표적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실현이지만 또 한 편 하나님께서 저주와 죽음의 옷으로 자신과 구원의 사역을 은폐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결정적 계시이지만 인간의 관점에서는 구원과 부활과 생명과 반대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정 반대의 형태를 취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은폐되어 있습니다. 칼빈은 성경이 하나님의 숨어계심을 이야기 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강조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신다면 우리는 욕망과 이 세상의 삶에 오히려 더 매달리고 집착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폐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하나님께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기도하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며, 죄인이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이기도 합니다. 또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시고 훈련하시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눈은 캄캄한 어둠 가운데서도 부활의 여명을 통찰할 수 있게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1-16, 19)

황상하 목사

『 특권의식의 폐단 』

한진그룹의 조양호 회장의 딸들과 아내가 특권의식의 갑질로 물이를 빚어 국민들의 공분을 샀고, 그들의 갑질이 빌미가 되어 한진그룹은 1년간 경찰, 검찰, 관세청, 법무부, 국토교통부,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등 11개 정부 기관으로부터 동시 다발적으로 수사를 받아왔으며 대한항공 등 한진그룹 계열사 압수수색은 총 18회에 걸쳐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조양호 회장을 비롯해 그의 가족들은 14번이나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야했고 결국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로 조회장은 경영권까지 잃게 되자 지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한진그룹 조회장의 죽음은 여러 각도에서 한국 사회의 문제를 드러낸 사건입니다. 특권층의 갑질, 현 정부의 반 대기업 정책, 여론몰이 또는 기획수사,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언론의 왜곡 또는 선정적 보도 등이 한국 사회가 풀어가야 할 가볍지 않은 문제들입니다. 기업은 기업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사법부는 사법부대로, 입법부는 입법부대로, 언론은 언론대로 특권의식을 최대로 드러내고 또한 행사하여 총체적 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정부나 공공 분야의 특권은 소위 갑질을 위한 것이 아니고 봉사를 위해 국민이 위탁한 권리인데 국민은 스스로가 위탁한 그 특권에게 견디기 힘든 온갖 종류의 갑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집단에서도 질서와 효율을 위해 특권이 필요하지만 특권의 오용인 소위 특권의식의 폐단으로 한국사회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는 듯합니다.

고린도는 헬라와 마케도니아 전역에 뻗어 있는 아가이야(Achaia)라는 대단히 넓은 지역을 포괄하는 로마 영지의 수도입니다. 당시 고린도는 정치, 경제, 학문적으로도 대단히 발전한 문화를 가지고 있던 도시였으며, 그 시대에는 사람들이 고린도에 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부심과 특권의식을 가졌었습니다. 특권의식이란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하여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자부심입니다. 그것이 재물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학문일 수도 있고, 특별한 재능이나 가문이나 스펙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그런 것을 더 많이 가지고 누리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진정 필요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더 나은, 더 구별 된 수준을 추구합니다.

부자들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수준의 차를 타거나 같은 가방을 들고 다니거나 같은 동내에 사는 것을 못 견뎌 합니다. 지나친 사치와 낭비는 그와 같은 특권의식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특권의식을 가질 만큼 정치 경제 학문의 수준을 추구하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정죄할 필요는 없지만 어떤 분야의 특권의식이라도 그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추구하는 가치를 변질시킵니다.

무엇보다 특권의식은 하나님 나라 원리에 반한다는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히 경계해야 합니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 가치관에서 특권의식이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태도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직면한 문제 중 하나가 교인들 가운데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인들은 고린도에서 산다는 것만으로도 특권의식을 가질 수 있었는데 그 중에서 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고 학문이 깊고 다른 이들보다 수준 높은 문화의 혜택을 누리는 이들은 교회 안에서도 같은 수준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기들보다 못한 이들을 무시하고 소외시켰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고 특권의식을 갖게 하는 재물과 학문과 권력과 문화 자체를 나쁜 것이라고 폄하하지 않습니다.

고전 1:4-7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여기“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은 일반적인 지식과 통찰력과 지혜를 가리킵니다. 고린도 같은 좋은 도시에 살아서 누리게 되는 이점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특권들 자체도 은혜이지만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사로 활용하게 된 것은 더 큰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것은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장점입니다. 그것을 인하여 바울은 고리도 교회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학문이나 문화가 복음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면 참으로 금상첨화입니다. 그러나 특권의식이란 언제나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가지고 많이 배웠다는 사실이 갖는 매력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 구별에 대한 매력이 없다면 부나 권력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도 상당히 줄어들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도 자기가 누리는 특권을 어떻게든 다른 사람과 자기를 구별하는데 이용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식 뿐 아니라 음식으로도 사람들을 구별하고 차별하였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은사들을 자신과 다른 사람을 구별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고린도 교회 안에 진영과 분파, 심하게 말하면 패거리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그리스도 파가 있었습니다. 은사를 잘 못 활용하면 이단이 되고 사이비가 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바울이나 아볼로나 베드로와 같은 수준에서 구별하였습니다. 사이비란 특별히 성경을 왜곡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람과 동일 수준으로 취급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람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학문과 지혜가 아무리 깊고 탁월해도 그것은 은사일 뿐인데, 사람들은 그 은사를 가지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구별할 뿐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 수준으로 분류하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이러한 경향은 은사가 사람들에게 끼치는 매력과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학문이 깊은 사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평가합니다. 성경이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잘하는 사람은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유리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잘한다는 것이 곧 성경을 잘 안다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잘 하는 사람보다 성경을 더 잘 알고 바르게 믿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영어권에서 살고 활동하는 사람에게 영어를 잘 하는 것은 실력이고 은사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은 성경과 신학 지식도 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특히 이곳 미국 이민 교회에서 한인 2세나 1.5세 목회자들에 대한 오해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를 잘 하는 것과 성경과 신학을 잘 아는 것을 혼동합니다. 1세들 중에는 2세들이나 1.5세들이 영어를 잘 하는 것을 똑똑하고 실력 있는 것으로 인정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성경과 신학 지식이 깊은 2세나 1.5세 목회자를 만나보기가 어렵습니다.  

일반 지식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말의 지혜로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은사로서의 지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로서의 지식이 내용을 대체하여 복음이 아닌 지식을 자랑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말의 지혜로 복음을 다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바울은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는 말로 인간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을 설명하였습니다. 인간의 지식으로 볼 때 전도는 미련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도의 미련한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며 능력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인간은 그 어떤 지식이나 능력으로도 특권의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말의 지혜와 지식도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은사이지만 그것은 복음 자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말이 안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미련한 것입니다. 복음이 미련하게 보는 그들의 판단 기준이 자기들의 지식과 지혜입니다. 그들의 지식과 지혜는 헬라의 철학과 그 철학을 근거로 한 판단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식과 지혜로 판단해서 납득이 되어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고 하면서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니까 그런 복음을 헬라 철학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세상 지식이란 언제나 여기가 한계입니다. 일반적으로 과학을 이해하고 일상의 일을 이해하는 데는 이 지식이 유용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으로 복음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마치 유치원생이 박사 학위 논문을 평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지식의 관점으로 보면 복음은 어리석게 보인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복음 자체만 그럴 뿐 아니라 그 복음을 전하는 방법도 세상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미련한 것입니다. 그래서 멸망하는 자들은 미련하게 보여서 복음을 믿지 않았고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멸망하는 자들은 아니지만 자기들도 모르게 멸망하는 자들의 삶의 방식을 취하여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고 분열을 만들어 내고 있어서 바울은 그것의 위험을 경고하고 일깨우고 있습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황상하  joseph1952@naver.com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황상하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