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자선교사주의는 초대교회 태동과 같은 선상에 있어

 

김태연 목사(한국전문인선교원 원장, 전 명지대교수)

전신자선교사주의의 역사적 고찰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의 뒤를 이은 초기 교회는 모든 교회의 지체들이 참여하는 선교활동을 보여주었다. 오순절 교회의 탄생이후 초기 5세기동안에 대부분 선교의 사역을 담당한 사람들은 특정한 교회내의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상인들이거나 군인들이거나 노예들이었다. 이들은 선교의 사명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신학적이나 교리적으로 혹은 현학적으로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모든 신자들의 자연스러운 책임으로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였던 것이다.

오히려 이 전신자선교사주의가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기독교가 국교가 되어진 이후부터이다. 밀란 칙령으로 기독교가 더 이상의 핍박을 당하지 않게 되고 수 년 후 오히려 국교가 되자 이때부터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일부 신중하지 않은 기독교신자들이 이제는 이교도들을 핍박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많은 이교도들이 실제적 중생의 체험이 없이 교회내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은 껍데기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내적으로는 이교도의 신앙과 행습에서 별 변화를 가지지 않은 자들이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내로 유입되어지기 시작하자 기독교 교리에 혼탁이 일어나게 되고 이것이 심각한 수준에 달하게 되자 교회는 교리적 보호를 위하여 훈련되어지고 교회로부터 공인받지 않은 소위 평신들의 전도와 사역을 제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초기에는 이해되어지는 이유로 시작이 되었지만 결국 전신자선교사주의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어서 로마제국이 와해되어지는 종반부의 시기에 이르러서는 교회의 선교열기를 초기 교회시대에 비하여 결정적으로 죽여 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신자선교사주의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로마 가톨릭 시대에 만인제사장직론은 말살되어 버리다시피 되었지만 전신자선교사주의는 어느 정도 인정이 되었던 것같다. 성례전의 집행과 예배의 집전에서는 완전히 제외되었지만 사제의 직분이 아닌 사람들도 사제를 도와서 선교사역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종교개혁의 초기에 오히려 루터는 만인제사장직을 주창하고 이를 회복시켰지만 이를 만인선교사직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하였다. 이것이 초기 종교개혁 교회들이 세계복음화에 극히 소극적으로 대처하게 만든 신학적 이유이었다. 반면 개신교로서 이 시대에 선교의 선구적 역활을 한 모라비안들의 선교를 살펴보면 이들은 철저하게 전신자선교사주의를 그들의 신학적 근간으로 삼았음을 발견하게 된다. 모라비안의 선교사들은 대부분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대단히 단순한 농부들과 기술공들이었다.

개신교의 선교가 윌리엄 케리 이후 본격화되어지기 시작하면서 많은 평신도들과 여성들의 선교 참여가 늘어나게 되었고 전신자선교사주의는 교회 내에서 다시 인정이 되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학생자원선교운동 (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시작과 함께 적지 않은 평신도들이 선교지로 나아가게 되면서 선교의 선진 지역인 서구 교회에서는 전신자선교사주의에 대하여서 폭넓은 이해와 인정이 되었다. 반면 권위주의적 제도가 주류를 이루는 한국교회에서는 전신자선교사주의에 대하여서 성서의 원리적인 면에서는 별 반대가 없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아직 충분한 이해와 인정이 되어지지 않고 있다고 보인다.

 

교회론적 입장

교회는 그 자체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선교의 대행 기구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의 구성 자체는 구원받은 자들의 예배 공동체이지만 그 존재의 사명은 세상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는 자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들이는 선교이다. 다른 표현을 사용한다면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사도직 명령을 받은 존재이고 이 사도직 명령은 교회 전체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요약하면 교회는 성별된 특수한 사람들만의 책임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책임져야 할 사명이 있는 기구이고 교회의 전 신자는 원칙적으로 다 같은 사명과 책임을 가지고 있으며 교회의 사도적 성격과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는 선교적 사명 속에 참여하여야 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교회의 사명은 전신자선교사주의의 그 논리의 기초로 가지고 있다.

교회론이 전신자선교사주의에 기초하지 않을 때 교회는 그 존재론에 있어서 상당한 오류 내지는 혼란을 일으키고 결과적으로 빈약한 교회론으로 인한 교회 사명의 약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오류를 루터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루터는 카톨릭의 교회관, 즉 교회를 어떠한 성례전적 구원제도로서 보는 견해에 반대하기 위해서 교회를 의인되어진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그의 교회론을 형성하였다. 이 견해 자체의 제기 동기는 올바르다고 인정할 수 있지만 그 결과 그의 교회론은 역동적인 요소를 결여하게 되었고 이것이 초기 종교개혁교회들이 선교와 전도에 소극적이 되게 한 요인 중의 하나라고 논자는 본다. 교회는 선교를 위하여 존재하는 기구이다. 건전한 교회론은 마땅히 전신자선교사주의에 그 기초를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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