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앞에서 바르트가 영원한 아버지를 아는 길에는 배타성이 없는 상태를 주장했고, 그것을 위해서 예수가 갖는 배타성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으로 정리했다. 그런데 그것이 우연한 사건에서 발생한다는 것까지 제시했다. 인간의 우연성 안에 신적 필연성이 발생한 구도가 된다. 바르트는 인간의 우연성에서 영원한 아버지 인식이 발생되는 것이 계시 사건으로 보았다. <교회교의학>에서 계시는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이다. 즉 설교에서 계시가 발생하는 가능성(기대와 요구)이 있다. 우리는 바르트가 계시 수준을 설교 하위 개념으로 보았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설교에서 계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르트는 설교 외에도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자유로 인해서 계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러시아 공산주의를 통해서, 플릇 독주회를 통해서, 꽃피는 관목을 통해서 혹은 한 마리 죽은 개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하실 수 있다. 우리는 그가 실제로 그러한 일을 행하신다면, 그에게 듣는 일을 행해야 할 것이다. (중략) 하나님은 이교도 혹은 무신론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으며 또 우리로 하여금 교회와 세속성의 한계가 언제나 거듭 우리가 지금까지의 견해를 전혀 다르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할 것이다”(KD I/1., 55, GG 89, CD, 55).

바르트는 인간의 언어에서 발생한 인식한 아버지를 영원한 아버지로 규정했고, 그 영원의 반복(repetito)을 주장했다. 바르트는 신 이해서 삼중성(triplex, in dreimaliger Widerholung der eine Gott)으로 제시했고, 영원한 반복을 한다는 개념(eine repetito aeternitatis in aeternitate, Anselm)을 §. 9에서 제시했다(KD I/1., 370, GG 454, CD 350). 바르트는 신 이해에서 삼중반복과 영원반복을 함께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 영원은 인간 언어(발화) 행위 안에서 발생한 우연에서 기인된 것이다. 바르트는 신을 원형으로 근원으로 제시하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계시 사건이다. 다만 그것을 아버지의 계획으로 확정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한 계시 수준을 밝히 알려준 것이 아들이다. 그래서 바르트에게 아들은 구속자가 아니라, 아버지와 세계를 화해시키는 화해자이다. 구속자는 신의 영이다. 참고로 바르트는 der Geist Gottes 어휘가 아닌 der Heilige Geist를 사용했다.

바르트는 자기 신 이해(한 본질의 신, das Wesen Gottes ein einges und ungeteiltes)를 전통적인 삼위일체(trinitas)의 불가분해한 삼위일체(individua trinitas)로 일치시켰다(KD I/1., 415, GG 508, CD 394). 바르트는 아버지의 영원한 반복에서 창조자, 화해자, 구속자가 반복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자기 신 이해를 신의 유일성(die Erkenntnis der Einheit Gottes)을 강조한다. 그리고 내적삼위일체 특수성(der innertrinitarischen Besonderheit des Vaternamensgarantiert)을 제시하여 전통적 삼위일체 개념을 좀 더 명료하게 제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르트는 위격이 없는 한 신(unis et individuus)을 제시하고 있다(KD I/1., 416, GG 508, CD 395). 바르트는 교회가 가장 먼저 인식해야 할 영원 반복이기 때문에 명료하게 제시하지 않았다. 아들과 영, 아들 구세주와 영 보혜사를 제시했다. 목표를 아버지로 삼은 것이다. 바르트는 우연에서 시작해서 아버지에서 귀결시키지만, 성경은 알파와 오메가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계시한다. 바르트는 삼위일체적 교의라고 약화시키면서 영원한 아버지 유일한 신(神) 체계를 확립했다(Diese Erkenntnis sichert das trinitarische Dogma von dem ewigen Vater, dem Vater seines eingeborenen Sohnes).

바르트는 정통 신학을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제시한다. 바르트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영(der heiligen Geist)이 형성시키는 것으로 제시했다. 정통 신학에서(Pater a nullo agit) 아버지는 비유래적인(uneigentlich) 성격을 제시한다. 바르트는 아버지에게 비본래성을 제시하기 때문에 자기 신학에 배타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전유(專有, Appropriation, 차용(借用), 도용(盜用), 영유(領有) 등으로 번역할 수 있음)”을 아버지에게 부여하면서 인식될 수 있는 상대성을 제시하며, 전유로 인해서 파악한 지식의 부당성을 주장했다. 바르트는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 수준에서 파악한 신 이해로 결정한 것이다.

바르트가 제시한 신의 통일성과 상이성을 견지해야 한다(§. 9 삼중일신의 의미). 바르트는 삼위일체 교리(trinitärisdogma)로 다시 축약하면서, 삼일성(Dreieingkeit)으로 규범화시켰다. 그리고 존재양식(Seinsweise)과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를 연결시켰다. 바르트는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존재양식의 상호작용, 상호침투로 제시했다. 우리는 페리코레시스 개념이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675-749)에게서 시작되었지만, 정통신학의 가치로 삼지 않는다(참고, 유해무, 『개혁교의학』, 164).

바르트는 삼일성 개념에서 갖는 인간의 전유성에 대해서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것은 신이 이해하도록 허용했다는 것이다. 즉 신이 자기를 이해할 수 있는 전유를 허락한 것이 바르트 신학의 특징이다. 정통 신학에서 계시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전유가 아닌 자녀에게 합당한 분깃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이해가 양태론에서 가질 수 있는 성부수난설이 불가능한 구조가 되었다고 주장했다(KD I/1., 418, GG 511, CD 397). 그리고 외부로부터 들어온 삼위일체 지식(opera trinitastis ad extra sunt indivisa)은 부당한 전유이고, 아들과 영에 의한 유일한 아버지에 관한 특수한 인식(besondere Erkenntnis)에 대한 전유를 인정한 것이다. 바르트는 그러한 전유의 특수성(Besonderheit)을 인정했다.

바르트의 신학에 배타성과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보수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우리는 이단을 비판하기 때문에 정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바른 신학은 바른 신학 내용을 진술해야 한다. 상대적 진리가 아닌 자기 자체에 진리를 담지하고 있어야 한다. 바르트가 가진 배타성과 특수성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바르트가 가진 배타성은 아들과 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아버지의 영원성이고, 특수성은 아들과 영으로 가진 유일한 아버지에 관한 인식이다. 정통신학에서 가진 배타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라는 것이고(행 4:12, 요 14:6), 특수성은 그리스도 피로 죄사함과 영생을 믿는 것이다(행 2:36-40, 마 16:16, 벧후 1:1, 3:18). 주 예수의 은혜와 지식이 만민에게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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