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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칼럼】예수님을 아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3) 투사(投射)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투영된 영광의 향유 vs 반사된 실패의 차단

유명 가수나 영향력 있는 정치인과 함께 사진을 찍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다. 혹은 친구들에게 “그 사람 잘 알아”라고 자랑한다. 일상적이다. 알고 보면 전략적인 행위다. 유명인과 자신을 ‘연결’한다. 그 연결 지점을 적극적으로 ‘공개’해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외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이미지를 통해 나의 사회적 이미지를 향상시키려는 행위다. 이를 ‘투영된 영광의 향유(Basking in Reflected Glory)’라고 부른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사진을 찍을 관계를 뛰어 넘는다. 3년 동안 함께 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공회석상에서 심문과 고문을 당하는 사이에 베드로는 그 사실을 부정한다. 재판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재판이 끝나기 기다리는 여러 사람들에게 노출이 용이했다. 대제사장의 여종이 베드로를 용케 찾아냈다. 오늘날 같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진을 보여주었다면 합성이라고 우겼을 것이다. 모함이라고 노발대발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적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쓴다. 투영된 영광의 향유이다. 다른 하나가 ‘반사된 실패의 차단(Cutting off Reflected Failure)’이다. 베드로는 후자다. 재판의 대상이며, 갈릴리 혹은 나사렛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는 예수님과 자신과 분리시킨다. 이는 자신이 응원하던 팀이 성적이 부진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유니폼을 중고로 처분하는 게 이런 심리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 사람’이라고 하며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다. 반사된 실패의 차단막을 철저하게 치고 있다.

베드로의 대답을 들어보라. 동문서답과 같이 들린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노라’. 화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 어이없는 말,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다는 회피성 발언이다. 베드로는 충동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을 한다. 베드로의 대답은 예수님이 예언하셨던 바로 부인의 첫 번째가 되고 말았다(마 26:34). 그가 여종이 하는 말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둘러댐으로써 이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다.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도 개인에 따라 스트레스 강도와 해결법이 다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스트레스도 덜 받고, 불편한 감정도 혼자 가만히 경험하고 소화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아 강도, 불안 내성, 성찰 능력 등이 필요하다. 베드로는 ‘투사’라는 방어기제를 쏘아 올렸다. 여종이고 한 명이라는 만만한 대상을 향해 불편한 감정을 위험한 형태로 쏟아내는 방식이다. 정당하게 분노를 표현해도 된다고 생각되는 대상을 공격하고 비난하는 행위도 투사작용이다. 베드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실패하게 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적중하고 있다. 베드로는 칼을 소지하고 사용해 싸울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일개 여종의 비난 앞에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베드로는 스승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공회에서 모진 심문을 당하는 와중에도 이른 아침부터 용기 있게 공회 바깥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한 여종이 개인적으로 물었는데 화들짝 놀란 사람처럼 모든 사람 앞에서 크게 대답한다. 첫 번째 질문은 대답하기 곤란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판에 와장창 무너진다. 공개적 노출에 멘붕 상태가 된다. 자신의 신변이 위협받았다고 생각하고 맥이 풀린다. 대단한 선수도 불안 증세로 이해하기 힘든 실수를 잇달아 한다. 이를 입스(yips)라 한다. 공포로 머릿속이 하얘지고 근육이 경직돼 제 몸을 제가 조절하지 못한다. Yip은 ‘날카롭게 짖는 소리’를 뜻하니 곧 ‘악 소리 나는 상태’다. 베드로가 그렇게 악할 정도가 아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 앞에 소리를 지른다.

‘연습은 실전같이, 실전은 연습같이.’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세계 톱클래스 선수들과 팀들의 퍼포먼스는 종이 한 장 차이다. 그 차이가 바로 실력인데, 심리적 압박감을 이겨내느냐 여부가 관건이다. 각종 징크스도 핵심은 멘털(mantel)이다. 베드로는 연습은 강했다. 모든 사람이 다 실족하더라고 자신은 실족하지 않을 것을 장담했다. 실전에서는 1라운드에서 멘털이 붕괴된다. 베드로는 갈등 관리에 방어기제라고 하는 ‘미사일’ 시스템을 사용한다. 유치한 것도, 성숙한 것도 있다. 유치한 것 중 하나는 눈을 감는 것이다. ‘부정’이다. “그럴 리가 없다”고 덮는 것이다. 베드로가 화자의 말을 무시하는 것은 곧 갈릴리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는데 그럴 리가 없다는 부정이다.

마태가 굳이 ‘모든 사람 앞에서’를 첨가하였을까. 마가, 누가, 요한은 노코멘트다(막 14:68; 눅 22:57; 요 22:17). 마태만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였다는 말을 덧붙인다. 한 여종이 말을 건넸다. 모든 사람 앞에서 주절거렸다. 과잉반응이다. 마태는 베드로의 처절한 실패를 나타내고 있다. 청자로서 화자의 말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부인함으로써 그것을 회피한다. 분명히 그는 예수님에 대한 충성을 선언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 베드로가 여종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답한 것은 방어기제 가운데 투사이다. 자기의 느낌을 타인에게 돌리는 자기중심적인 방어기제이다. 베드로는 여종의 실제 감정에 대한 배려 없이 일방적으로 이러이러한 느낌일 것이라 속단하고 확정해 버린다. 그리고 제 멋대로 해석하고는 낙인을 찍는다. 실제로는 오히려 베드로 자신의 문제가 크다.

 

베드로의 부인(否認)의 심리 속 추락한 예수님

우리 문화에서 남성 투사의 역사를 찾아 볼 수 있다. 여자와 북어를 사흘에 한 번씩 두드렸던 이유가 무엇일까. 남자들이 내면의 스트레스를 주기적으로 해소할 출구를 찾은 까닭이다. 김유신은 기생집으로 향하는 말의 목을 벤다. 자신의 죄의식과 우유부단함을 말에게 전가한 행위였다. 베드로는 I-Message를 사용하면서 책임은 상대에게 전가시키고 있다. 내면을 향한 칼끝을 바깥으로 향하고 있다. 어떤 사회 이슈든 양극단에 치우친 이들의 이해하기 힘든 공격성과 적개심에는 이 같은 '투사(Projektion)'의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자신을 잘 돌본다’는 건 ‘자신을 향해 마음을 쓴다’는 뜻이었다. 또한 각자가 진리·지혜·아름다움·극기 등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주체가 돼야 한다는 뜻이었다. 무지하고 교양 없는 이나 자신을 속이는 이는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결코 도움이 못 된다는 교훈도 담고 있다. 베드로는 자신의 몸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다. 자신이 아닌 예수님을 향해 죽기를 각오하였다. 함께 옥에도 가고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다고 하였지만 말뿐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왜 그런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대답을 했을까. 베드로는 예수님이 붙잡히기 전에 누구보다 주님과 함께 있고자 한 사람이다. 감옥이 자신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고 죽임이 갈라놓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장본인이다. 그런 그가 여종의 말의 압력에 무너진다. 이 일이 있은 후 마태는 그의 이름을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다. 마가와 대조적이다(막 16:7).

역사상 가장 유명한 분노조절장애자는 헐크와 브루스 배너 그리고 지킬 박사와 하이드다. 차이점이 있다. 자기 인식의 연속성이다. 전자는 자신이 헐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자신의 폭력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후자는 자신을 부정한다. 그는 하이드가 휘두른 폭력을 자신이 한 짓이라고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베드로는 어디에 속할까.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실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다.

마태는 베드로의 부인 기사를 가야바와 유대 당국자들 앞에서 예수님이 심문 받는 기사와 빌라도 앞에 서신 기사 상에 위치하므로 극적인 효과를 거두게 한다. 베드로는 바깥 안뜰까지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있을 정도로 베짱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 여종의 말을 예수님과 한패라고 비난으로 듣게 되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용기를 잃고 화자에게 반사한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겠다고 강하게 부정하였다.

여기서 여종의 말을 비난의 말이 아닌 바람으로 들으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사람이 제자라면 지금 나사렛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되지 않는가. 그의 스승이 어려움을 당할 때 곁에 있어야 하지 않는가. 제자라면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하지 않는가. 죽기까지 따르기로 한 사람이 멀찍이 있다는 말이 되는가.

조선 말기의 학자인 전우의 ‘간재집(艮齋集)’에 있는 글이다. “한 자리라도 제대로 된 자리에 머문다면 온 사방의 표준이 될 것이며, 백년이라도 제대로 된 자리에 머문다면 만세의 표준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고난의 자리에 서 있다. 십자가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베드로는 있어야 할 자리에서 멀리 있을 뿐만 아니라 불신앙적인 말과 비겁한 행동을 하고 있다.

‘갈릴리 예수’ 또는 ‘나사렛 예수’는 양가적 특징이 있다.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사용한다. 메시야적 구원자다. 신앙의 표현이다. 대적자들도 사용한다. 메시야적 신분을 부정한다. 경멸의 칭호다(2:23). 베드로는 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까. 자신이 따르던 예수님이 체포되어 털 깎는 자 앞에 양같이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다. 한낱 여종에게 조차 갈릴리 예수, 나사렛 예수라고 경멸당하는 판국이다. 자신이 그 예수님을 옹호하거나 자신이 신분을 밝힐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라고 멸시의 감정을 섞은 말을 하였다. ‘모두가 인기를 원한다’의 저자인 미치 프린스턴(Mitch Prinstein)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학창 시절의 인기는 ‘호감’보다 ‘지위’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그는 지위를 ‘눈에 띄는 정도, 권한, 영향력’이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지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사람’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여긴다. 나는 모른다고 하므로 호감이 아니라 비호감으로 바뀐 것이다.

 

 

이승희 목사  titeiosle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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