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4) 침묵(沈默)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동아시아의 대표적 고전인 ‘논어’ ‘술이’에는 ‘교언영색(巧言令色), 선의인(鮮矣仁)’, 즉 ‘꾸며내는 말솜씨가 좋고 가장된 얼굴 표정을 잘 짓는 사람치고 어진 사람 드물다’라는 대목이 있다. 우리 속담에 ‘빈 수레가 요란하다’거나,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것 역시 이러한 문화배경 속에 존재한다. 즉 동아시아에는 ‘가만히 있으면 2등은 한다’와 같은 침묵의 정서가 존재하는 것이다. 갑골문을 보면 ‘침묵(沈默)’의 ‘가라앉을 침(沈)’ 자의 원형은 강물 속에 소를 빠뜨려 수신(水神)에게 제사 지내는 모양이다. 금문에 와서는 소 대신에 사람을 넣어 지금의 모양이 되었다. 나중에 ‘담그다, 절이다’ 등의 의미가 더해진다. ‘고요할 묵(默)’ 자는 ‘얼굴이 검은 불목하니의 뒤를 개가 조용히 뒤따르다’라고 풀이한다.

James Humes는 다섯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을 쓴 사람이다. ‘링컨처럼 서서 처칠처럼 말하라’에서 “침묵이 말보다 소리가 크다”고 했다. 링컨도 쉰 목소리와 켄터키 산골 사투리를 고민했다. 처칠은 혀 짧은 소리에 말을 더듬었다. 두 사람이 결점을 극복하고 명연설가로 올라선 비결도 핵심을 찌르는 간결한 연설이었다.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이 침묵하신 것은 성경을 이루고자 함이다. 이사야의 예언에 자신을 깊이 담그고 있고 그 말씀을 조용하게 묵상하는 모습이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침묵하신다. ‘침묵하는 자는 동의하는 것으로 본다(Qui tacet, consentire videtur)’라는 법언이 있다. 말하지 않으면 시인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세상만사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예수님에게 고발할 때 묵비권을 행사한다고 이를 곧 죄를 인정한다고 볼 수 없다. 침묵이 곧 동의인지는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다르다.

 

1. 주권적인 침묵

예수님은 대제사장뿐만 아니라 고넬료 앞에서 왜곡된 이 고발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예수님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발한 어떤 말도 더 왜곡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침묵하신다. 하지만 그것은 ‘주권적인 침묵’이다. 침묵의 반대인 수다는 무엇인가. 미국 언론학자 피터 펜베스에 따르면 “어떤 가치 있는 것도, 중요한 것도, 흥미로운 것도 포함되지 않는 이야기”다. 예수님의 침묵은 ‘Hesychsam’(헤시카즘)이라 불리는 그리스정교회 수사들과 다르다. 후기 비잔틴 시대, 수사들은 일평생을 명상과 침묵으로 보내기로 유명했다. 오스만 터키인들에게 밀려 제국은 몰락하고, 나라는 빈곤과 분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데, 자신의 내면적 세상에만 집착하던 헤시카즘파 신도들을 비난하며 만들어진 단어가 바로 ‘omphaloskepsis’(옴플러스캡시스) 그러니까 ‘배꼽 바라보기’였다. 예수님의 침묵은 내면적 집착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함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종교적인 죄는 로마법 하에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벌을 부과하기에 충분하지 않았기에,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건넬 때 죄목을 바꾼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지만 침묵하신다. 예수님은 왜 빌라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는가. 예수님은 침묵은 성경에 예언되어 있다(사 53:7). 대답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해 대속제물로 내어 줄 때가 왔기 때문이다(막 10:45). 형법상 피의자의 권리인 묵비권은 유력한 방어수단이긴 하지만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범죄를 입증할 무수한 증거를 들이대는데 묵비한다고 죄가 씻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묵비는 주로 민사사건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묵비권은 방어수단이 아니다. 왜곡된 고발에 대한 자기변호를 내려놓는 것이다. 제갈공명은 아들에게 이런 훈계를 남겼다. “군자의 행실은 고요함으로 몸을 닦고...고요함이 아니면 먼데까지 이르지 못한다.(夫君子之行,靜以修身...非寧靜無以致遠.)” 자신을 끊임없이 비우고 헹궈내는 담박(淡泊)과 내면으로 침잠(沈潛)하는 영정의 시간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고요하신 것은 무슨 이유인가. 자기의 심리를 연장하거나 구차하게 목숨을 구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침묵은 자기 확신과 평화의 최종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어떤 범죄자도 모방할 수 없는 것이다.

<Ecce homo> ,Antonio Ciseri(1821&#8211;1891), 1871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아무 대답이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고 재촉할 때도 침묵하셨다(26:63). 이에 해당하는 ‘시오파오’는 미완료 동사이다. 그냥 잠잠히 있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지키시는 의지의 표현이다. 예수님의 침묵은 이사야 53:7을 성취하며 자신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정확히 자신을 고발한 자들에게 지운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반면, 예수님은 완전히 자기 통제 속에 있다는 것이 빌라도로 하여큼 큰 충격에 빠지게 하였다. 자신이 지상에 오신 목적을 완성하는 이 사명을 막아설 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의미,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 말 없는 침묵에 역설적으로 내포된 수많은 말. 표현되는 말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내면에 남아 있다. 말이 없는 그곳에 가장 많은 말이 남아 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침묵을 이해하기 위한 인내심은 희박해진다. 촉박한 시간 속에 침묵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말의 부재를 불안해한다. 잠시의 쉼표가 어색해 불필요한 언어로 메꾼다. 침묵 뒤에 이어질 진지함이 부담스러워 가벼운 말로 감추려 한다.

로마법에 의하면 고소 내용을 일단 들은 후에 피고인의 변호와 증인들의 증언을 듣는 것이 정식적인 절차였다. 피고인 예수님에게는 국정변호사도 없었고 어떤 증인도 없었다. 거짓 증인들뿐이었다. 빌라도는 불공평한 재판을 하고서도 자신의 고문관들과 물러가서 심의를 하기는커녕 다수의 성난 민중의 요구대로 평결을 확정하고 곧 이어 그 판결대로 집행하는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판을 하게 된다. 역사의 주인은 항상 창조적 소수였다. 그렇기에 다수의 민중에게는 역사적 주인이 되도록 계속적인 계몽과 교육이 필요할 뿐이다. 빌라도가 역사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우둔한 다수의 민중의 요구대로 평결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2. 왕의 침묵

침묵의 주제는 예수님의 재판 동안에 자주 나타난다. 이는 이사야 53:7을 성취시킨다. 참소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의 책임을 두게 한다. 마태는 예수님이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에 해당하는 ‘우데 헨 레마’를 첨가하여 침묵을 좀 더 강하게 드러낸다. 그 후부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릴 때까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냐’, 즉 유대인들의 메시야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자신의 고소에 대해서는 침묵하신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첫 번째 질문에는 대답을 한다. 하나 날조된 고발에 어떤 말도 하지 않으신다. 빌라도는 난감했다. 화들짝 놀랐다. 그는 예수님이 살얼음을 걷는 상황에서도 주권적인 침묵(the sovereign silence)을 유지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이 재판이 조작된 것임을 아시고서 어떤 반응으로도 대응하지 않으신다.

마태는 예수님의 왕권에 대한 엄청난 강조를 하고 있다. 그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다윗의 왕가를 잇는 그리스도이시다. 대제사장뿐만 아니라 빌라도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신다. 완전한 불법과 완전한 침묵이 만났다. 예수님은 재판 과정을 통제하고 계신다. 재판을 받는 자리에서 왕의 권위를 가지고 계시며 침묵 가운데 위엄을 유지하고 계신다. 심지어 산헤드린이 거짓 증인을 세워 자신을 비난할 때와 똑같이 빌라도로부터 경고의 말을 들었을 때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26:63). 예수님께서 침묵을 하심으로써,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 거짓 고소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대답할 의사가 결코 없다는 뜻을 보이셨다.

심리학자 Albert Mehrabian 교수는 인간이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할 때 말의 의미보다 목소리, 음색, 얼굴 표정과 같은 비언어적인 요소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금처럼 문자 위주의 소통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1971년에 등장한 이론이었다. 문자정보가 의사소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에 불과하다. 반면 음색과 목소리에 해당하는 청각정보는 38%를 차지하며 눈빛, 몸짓, 표정에 속하는 시각정보의 비중은 무려 55%에 달한다. 문자정보의 8배에 달하는 소통이 시각정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셈이다. 마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고발을 언급하면서 마가의 ‘여러 가지로’에 해당하는 ‘폴라’를 생략한다. 그 대신 ‘아무 대답도 아니하다’에 해당하는 ‘우덴 아페크리나토’를 첨가한다. 이는 예수님의 침묵을 강조한다. “살아 있는 침묵을 갖지 못한 도시는 몰락을 통해서 침묵을 찾는다.” Max Picard가 쓴 ‘침묵의 세계’에 나오는 구절이다. 악기의 고운 소리는 텅 빈 속에서 나온다. 집에는 햇살이 스며들 빈자리와 창문이 필요하다. 찻잔도 비어 있는 여백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대답을 거부하심은 독자들에게 이사야 53장의 종의 노래를 떠 올렸을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종이 곤욕을 당하고 괴로울 때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마치 그 모습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입을 열지 않았다고 묘사한다.

예수님은 어려운 일을 당했다. 목숨을 부지하고자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신다. 만일 예수님께서 심문 중에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면 아마 빌라도는 피고의 반응에 따라 내리던 당시 로마법의 체제 때문에 예수님을 정죄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말에 한 마디만 하셨다. 그후 침묵을 계속하셨다. 빌라도의 마음을 바꿀 만한 말은 더 이상 없었다. ‘침묵은 밤의 어둠이 아니라, 말을 빛나게 하기 위해 모여든 밤의 광채다. 침묵은 말을 빛나게 하기 위해 휴식한다.’ 막스 피카르트의 ‘인간과 말’에 나오는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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