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의 누룩 되어 (3)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교회의 자화상, 금권(金權)-교권(敎權)-부패(腐敗)

한국에는 6만을 약간 상회하는 숫자의 교회가 있지만 약 절반 정도는 1년 예산 수 천만 원이 고작이다. 대형교회라 일컬어지는 교회는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대형교회를 이룩하지 못한 목회적 열등감으로 자조하고 있다. 성장을 이룰 수 없는 여러 한계의 벽에 부딪혀 고민하고 있다. 정치 맛에 빠진 일부 지도자들의 정치놀음은 정치가들을 무색케 할 정도다. 장로들은 교회에서 힘을 과시하기 위해 길들인 망아지처럼 유순하고 원만한 목사 고르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안정적인 목사직에 안주하기 위해 월급 사장 정도로 전락한 목사들은 이와 같은 시세에 편승하여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의 종들이 교권이라는 고깃덩어리를 앞에 두고 으르렁대고 있다. 총회장이 되려고 교회 빚을 얻어가며 돈을 뿌리고 보다 나은 목회지에 가기 위해 최소한의 자존심도 팽개친 채 아부하는 것이 당연시 되어 있다. 정말이지 망할 징조가 아닐 수 없다. 자칭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나라를 다스려도 거짓투성이고, 장로 대통령이 나라를 다스려도 부패덩어리고 국회의원들이 장로, 집사들인데도 나쁜 짓은 골라가면서 한다. 크리스천 기업가가 사업을 하는데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움켜쥔 돈으로 질펀하게 살아간다. 정치는 모리배들로 가득하고 회사는 망해도 기업주는 살찌는 곳이 한국이다.

한국교회를 향한 주님의 당겨진 활시위

지금의 한국교회와 사회는 멸망당하기 직전의 이스라엘이나 유다와 다를 바 없다. 예언자들의 목소리는 자꾸만 꺼져가고 소수의 의인들은 자신들의 영혼 지키기에만 급급하다. 맘모스처럼 커져만 간 외형과는 달리 내부를 지탱해줄만한 영적 힘이 없어서 붕괴 직전에 있다. 한국 초대형 교회의 여러 목회자들이 보여준 갖은 추태와 오만과 위선은 역겨울 뿐이다. 모두들 눈치를 보면서 적당히, 편안히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이 갈고 있는 심판의 칼이 부싯돌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미 심판의 활시위가 당겨졌음을 깨달아야 한다. 은퇴를 해도 목사는 목사인데 평상인보다 더 평상적인 삶을 즐긴다. 일상적이었던 성경연구, 기도생활, 영성 관리 등이 느슨하다 못해 한가하다. 여행도 하고 여가도 즐기고 여생을 편히 보냄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적당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한국교회는 회개해야 한다. 지도자들은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 무엇을 회개해야 한단 말인가? 하나님을 욕보인 죄를 회개해야 한다. 넘치도록 주신 축복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남용한 죄를 회개해야 한다. 다양한 은사를 주셨건만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명성을 위해, 교회의 유익이 아니라 개인의 이득을 위해,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이력을 빛내기 위해 오용한 죄를 회개해야 한다. 형제를 형제가 아닌 타인으로 여기고 동료를 우정을 바탕으로 협력한 상대가 아니라 경쟁해서 넘어서야 할 라이벌 내지 원수로 간주하여 적대시한 우리들의 관계와 생활 방식을 모조리 회개해야 한다.

저축이 아닌 축적을 한 한국교회

요셉은 7년 흉년을 대비하여 7년 풍년이 들었을 때 양곡 정책을 잘 펴서 애굽을 비롯한 중근동 지역의 백성들을 살렸다. 그때 그는 대부분의 곡식을 저축했다.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재정적으로 누려왔던 풍년의 시기에 저축하는 지혜를 보여주지 못했음은 부끄러운 일이다. 일부 교회가 모으긴 했지만 그것은 ‘저축’이 아니라 ‘축적’의 형태였다. 나누지 못하고 필요한 이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며 ‘언젠가’를 노래 부르며 쌓기만 하는 것은 결코 저축이 아니라 탐욕의 다른 얼굴인 축적이다. 그래서 부요를 노래하면서도 가난하다. 바로 곁의 형제자매와 동료가 배곯아 운다.

이미 하나님 심판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 유사 이래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다. 그것은 정치적인 무력감과 경제적인 경보음으로 감지될 뿐 아니라 교회의 진면목으로 드러나는 위기다. 한국 민족의 위기는 교회의 위기다. 교회의 위기는 교회지도자들의 위기다. 목사 장로들의 위기다. 재를 덮어쓰고 머리를 풀어헤치는 대신 마음을 쥐어뜯으며 회개해야 한다. 민족의 죄를 양 어깨에 짊어지고 역사의 무거운 짐을 가슴에 끌어안고 통곡해야 한다. 목사답지 못한 삶을 회개해야 한다. 장로답지 못한 삶을 회개해야 한다. 신자답지 못한 삶을 회개해야 한다. 회개의 울부짖음이 삼천리강산을 진동시켜야 한다.

세상엔 부화뇌동(附和雷同), 은혜엔 요지부동(搖之不動)

위성기독교방송 채널을 틀었다. 진솔하고 복음적인 메시지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시대를 깨우는 메시지를 듣지 못했다. 말씀에 코미디를 너무 뒤섞어 메시지라 부르기 어려운 말씀을 반기는 청중들에 놀랐고 축복과 번영을 위한 말씀 무게에 눌려 가슴 치며 회개할 메시지를 찾기 힘들어 다시 놀랐다. 잘못된 말씀을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은 최대한 물량 공세까지 취하여 새로운 것을 듣고 싶어 하는 신자들의 영혼을 공개적으로, 대대적으로, 반복적으로 유린하고 있는데 교회 강단에서는 한가한 시정잡담이나 축복 아니면 저주라는 식의 흑백 설교가 영혼을 병들게 하고 있었다. 페북에 쏟는 시간만큼 기도에 몰입하거나 핸드폰을 두드리는 시간만큼 말씀에 집중한다면 우리의 메시지는 당장 달라질 것이다. 기도와 말씀 이외의 모든 것은 화려해 보이고 긴급해보여도 모두 2차적이고 주변적인 것이다. 필히 본무로 돌이켜야 한다.

새벽기도도 하고 철야기도도 하고 각종 모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되어도 신자들의 삶은 꽁꽁 얼어붙은 강바닥처럼 요지부동이다. 힘을 잃어버린 강단 대신 뭔가 화끈하게 신자들의 열정을 회복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간증 집회가 봇물 터지듯 했고 인기연예인들을 초청해서 공연 같은 집회를 성황리에 열어보기도 했지만 이내 시들해지고 말았다. 대형교회들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에 먹구름이 끼고 일부 스타급 지도자들의 신세는 추풍낙엽 신세가 되었다. 법정 싸움은 끊이지 않고 무주공산과도 같은 영적 현실에서 이단만이 살판 난 듯 기승을 부린다. 첫 사랑의 감격도 잃어버리고 처음 믿음을 저버린 상태에서 마지못해 교회를 들락거리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신자들의 영혼은 아사 직전에 있다. 한국교회의 진면목은 라오디게아 신드롬에 다름 아니다.

능력 없는 누룩은 썩은 누룩

솔직히 우리 자신을 살펴보자! 우리는 기도하지 않았다. 기도의 필요성을 누누이 듣고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실제적으로 시간을 내어 주님 앞에 무릎을 꿇지 못했다. 환도뼈는 커녕 무릎에 작은 굳은살마저 돋우지 못했다. 기도하자고 그토록 목소리를 드높였는데 정작 꿇은 것은 볼 품 없는 두 무릎이었지 꿇어야 할 우리의 거짓과 욕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의 꼿꼿한 자아가 버티고 섬으로 거룩하신 주님이 꿇은 격이 되었다. 말씀을 들어 지식은 늘었는데 삶의 지혜로 뒤바꾸지 못했다. 실천에 옮기지 못한 말씀들의 무게에 눌려 질식을 당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기에 능한 우리였고 그 말씀을 빙자하여 세상을 정죄하고 우리 자신을 겹 싸기에 바빴다. 자녀로서의 외관은 있는데 능력을 잃어버렸다. 크리스천이란 이름은 있는데 성도다운 삶이 뒤따르지를 못했다. 열린 말씀에 닫힌 영혼으로 인해 우리는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 우리 자신의 변화가 없기에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누룩이 가루를 변화시키지 못하면 가루가 누룩을 변질시킨다. 누룩이 영적 능력과 생명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변질된다.

변질된 누룩은 세상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계시켰다. 실행이 없는 입술만의 가르침은 나쁜 누룩이다.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거부하는 세속의 누룩이다. 변질된 누룩은 우리의 영혼에 곰팡이가 피게 한다. 누룩은 묵은 누룩도 나쁘지만 새 누룩도 나쁘다. 우리 자신이 변화되지 않은 채 변질된 영혼의 소유자로서 살아가게 된다면 썩은 전통과 교훈의 나쁜 영향력만이 다른 사람들에게 번져간다. 나만은, 우리 교회만은 누룩 없는 순전하고 진실한 영혼과 교회라 생각하는가! 진정 그러기를 바란다. 묵은 누룩을 내버려야 우리의 공동체가 새 덩어리로 보존된다. 다행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누룩 없는 자가 되었다. 여전히 나쁜 전통과 교훈에 얽매어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누룩 없는 자’가 되지 못했다는 증거다.

손바닥만한 구름과 키 작은 거인의 역사

엘리야의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 한 조각이 3년 6개월 동안 메말랐던 이스라엘의 땅을 적시게 했다. 큰 비를 부르는 것은 다름 아닌 엘리야의 작은 구름 한 조각이다. 바알과 아세라의 구름이 온 세상을 뒤덮어도 은혜의 빗줄기는 쏟아지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불같은 신앙,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철저한 확신만이 마지막 때의 기갈을 면케 할 큰 비를 부를 수 있다. 외형적인 세력이 힘은 아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진정한 능력은 하나님을 한없이 신뢰하고 그 말씀을 끝없이 추구하는 응집된 영혼의 힘에 있다.

우리는 골리앗을 쓰러뜨린 작은 거인이었던 다윗처럼 이 시대의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영적 작은 거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고자 할 때 마음껏 쓸 수 있는 물맷돌이 되어야 한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참 경건으로 영혼을 단장하고 예수 사랑에 미쳐버리다시피 한 참 예수쟁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칼에 피를 묻혔던 비느하스가 되어야 하고 그날을 위해 검을 준비했던 주님의 열심당원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밖에 믿을 것 없고 성령밖에 받을 것 없고 예수밖에 사랑할 것 없고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 없고 복음밖에 전할 것 없고 사랑밖에 행할 것 없고 은혜밖에 받을 것 없고 죄밖에 거절 할 것 없고 마귀밖에 미워할 것 없는 감추어진 누룩이 되어야 한다.

거룩한 누룩으로 가득한 성도로 채워야

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의 아내였던 한 여인은 집안에 있는 기름 한 병뿐이었지만 하나님의 종 엘리사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빌려온 모든 빈 병을 기름으로 채워 빚도 갚고 식구들이 생활하는 밑거름이 되게 했다. 이 여인은 빈 병을 채우는 거룩한 누룩이었다. 우리가 받은 축복, 우리가 누리고 있는 각가지 은혜는 정말이지 크고 크다.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외형적으로는 한없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거룩한 누룩으로 변화되고 영적인 능력으로 채움 받지 못한 우리의 삶은 커진 만큼 비어 있다. 그릇을 키우는 것은 많이 채우기 위함인데 채우지 않으면 많이 비게 되고 빈 만큼 우리는 주님 앞에 유구무언이다. 우리는 자신의 그릇 크기를 키우기 위해, 교회당을 키우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가? 학위와 직함들로 자신을 키웠으면 거기 알맞은 내용을 담아야 한다. 교회당 크기만큼 교인으로 채우고 교인의 숫자만큼 그들 영혼에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어야 한다.

우리가 진정 변화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 자신을 채우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의 비어 있음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이웃에게 빈 그릇을 빌릴 수 있을 만큼 빌리듯 우리의 비어 있는 상태를 하나님 앞에 속속들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고 그 하나님을 철저히 믿어야 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끝없는 순종과 철저한 믿음만이 우리를 누룩이 되게 한다. 채울 것으로 채워졌을 때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군사가 되어 이 세상을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시켜 이 땅에 하늘나라가 임하도록 역사할 수 있다.

누룩 같은 자들이 세워 온 하나님 나라

천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 세상은 암흑에 휩싸였지만 누룩이 되지 못한 기독교에 철퇴를 가해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한 것은 바로 마틴 루터라는 한 줌의 누룩 때문이었다. 18세기 썩어버린 영국사회를 돌이켜 신사의 나라로 탈바꿈시킨 것도 누룩 없는 시대에 요한 웨슬리가 한 줌의 누룩이 됨으로 가능한 역사였다. 하나님은 언제나 누룩이 되고자 하는 한 개인이나 소수자를 통해 자신의 크나큰 뜻을 이루셨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세속의 유혹을 거절하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경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누룩이 됨으로 이방민족들까지 감화시켰다. 세상을 변화시킨 것은 그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구체적인 삶이었다. 하나님을 섬김으로 거룩하고 정결하게 살아가던 그들 삶의 모습이 방종과 타락에 길들여있던 이방인들에게 큰 감동으로 역사했다. 대제국 로마를 무너뜨린 것도 바울을 비롯한 그 시대의 누룩이었던 12사도들로 인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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