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회시대, 혹은 그 선교시대로 돌아간 한국의 장로교회

흔히 한국의 장로교회 역사를 1884년(혹은 1885년)에 황해도에 설립한 ‘소래교회’로 소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예장 합동교단에서는 기억(‘ㄱ’)자 모양으로 세워진 소래교회당을 복원하여 세워서 이를 기념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예장 통합측의 경우에는 1887년에 미국 북장로교회의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가 광화문 인근에 설립한 ‘새문안교회’로 소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장로교회들의 교회관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교회정치 형태에 관한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지교회의 설립을 완전한 교회의 설립으로 보지 않고 상위(혹은 광위)의 치리회까지를 포함하여서만 비로소 완전한 교회라고 이해한다. 즉 지교회의 치리회인 ‘당회’의 설립 뿐 아니라, 상위의 치리회인 ‘노회’가 설립되어야만 비로소 완전한 장로교회가 세워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기준으로 보자면 한국의 장로교회들은 지난 1984년 혹은 1987년에 100주년을 맞은 것이 아니라, 조선에 독노회가 설립된 1907년도를 기점으로 하여 100년이 지난 2007년에야 비로소 100주년을 맞은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장로교회의 교회관에 있어서 중요한 이해의 근거인 ‘교회의 표지’인 말씀과 성례, 그리고 권징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1907년의 독노회 설립은 세 가지 표지 가운데 중요한 한 부분인 권징과 관련되어 있는 헌법의 체계가 아직 미비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인도장로교회의 12신조와 교회 규칙을 따랐던 1907년 독노회 설립 이후 1922년에 서울 성동예배당에서 열린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 제11회에서 정식으로 완전하게(그러나 거의) 완성되어 가결된 헌법 채용을 기준으로 비로소 장로교회 전래의 기준을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에 한국의 장로교회는 오는 2022년에야 비로소 100주년을 맞는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10년 한일합방은 조선에서 장로교회정치가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는데 있어서 치명적인 장애요인이었다. 특히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가결을 위해, ‘가(可)’만 묻고 ‘아니요(不)’는 묻지 않았던 일, 그리고 이후에 진행된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추방 등은 바로 그처럼 장로교회정치에 치명적인 제동을 건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아울러 그 이후로 한국의 장로교회는 치리회로서의 교회정치를 거의 수행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세속적인 정치판이 되어버린 교회정치 형태로 계승되어 왔으니, 미군정 아래서의 친일파 장로교 목사들의 생존과 군부독재 하에서의 성장 등의 역사는 결코 1922년 조선야소교장로회 헌법조차도 올바로 계승하여 운영하지 못한 퇴보의 역사라 할 것이다.

2019년 현재를 보더라도 한국의 장로교회는 거의 초창기 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rom of Government) 시대 이전으로 퇴보해 있는 상태라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땅히 노회의 지도와 당회의 위원회의 주도를 통해 추진되어야 할 후임(담임)목사의 청빙이 현 담임목사의 의중에 따라 이뤄지거나 심지어 자식에게 계승되는 일까지 보편적으로 행해지며, 당회는 물론이요 노회와 총회조차도 치리회로서의 권위와 신빙성을 상실한 작금의 상태(대형교회 목사의 금권에 의해 교단의 모든 정치기구가 좌지우지 혹은 수습되는 실정)는, 이 땅에 아직 장로회 치리회(노회)가 서지 않았던 1907년 이전으로 퇴보한 참담한 실정인 것이다. 서울 서초동에 소재한 대법원 부근에 자리하면서도 자기 교단의 치리회(노회나 총회)의 정당한 치리조차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세속법정의 판결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어느 초대형 교회(Ultra Megachurch)의 초월적 행태는 바로 그러한 한국의 장로교회의 상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설(paradox or irony)인 것이다.

무엇보다 이 땅에 드러난 가시적인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장로교회를 드러내는 표지(sign) 가운데 한 부분인 ‘권징(혹은 치리)’은 모인 무리들(회중)이 협의하여 제정하는 원칙에 근거하여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 유스 디비눔(Jus Divinum)으로서의 원리와 원칙에 근거하여 이뤄져야만 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장로교회의 목사들의 입에서 “노회” 혹은 “총회”라는 말 대신에 “성(聖)노회” 혹은 “성(聖)총회”라는 말이 오르내리는 것이다. 그처럼 거룩한 교회정치(유스 디비눔의 장로교회정치)가 퇴색한 것이 한국의 장로교회들이라면, 그런 장로교회들(교단)은 다시 선교지가 되어버렸거나, 독립하지 못하고서도 지도할 자가 파송되지 않아 허공에 뜬 불분명한 교파로서의 기독교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 ‘치리장로’의 직제는 성경에 없는 것일까?

전통적으로 장로교회들은 가르치는 장로라 할 수 있는 ‘목사’와 ‘교사(교수)’, 그리고 교회의 기타 다스리는 장로로서의 ‘치리장로’를 치리회의 장로로 두는 이중직제(duplicem ordinem)로 되어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특히 치리장로와 관련하여 스코틀랜드 제2치리서와 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 모범(혹은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 정치형태)은 각각 “목사와 교사들은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가르치는 일에 부지런해야 하며, 장로들도 역시 (말씀이) 회중들 가운데서 똑같은 열매를 맺도록 세심히 살펴보아야 한다.”(스코틀랜드 제2치리서 Chapter 6 : 장로들과 그들의 직무에 관한 조항 다섯 번째 조항), 또한 “정사와 교회의 종교 치리자들을 제정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에 말씀의 봉사자들 외에 다스리는 은사를 주시고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은사를 시행할 사람들을 주사 교회와 행정에 있어서 목사를 돕게 하셨다.”고 했다.

그러므로 장로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중심으로, 성경에 따라 가르치는 직분의 장로와 성경에 따라 가르친 대로 다스리는 직무를 수행하는 장로들이 공히(함께) 성경에 따라 교회를 운영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중적인 장로교회의 치리의 직제가 성경에는 없는 것이라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곤 한다. 예컨대 ‘성경적 장로직 이해: 치리장로 개념은 성경적인가’라는 제목으로 발제한바 있는 주장이 대표적일 것이다.

‘2017년 성경·삶·사역 콘서트’라는 제목의 행사에서 발제한 바 있는 그 주장에 따르면, “신약성경은 치리장로 직분의 존재를 명확하게 말하지 않으며” 또한 “한국 장로교회에서 치리장로의 근거 구절로 보통 많이 사용되는 본문인 딤전 3:1-7절, 딛 1:5-9절, 행 20:17-35절은 해석의 오류가 분명하고, 칼빈이 치리장로 직분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한 고전 12:28절, 롬 12:8절, 딤전 5:17절 역시 오류와 모순이 있다”면서, “신약성경에 치리장로란 존재하지 않으며, 장로는 가르침을 통해 교회를 돕고 다스리는 목회자를 말한다”고 했다. 또한 “한국 교회는 이런 원리를 현실 목회와 교회 정치에 적절히 반영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성경의 장로제도는 복수의 장로들이 함께 사역하는 정치제도를 보여주고 있다. 복수로 목회의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담임하는 체제는 신역성경이 보여주는 모델이 아니다.”라고 했다.

“치리장로 부정… 이미 에라스투스주의, 감독교회정치서 주장”

사실 치리장로에 대한 부정은 에라스투스주의자들과 교황주의자들을 비롯하여 감독교회정치제도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주장되어 왔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장로교회파 목사들이 비공식적으로 간행한 ‘유스 디비눔’(Jus Divinum Regiminis Ecclesiastici)에서도 언급하기를 “일부 엄격한 에라스투스주의자들과 이들을 따르는 자들이 현재 복음주의 시대에 그러한 사역의 직분을 반대하고 부인하는 사실이 목격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에라스투스주의와 감독제(Prelatical) 원리를 고수하는 자들만큼, 교회정치 문제에서 치리장로의 조력을 분별 있는 일오 여기는 것을 단호히 부인하고 반박하는 자들은 없다.”고 했다. 즉 교회의 치리를 국가(혹은 시민정부)의 휘하에 두는 에라스투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지교회의 치리를 고위성직자(Prelates, 즉 감독)에게 두는 감독교회정치제도에서도 지교회에 치리장로를 세우는 것을 부정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유스 디비눔을 보면, “롬 12:8절에 언급된 다스리는 자는 우리가 추구하는 치리장로이며 신적권위를 부여받은 자이다.”라고 하여, 결코 치리장로직분을 교회에서 임의로 만들거나 제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특히 롬 12:8절에서 언급된 “다스리는 자”(ho prohistamenos)라는 단어에 관하여 이르기를 “여기서 “다스리는 자”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는 다른 모든 직원과 구별된다.……(1) 명칭에 있어서 구별되는데 교사는 가르치고 목사는 권면하며 집사는 자비를 베풀고 장로는 그 명칭 ho prohistamenos가 의미하는 것처럼 다스리는 일을 한다. (3)치리장로에게 부여된 직무의 바른 이행을 위한 구체적인 지시 역시 다른 직원들이 받은 지시와 구별된다. 교사는 가르치는 일을 하고(en te didaskalia), 목사는 권면하며(en te parakleti), 집사는 성실하게 대접하고(en haploteti) 기쁜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며(en ilaroteti), 장로는 부지런함과 열심을 다하여 다스려야 한다(두 spoude)”고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와 같이 “다스리는 자”가 구별된 이름과 직무, 그리고 이 직무를 어떻게 이행할지에 대한 구별된 지시를 받은 자이어야 하는 이유는 성령님이 다스리는 자를 여기서 열거된 다른 항존직원들과 구별하여 교회의 일반 직원으로서 세우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장대선 목사, 고백과문답 출판사 대표

“치리장로… 성경에 명시한 교회의 직분”

뿐만 아니라 유스 디비눔에서 잉글랜드의 장로교회 목사들은 고전 12:28절과 딤전 5:17절 본문을 통해서도 치리장로가 성경에 명시한 교회의 직분임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는데, “장로들이 교회의 치리권을 부여받은 사실은 이미 말한 바처럼 직원들에게 적용될 때 치리권과 권위 등을 내포하는 장로(presbuteroi)라는 명칭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장로에 부가된 부가적 분사 prosotes(‘다스리는’, that rule or ruling), 예를 들면 “잘 다스리는 장로들로 하여금”에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장로라는 직책뿐만 아니라 치리장로라는 명칭도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사실 성경에서 다스린다는 말(prosotes)은 딤전 3:4절에서 “자기 집을 잘 다스려…”라고 할 때에 동일하게 사용된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단지 교리와 모범을 보이는 것으로 자녀들을 다스리는 것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명백한 권위로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치리장로의 직무는 교리와 모범으로서만이 아니라, 교회의 실제적인 권위로서의 치리권에 따라 회중을 다스릴 줄 아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와 더불어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따라 서도록, 그리고 그러한 권위에 따라 회중을 잘 다스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 치리권의 목적이다. 한마디로 장로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교훈들을 가르치고 성경이 교훈하는 바를 따라 행하며, 성경이 교훈하며 명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다스리는 형태로 운영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치리장로는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와 더불어서 치리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스 디비눔은 “교회를 다스리는 모든 자들의 직무에 좀 더 보편적인 공동의 권세, 책망, 즉 징계와 출교, 여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다른 행위들까지 이 권세에 포함된다. 말씀 전하는 장로뿐 아니라 다스리는 장로는 공동으로 최선을 다해서 이러한 일들을 시행하는데, 이는 성경 곳곳에서 증거하고 있다.”고 하면서 “마 18:17-18; 고전 5:2,4,5,7,11-13, 12:28; 고후 6:12; 롬 12:8; 딤전 5:17”절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 같이 하는 가운데서 목사 혹은 치리하는 장로 어느 한 쪽이 주도권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공교히 서는 교회 운영의 원리가 바로 장로교회정치인 것이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