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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철 칼럼】 십자가의 죽음이 일상인 누룩 목사한 줌의 누룩 되어 (4)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십자가의 죽음이 일상인 사람, 목사

하나님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누룩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찾으신다. 영웅이 사라진 시대에 유일하신 하나님 신앙만으로 믿음의 영웅이 되고자 하는 사람, 죄의 유혹을 거절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참 경건함으로 살아가는 사람, 자신의 능력을 포기하고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할 순교자, 자신의 전 존재를 진리의 빛으로 밝히고 자신의 전 생애를 영혼 사랑의 뜨거움으로 불태울 목자요 전도자인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한 사람을 찾으신다. 이 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미말에 처한 종도 그렇게 되기를 몸부림친다.

목사는 자신의 천직인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와 말씀에 전무해야 한다. 정치도 필요하고 행정도 요구되고 목회의 여러 업무가 있지만 기도와 말씀 이상으로 해야 할 긴급한 일은 전혀 없다. 신자들도 마찬가지다. 먹고 살아야 하고 사업도 해야 하고 친교도 해야 하고 할 일이 많지만 교회를 섬기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앞세울 만한 일은 없다. 성직자, 평신도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 말씀 안에서 깨어지고 부서져야 한다. 두터운 자아가 깨어지는 아픔을 반드시 맛보아야 한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는 부활의 생명은 주어지지 않는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자기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닌 이어야 할 그 누구

누룩인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다. 누룩인 신자가 모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오늘날 가짜 교회들이 많다. 목사도 가짜가 많고 신자도 가짜가 많다.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누룩도 아닌 것이 누룩인체 하면서 살아들 간다. 그러나 어떤 누룩이냐가 중요하다. 가루 서 말을 부풀게 하는 천국의 누룩인가? 아니면 가루 서 말을 썩게 하는 지옥의 누룩인가?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 있는 신자로 만드는 누룩인가? 아니면 세상풍조에 휩쓸려 자신도 죽고 남도 죽게 만드는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인가? 목사들부터 썩는 한 알의 밀이 되어 신자들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이 시대의 거룩한 누룩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치를 버리고 업적을 포기하고 골방에 엎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성경에 파묻혀야 하지 않겠는가! 정치는 정치꾼들에게 맡기고 업적도 명성을 추구하는 야망꾼들에게 줘버리고 오직 근본에 매달려 무릎 꿇어 기도하고 일어서서 외쳐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에게 거듭 간청하지만 부디 정치꾼들에게 이용당하지 말고 일체의 과업 중심의 외부 사역을 중단하고 오로지 당신 자신이 조국교회에 공헌할 수 있는 영성 회복의 길에 서서 말씀의 종으로 강단 문화를 몇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주기를 부탁드린다. 당신이라면 할 수 있고 반드시 해야 한다고 믿는다. 당신은 “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이어야 할 그 누구”다. 말씀과 기도에 집중, 반복, 지속, 몰입함으로 대중설교가로서, 영성실천가로서, 기도와 말씀에 전문인 마에스트로로서 위기의 한국을 그 깊은 심연에서 벗어나게 할 이 시대의 한 구원자로 스스로를 갈고 닦아야 한다고 감히 도전하고 싶다.

 

영혼을 두드리는 북, 영혼이 불어대는 양각나팔의 말씀

한국의 모든 설교자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러 찾아 나오는 신자들을 향해 피, 땀, 눈물이 섞인 액체성 말씀을 외치라 말하고 싶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도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피를 토하며 울었는데,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한 말씀 사역에 피를 토하는 열정과 간절함이 없다면 무언가 잘못된 일일 것이다. 이 땅에 산재한 모든 말씀의 전령자들에게 제발 복음을 천박하게 꾸미지 말고 장엄한 하나님의 나팔소리만이 울려 퍼지게 하라고 말하고 싶다. 아픈 영혼이 두드리는 시대의 북이 되고 갈급한 영혼이 불어대는 민족의 양각나팔이기를 열망한다.

길이 없는 사막에서 갈 길을 잃어 헤매는 가련한 영혼들에게 모여들 깃대가 되고 바라볼 광명성이 되라고 소리 높이 외치고 싶다. 갈림길이 많아 우왕좌왕하는 순례자들에게 분명한 한 길을 가리킬 표식이 되라고 호소하고 싶다. 살려주는 영(life-giving spirit)이신 생기로 인해 골짜기의 마른 해골 떼들이 살아 일어나 하나님의 큰 군대를 이루었듯이, 말씀의 사자들이 산 영(living spirit)이 되어 한반도의 골짜기에 죽어 나자빠진 영혼들을 일깨우라 고함치고 싶다. 나아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법궤를 되찾기 위해 한국 교회 전체가 민족적인 회개운동을 일으켜야 할 것이라고 목 놓아 울부짖고 싶다.

 

이 강산 밝힐 횃불이 되며 온 강토 퍼질 누룩이 되고

이미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이 교계에 다시 거룩한 촛대가 세워지기 위해 당신은 기도에 불이 붙어 기도하기를 밥 먹듯 하는 목사, 말씀에 파묻혀 그 입에서 이한 검처럼 말씀이 역사되는 목사, 영혼 사랑으로 그 마음이 불타오르는 불꽃 목사가 되어야 한다. 바람 앞에 가물거리는 촛불이 아니라 타오르는 횃불이 되어 이 강산을 밝힐 목사여야 하리라. 주님이 바라시는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고 일체의 모든 유혹을 지양하며 너와 내가 어우러져 앞서거니 뒤서거니 당겨주고 밀어주는 가운데 함께 추구해야 할 목회적 과녁을 이룩해야 한다. 이런 꿈과 사명감으로 달구어진 일군들이 한 동아리를 형성해야 한다.

공동체로서의 힘을 결집해야 한다. 한 방향을 응시하는 시선을 모우고 동일한 비전의 시대적 실현을 위해 몸부림치며 브니엘의 새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얍복 나루터에서 함께 뒹굴어야 한다. 기도로 새하얀 밤을 새우며 말씀의 용광로에다 모두의 마음과 생각, 언어와 행동거지마저 녹여야 한다. 함께 여행 가고 함께 음식을 나누듯 오직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거룩한 한 주간”을 마련할 수는 없을까?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와 말씀에 집중, 몰입하는 경이로운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해서라도 한 줌의 누룩으로 화해 가야 한다. 주님의 손에 쥐어진 한 줌의 누룩이 되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억 만의 가루도 맡겨주실 것이다. 바로 당신이 한 줌의 누룩 되는 최전선에 서라!

 

묵은 누룩과 새 누룩이 갈리는 시대

하나님의 심정을 전하는 강한 목소리가 필요하다. 중국 경극의 천편일률적인 목소리에서 벗어나 우레와 같은 목소리, 비를 부르는 천둥번개와 같은 능력의 소리를 전해야 한다. 속삭이고 지절거리는 메시지에 길들여져 야성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영혼에 일대 개혁을 일으켜야 한다.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의 물결을 잠재울만한 소리의 능력을 이어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소리에 놀라 잠을 깨고 그 소리의 능력에 우리 자신이 깨어지고 그 소리의 은혜로 참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 말씀이 되어 음성으로 전해지고 소리로 남겨진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 한다. 한 줌의 누룩이 될 때에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하다.

주님 안에서 되어야 할 누룩이 되라! 누룩이 되어 기도해야 한다. 누룩이 되어 말씀을 전해야 한다. 누룩이 되어 주의 일을 감당해야 한다. 누룩이 되어 살고 죽을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변화를 통해 타인의 변화를 돕는 하늘의 누룩이 되도록 하라! 마귀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으로 만들어 세상에 곰팡이가 피어나게 하고 있다. 지금은 누룩과 누룩이 싸움을 하는 시대다. 하나님의 나라를 부풀리고자 하는 이스트와 세상나라를 건설하려는 이스트가 투쟁하는 때다. 거룩한 누룩이든 악독한 누룩이든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짐을 명심해야 한다. 악한 원수 마귀와의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우리를 더럽히는 묵은 누룩을 내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는 새 누룩으로 우리의 영혼을 무장해야 한다. 사망에서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묵은 누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와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새 누룩의 능력으로 덧입혀야 한다.

크리스천은 시대의 북이요 역사의 나팔일 뿐 아니라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누룩이다. 자신의 형체를 부서뜨려 이웃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 우리 자신이 변화되는 경험을 반드시 거쳐야 하고 그 변화의 능력과 영성이 우리들의 가정, 우리의 조국 교회에까지 강력히 스며들게 해야 한다. 변화를 경험한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누룩인 하나님의 사람들로만이 가능하다. 한 줌의 누룩이 되지 못했던 과거를 한하며 이제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채에 거르고 걸러져 한 줌의 누룩이 되기를 갈망하면서 흐트러졌던 마음을 정리한다.

 

말의 성찬(盛饌)은 있지만 말씀의 미각(味覺) 없는 설교자

한국최고의 설교가라는 은퇴목사님의 특강을 들었다. 평생 새벽기도를 빠진 적이 없었노라 고백한다. 대단한 일이다. 말을 잘한다. 반 이상이 반말 투성이다. 간혹 웃음을 던지지만 질책이 많다. 와그너와 맥가브란의 이름은 인용되어도 호세아나 바울의 인용은 없다. 비행기도 타보지 못한 500년 전의 주석가들이 쓴 책은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고 한다. 막말도 이 정도 수준이면 가히 메가톤급이다. 고전적인 경건서적에는 그분이 맨발 벗고 평생을 달려가도 따라잡지 못할 영성이란 것이 있다. 그분에게서는 영성이란 것이 보이지 않는다. 잠시 반짝이는 건 지성의 단편뿐! 내 눈에 비늘이 끼었기 때문일까? 시대정신을 구현하려면 이 시대의 책을 보아야 한다고 강변한다. 경제심리학을 읽고 설교에 인용했더니 사업하는 교인들이 찾아와 은혜 받았다는 덕담을 남겼다 한다.

독서를 즐기는 필자의 입장에서도 다양한 책의 섭렵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양한 분야의 책은 읽을 필요가 있다, 겸하여 성경은 그보다 몇 십, 몇 백배 더 읽어야 한다. 경건서적도 마찬가지다. 전문가가 되려면 전문 관련 서적을 섭렵해야 한다. 심방무용론을 주장한다.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녀 기자가 찾아갔을 때 보인 신경질적인 반응에서 이 시대 최고설교가의 면목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그의 설교에 말의 성찬은 있어도 말씀의 미각이 없다. 지금도 그의 설교에 취한 이들이 많음은 시대의 비극이요 하나님의 메신저로선 부끄러움이다. 목회성공의 비결을 얻을까 하여 찾아와 듣는 이들을 호통조로 다루는 그의 태도에서 배울 바는 하나도 없었다. 쏟아진 물처럼 담을 수도 없는 그 독설과 뒤틀린 말의 파편들을 어이 할 것인가!

 

십가가 없는 즐거움이 축복받은 목회인가?

어떤 목사는 일국의 대통령을 무릎 꿇여 기도케 했다. 가는 곳마다 무용담처럼 거론될 것을 생각하니 착잡하다. 어떤 목사는 현직 대통령을 “OOO이!” 그렇게 불렀다. 자기 교회 출신을 그렇게 부른다 해서 목사가 대단해 보이는가? 사표가 되어야 할 한국교회의 어른들이 보인 추태에 낯이 뜨거워진다. 대형교회에서 추앙받은 습성에 젖어 젊은 목사들을 함부로 대한다. 반말도 격이 있는데 듣는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한경직 목사님은 아무리 새까만 후배라도 반드시 깍듯이 예우했다. 그렇게 하려고 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분의 인격이었다. 그런 인격을 지닌 분이 우리 주변에 없다. 누룩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모습은 이처럼 차이가 난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훌륭한 목사님의 가정을 일례로 들면서 대형교회 출신의 한 원로목사님은 아주 모멸스러운 비평을 일삼았다. 그분이 끼친 공적에 비하면 그 원로목사님은 그런 상스런 비평을 공개적으로 할 자격이 없었다. 목회를 십자가라 하면서 목회자가 되지 않기로 했다는 자식을 이해하고 인정했다는 것이 공격의 내용이었다. 목회는 즐거움으로 해야지 십자가로 생각한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발언이었다. 목회에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목회는 십자가의 길이다. 힘들고 어려운 길이다.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 성경적 목회관을 근본적으로 뒤집어엎으면서 그 집안을 ‘망한 집안’ 운운한 것은 패륜어(悖倫語)다. 나는 그의 말을 들은 내 귀를 씻었다.

 

말씀의 영광을 가로채 화려한 채색옷 입은 자들

왜들 이러나 싶다. 누룩에 절어버린 이들도 십자가의 자기부정을 외치지만 반대자들을 침묵시키는 수단으로 악용한다. 주님의 자기희생을 강조하지만 본인의 삶은 희생의 피가 사라진 가인의 메마른 제단이다. 목회란 그들에게 철밥통이며 양떼란 무궁무진하게 쏟아져 나오는 치즈의 원료일 뿐이다. 죽음의 음산한 밤을 맞이하기 전에 그들이 주님과 만났던 첫 사랑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한다. 스스로 돌이키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주신 신호와 경고를 무시한다면 결국 아픈 채찍을 휘두르실 텐데. 차라리 육신은 상해도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결말이리라. 모래알로 얼굴을 씻듯 이 슬픈 현상들을 보고 들으며 종다운 종의 길을 가기 위한 경계로 삼으리라!

왕이신 나의 하나님을 높인다고 찬양하면서 실상 왕노릇을 하는 자가 누구인가? 주님의 서명날인이 되지도 않은 내용을 어명이랍시고 도용하는 자가 누구인가? 왕의 칙서를 지닌 칙사라 자칭하며 칙사 대접을 기대하는 자가 누구인가? 목사를 별종인간으로 구분하여 반신반인처럼 섬기게 만든 것은 누구의 작품인가?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축복을 안기고 껄끄러운 상대에겐 듣지도 않을 저주를 웅얼거리는 못된 습성은 누구에게 물려받은 것인가? 늘 지도자여야 하고 가르치는 입장에 서야 하는 선지자 의식을 언제부터 품게 되었나? 배우면 배울수록 고개 숙이는 벼가 되지 못하고 돋보이려는 자가 곧 가라지가 아닌가? 기도하면 할수록 자신의 부족함에 탄식이 쏟아져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점쟁이 노릇하려는 자는 어떤 영을 모시고 있는가? 말씀의 영광을 가로채며 요란하게 채색된 옷을 덧입히거나 말씀 자체의 의미를 왜곡하여 말씀을 발가벗기는 사악한 말쟁이들은 누구의 종인가? 누룩으로 부풀어 오른 지도자의 삶이다.

 

 

윤홍식 기자  jesuspoin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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